Draft 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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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원고

삼국 시대는 기원전 1세기부터 서기 7세기까지 한반도와 (오늘날의 중국과 러시아인) 만주 일대를 무대로 한 시기를 가리킨다. (옮긴이 의견: 삼국 시대는 기원전 1세기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세워져 서로 각축을 벌이다가 7세기에 신라에 의해 통일되기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 이 시대의 초기에 힌반도 남부에는 수십 개의 성읍 국가들이 지역별로 세 개의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 남서부의 마한과 남동부의 진한 및 중남부의 변한이 그것으로, 통칭해서 삼한이라고 부른다. 한편 한반도 북부에서 만주일대에 걸친 지역에는 가장 북쪽에 위치한 부여와 북동부의 옥저, 중동부의 동예, 북부의 고구려 등 여러 왕국이 존재하고 있었다. 서기 4세기까지 지역의 성읍 국가들이 세력을 통합하면서 마한, 진한, 변한은 각각 백제와 신라와 가야라는 왕국으로 발전해 갔고, 북부의 여러 왕국은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이 무렵에 불교가 한반도에 전래되어 각 왕국의 국교가 되었다. 5세기 말에 이르러 고구려는 북쪽으로 만주 전역을 장악하고, 남쪽으로는 백제, 가야, 신라를 한반도 남단으로 밀어 내었다. 6세기 중엽에 신라는 가야를 정복하고,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영토를 획득하였다. 6세기 후반부터 7세기 중반까지 고구려, 백제, 신라 사이의 계속된 (삼국 시대란 말을 낳게 한) 영토 다툼 끝에 신라가 중국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치고, 676년에 한반도의 2/3 지역을 통합함으로써 이른바 통일 신라 시대로 들어선다. 이 시대에 관한 자료는 각각 12세기와 13세기에 씌어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한반도 남서부와 남동부 지역의 문화적 차이는 이 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다.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1. “6세기 중엽에 신라는 가야를 정복하고,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영토를 획득하였다.”→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의 영토를”
2. “오늘날 한반도 남서부와 남동부 지역의 문화적 차이는 이 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다.” → 근거가 없음. 한반도 남서부와 남동부 지역의 문화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또 그것을 삼국시대까지 소급하는 것은 바른 인식이 아니다. 두 지역의 차이는 방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릴 일이 아니다.


수정 원고

  • 제목: 한반도의 용광로, 삼국시대

삼국시대는 기원전 1세기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세워져 서로 경쟁을 벌이다가 7세기 신라에 의해 통일되기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6세기까지 한반도 남부에는 가야가 함께 경쟁하고 있었지만, 연맹체 단계에서 신라에게 정복당하였기 때문에 가야는 삼국에 포함되지 않는다.

연맹체란 고대국가가 출현하기 이전의 발전 단계에 해당하는 것으로 현재 도시 정도 규모에 해당하는 성읍국가들이 느슨한 형태로 연결되어 형성된 정치체를 말한다. 강력한 왕이 존재하여 왕권이 중앙으로부터 모든 영역에 행사되는 고대국가의 모습과는 달리 개별 성읍국가는 그 권력자가 자치적인 정치력을 행사하였다. 동시에 전체 연맹을 대표하는 일에 대해서는 연맹체 구성원으로 함께 참여하여 역량을 발휘하였다.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는 연맹체 단계에서 고대국가로 발전하는데 성공하였으나, 가야는 연맹체 단계에서 그대로 멸망하고 말았다. 때문에 가야는 같은 시대에 활동하였지만 여기에 포함되지 못하고 이 시기는 그대로 삼국시대로 지칭되고 있는 것이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한반도 남부에 수십 개의 성읍국가들이 지역별로 세 개의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 남서부의 마한과 남동부의 진한, 그리고 중남부의 변한이 그것으로, 이를 통칭하여 삼한이라고 부른다. 고대 중국의 역사서에 기록되는 한반도 남부의 진(辰)은 바로 이 삼한을 지칭하는 것이다. 한편 한반도 북부와 만주일대에 걸친 지역에는 가장 북쪽에 자리 잡은 부여와 옥저, 동예를 위시하여 연맹체 단계의 고구려가 위치하고 있었다.

이들은 서기 4세기까지 각 지역의 성읍국가들과 연맹체들이 세력을 통합하는 경쟁을 거치면서 차츰 마한이 백제로, 진한이 신라로, 변한이 가야로 통합되어갔다. 그리고 북부의 여러 연맹체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흡수되었다. 이로써 한반도는 고대국가 단계로 발전한 세 나라와 연맹체 단계에 머물러 있는 가야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이 무렵에 불교가 한반도에 전래되어 각 나라에서 사상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불교는 기존의 토착신앙과 종교를 대신해 왕권과 왕실의 권위를 설명하는 논리로 적극 활용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삼국시대 각 나라는 왕실이 앞장서 적극적으로 불교를 수용하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아래로 백성들에게까지 전파되어 삼국시대의 핵심적인 정신문화로 뿌리내릴 수 있었다.

