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발해

Korea100
이동: 둘러보기, 검색

1차 원고

발해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 걸쳐, 남쪽의 신라 왕국과 공존하던 국가였다. 그래서 이 시대를 일컬어 역사가들은 남북국 시대라고 한다. 이 나라는 고구려 장수 대조영(고왕)이 천문령 전투에서 당나라를 물리친 후에 처음에는 진이라는 국호로 건국하였으며, 762년에 국호를 발해로 개칭하였다. 발해의 통치 제도는 당의 것을 모방하였지만, 문화는 고구려에 뿌리를 두었다.

발해를 둘러싸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나라의 건국 세력과 그 영토에 살았던 주민들의 인종 문제이다. 발해는 한국의 고대 국가인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간주되지만, 또한 많은 말갈족이 살고 있었다. 대조영이 고구려인인 것이 확실하다고 해도 기록에는 그가 인종적으로 한국인인지 말갈족인지가 나와 있지 않다. 그럼에도 “고고학 발굴 자료는 발해 문화가 중국과 한국 및 토착 문화의 융합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내용이 너무 소략하고, 그것도 대조영의 건국과 구성 민족에 관한 것 밖에 없음. 전면 재집필이 필요함.



수정 원고

  • 제목: 고구려를 닮은 기상, 발해

발해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 걸쳐 옛 고구려의 영토를 넘어서는 한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나라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대동강 이북의 고구려 옛 땅을 당나라에게 빼앗겼는데, 이후 발해가 그 땅을 회복하고 나라를 세우면서 이 시기 남쪽과 북쪽에 각각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함께 공존할 수 있었다 하여 이를 ‘남북국시대’로 칭하기도 한다.

발해는 옛 고구려 장수 출신인 대조영(고왕)이 천문령 전투에서 당나라를 물리친 이후 진(震)이라 칭하며 나라를 세웠고, 이후 762년에 국호를 발해로 고치면서 확립되었다. 이후 무왕때 대대적인 영토확장이 이뤄져 북쪽으로 흑룡강과 남쪽으로 신라의 국경선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며 스스로 강대국임을 자임하였다. 특히 732년 장군 장문휴로 하여금 당나라 등주 공격케 할 만큼 국력에 대한 자신감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무왕을 이어 문왕이 즉위한 뒤에는 문치(文治)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당나라의 통치제도를 기준으로 국가의 통치제도를 정비해 나갔다. 또 신라와의 교통로인 신라도를 설치하면서 수도를 중심으로 한 기반시설 등도 정비해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발해를 황제국의 반열로 격상시키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발해의 발전상을 두고 선왕때에는 당나라마저도 ‘해동성국’이라 칭송하며 인정하였다.

발해의 통치제도는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면서도 독자적인 칭호와 관청을 세워 운영하였고, 대외적으로는 고구려를 계승한 후예로 자칭하면서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분명히 내세우고 있다. 특히 발해의 무왕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 발해가 ‘고구려와 부여의 땅을 모두 회복했음’을 선언하기도 하였고, 문왕 역시 일본에 사신을 보내며 국서에 ‘고려의 국왕 대흠무’라고 표현하였다. 발해의 왕이 스스로 고구려의 왕이라고 칭했다는 것은 그만큼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강렬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인 셈이다.

한편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은 문화 유적과 유물 등에서도 확인이 된다. 문왕의 둘째 딸인 정혜공주 묘의 조성 방식은 굴식 돌방무덤으로 전체 구조와 천장을 모줄임 방식으로 조성하였다는 점은 전형적인 고구려의 고분 조성 방식이라는 점에서 그 계승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심지어 당나라 문화의 영향으로 조성된 것이라 알려진 문왕의 넷째 딸 정효공주 묘 역시 당나라 방식과 고구려 방식이 융합된 형태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 밖에 발해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불교 유물의 경우 불상의 상당수가 같은 시기 당나라의 양식 보다는 좀 더 이른 시기의 양식을 취하고 있고, 지붕을 덮었던 막새기와의 양식은 전형적인 고구려 양식이 베풀어져 있다는 점에서 당나라의 영향 보다는 고구려의 문화적 영향 속에 그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당나라와 문화적 교류는 활발하였고 다수의 유학생들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빈공과에 합격시키기도 하였다. 같은 시기 신라도 당나라에 유학생을 보내 적극적으로 선진 문물을 흡수하려 노력하였는데, 이 때 발해와 신라는 보다 앞선 실력을 뽐내며 함께 경쟁하기도 하였다. 특히 문왕대 문화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하면서 이러한 양상을 두드러졌다.