4세기 후반, 5세기에 접어들어 삼국은 급격한 영토의 확장의 시기를 맞이한다. 가장 먼저 백제가 마한의 전 지역을 정복한 뒤 계속해서 일본의 큐슈와 중국의 요서 및 진평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크게 번성하였다. 5세기 말에는 고구려가 북쪽으로 만주 전역을 장악하고, 남쪽으로는 백제와 가야, 신라를 한반도 남쪽으로 밀어 내며 최대의 영역을 구축하였다. 6세기 중엽에는 신라가 크게 성장해 가야를 정복한 뒤, 고구려가 차지했던 한강 유역과 강원도, 그리고 함경도 남부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에 6세기 후반부터 7세기 중반에 이르러 삼국간의 경쟁은 더욱 높은 긴장감을 조성하였다. 그간 이들의 영토 경쟁은 세 나라 가운데 강성해지는 나라가 출현 했을 때, 나머지 두 나라가 힘을 합쳐 대항하는 양상이었다. 그러나 6세기 중엽 이후 강성해진 신라에 대응해 고구려와 백제가 동맹을 맺고 북방의 돌궐과 바다 건너 일본까지 그 세력권에 끌어들이자 신라는 고립을 피하고자 과감하게 당나라와 연합하며 국제전의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당나라와 연합한 신라는 660년 백제를, 668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키며 드디어 삼국의 통일을 이뤄냈다. 그리고 이어 676년에는 동맹 관계를 무시하고 한반도 전역을 장악하려는 당나라에 맞서 나당전쟁을 통해 승리를 거두면서 외세를 물리치고 진정한 민족의 통일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신라는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에 해당하는 한반도의 2/3를 차지한 통일왕국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삼국시대에 관한 사실은 각각 1145년과 1281년에 씌여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교열본

  • 제목: 한반도의 용광로, 삼국시대

삼국의 등장

기원전 1세기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서 서로 경쟁을 벌였다. 이 시기부터 7세기 신라에 의해 통일되기까지를 삼국시대라고 한다. 6세기까지 한반도 남부에는 가야가 함께 경쟁하고 있었지만, 연맹체 단계에서 신라에게 정복당하였기 때문에 가야는 삼국에 포함되지 않는다.

연맹체란 고대국가가 출현하기 이전의 발전 단계에 해당하는 것으로 현재 도시 정도 규모에 해당하는 성읍국가들이 느슨한 형태로 연결되어 형성된 정치체제를 말한다. 강력한 왕이 존재하여 중앙으로부터 모든 영역에 왕권이 행사되는 고대국가의 모습과는 달리 개별 성읍국가는 성읍의 권력자가 자치적인 정치력을 행사하였다. 동시에 전체 연맹을 대표하는 일에 대해서는 연맹체 구성원이 함께 참여하여 역량을 발휘하였다.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는 연맹체 단계에서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가야는 연맹체 단계에서 그대로 멸망하고 말았다. 때문에 가야는 같은 시대에 활동하였지만 여기에 포함되지 못하고 그대로 삼국시대로 지칭되고 있는 것이다.

연맹체에서 국가로

삼국시대 초기에는 한반도 남부에 수십 개의 성읍국가들이 지역별로 세 개의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 남서부의 마한과 남동부의 진한, 그리고 중남부의 변한이 그것으로, 이를 통칭하여 삼한이라고 부른다. 고대 중국의 역사서에 기록되는 한반도 남부의 진(辰)은 바로 이 삼한을 지칭하는 것이다. 한편 한반도 북부와 만주일대에 걸친 지역에는 가장 북쪽에 자리 잡은 부여와 옥저, 동예를 위시하여 연맹체 단계의 고구려가 위치하고 있었다.

이들은 서기 4세기까지 각 지역의 성읍국가들과 연맹체들이 세력을 통합하는 경쟁을 거치면서 차츰 마한이 백제로, 진한이 신라로, 변한이 가야로 통합되어갔다. 그리고 북부의 여러 연맹체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흡수되었다. 이로써 한반도는 고대국가 단계로 발전한 세 나라와 연맹체 단계에 머물러 있는 가야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이 무렵에 불교가 한반도에 전래되어 각 나라에서 사상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불교는 기존의 토착신앙과 종교를 대신해 왕권과 왕실의 권위를 설명하는 논리로 적극 활용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삼국시대 각 나라는 왕실이 앞장서 적극적으로 불교를 수용하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아래로 백성들에게까지 전파되어 삼국시대의 핵심적인 정신문화로 뿌리내릴 수 있었다.

삼국의 영토 확장 경쟁

4세기 후반, 5세기에 접어들어 삼국은 급격한 영토의 확장의 시기를 맞이한다. 가장 먼저 백제가 마한의 전 지역을 정복한 뒤 계속해서 일본의 큐슈와 중국의 요서 및 진평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크게 번성하였다. 5세기 말에는 고구려가 북쪽으로 만주 전역을 장악하고, 남쪽으로는 백제와 가야, 신라를 한반도 남쪽으로 밀어 내며 최대의 영역을 구축하였다. 6세기 중엽에는 신라가 크게 성장해 가야를 정복한 뒤, 고구려가 차지했던 한강 유역과 강원도, 그리고 함경도 남부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국제전의 결과, 삼국통일

이에 6세기 후반부터 7세기 중반에 이르러 삼국간의 경쟁은 더욱 높은 긴장감을 조성하였다. 그간 이들의 영토 경쟁은 세 나라 가운데 강성해지는 나라가 출현했을 때, 나머지 두 나라가 힘을 합쳐 대항하는 양상이었다. 그러나 6세기 중엽 이후 강성해진 신라에 대응해 고구려와 백제가 동맹을 맺고 북방의 돌궐과 바다 건너 일본까지 그 세력권에 끌어들이자 신라는 고립을 피하고자 과감하게 당나라와 연합하며 국제전의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당나라와 연합한 신라는 660년 백제를, 668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키며 드디어 삼국의 통일을 이뤄냈다. 그리고 이어 676년에는 동맹 관계를 무시하고 한반도 전역을 장악하려는 당나라에 맞서 나당전쟁을 통해 승리를 거두면서 외세를 물리치고 진정한 민족의 통일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신라는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에 해당하는 한반도의 2/3를 차지한 통일왕국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삼국시대에 관한 사실은 각각 1145년과 1281년에 쓰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