그 결과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무덤 지문에서 유교 경전과 사서의 내용이 언급된 화려한 변려체 문장이 구사될 수 있을 만큼 발해의 문화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처럼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강한 인식 속에서 중국과의 적극적인 문화교류를 통하여 높은 수준의 문화와 강성한 국력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10세기에 접어들어 5대 10국 시대에 접어들면서 북방의 거란족이 발흥하는 가운데 발해를 침략하였고, 이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926년 발해는 멸망에 이르고 말았다. 발해가 멸망한 이후 그 유민은 당나라에 흡수되거나 남하하여 고려로 투항하였다. 남북국 시대의 두 나라를 모두 통합한 고려는, 이로써 진정한 의미의 민족의 통일을 이뤘다고 평가되고 있다.

발해는 고구려 계통의 지배계층과 말갈 계통의 피지배계층으로 구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통해 발해 역사가 어느 나라 역사로 귀속되어야 하는 문제가 관련 국가들 간 치열한 논란꺼리로 남아 있다. 다만 고구려 자체가 말갈 및 북방의 유목민족들을 포함한 다민족 국가였으며, 발해의 고고학 발굴 자료들이 고구려의 문화를 토대로 토착문화와 당나라의 문화가 융합된 복합적인 문화임을 증명하고 있는 만큼 보다 총체적인 측면에서 고구려와의 계승성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교열본

  • 제목: 고구려를 닮은 기상, 발해

발해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 걸쳐 옛 고구려의 영토를 넘어 한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나라이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면서 대동강 이북의 고구려 옛 땅을 당나라에게 빼앗겼는데 이후 발해가 그 땅을 회복하고 나라를 세운 것이다. 이 시기 남쪽과 북쪽에 각각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함께 공존할 수 있었다 하여 이를 ‘남북국시대’로 칭하기도 한다.

해동성국의 자신감

발해는 옛 고구려 장수 출신인 대조영(고왕)이 천문령 전투에서 당나라를 물리친 이후 진(震)이라 칭하며 나라를 세웠고, 이후 762년에 국호를 발해로 고치면서 확립되었다. 이후 무왕 때 대대적인 영토 확장이 이루어져 북쪽으로 흑룡강과 남쪽으로 신라의 국경선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며 스스로 강대국임을 자임하였다. 특히 732년 장군 장문휴로 하여금 당나라 등주를 공격케 할 만큼 국력에 대한 자신감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무왕에 이어 즉위한 문왕은 문치(文治)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당나라의 제도를 기준으로 국가의 통치제도를 정비해 나갔다. 또 신라와의 교통로인 신라도를 개설하면서 수도를 중심으로 한 기반시설 등도 정비해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발해를 황제국의 반열로 격상시키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발전상을 두고 발해의 제 10대 선왕 때에는 당나라마저도 ‘해동성국’이라 칭송하며 인정하였다.

고구려의 후예

발해의 통치제도는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면서도 독자적인 칭호와 관청을 세워 운영하였고, 대외적으로는 고구려를 계승한 후예로 자칭하면서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분명히 내세우고 있다. 특히 발해의 무왕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 발해가 ‘고구려와 부여의 땅을 모두 회복했음’을 선언하기도 하였고, 문왕 역시 일본에 사신을 보내며 국서에 ‘고려의 국왕 대흠무’라고 표현하였다. 발해의 왕이 스스로 고구려의 왕이라고 칭했다는 것은 그만큼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강렬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인 셈이다.

한편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은 문화 유적과 유물 등에서도 확인이 된다. 문왕의 둘째 딸인 정혜공주 묘의 조성 방식은 굴식 돌방무덤으로 전체 구조와 천장을 모줄임 방식으로 조성하였다. 이것은 전형적인 고구려의 고분 조성 방식이라는 점에서 그 계승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심지어 당나라 문화의 영향으로 조성되었다고 알려진 문왕의 넷째 딸 정효공주 묘 역시 당나라 방식과 고구려 방식이 융합된 형태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적극적 문화 수용 정책

이 밖에 발해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불교 유물의 경우 불상의 상당수가 같은 시기 당나라의 양식 보다는 좀 더 이른 시기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또 지붕을 덮었던 막새기와는 전형적인 고구려 양식이었다는 점에서 당나라의 영향 보다는 고구려의 문화적 영향을 기반으로 그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당나라와 문화적으로 활발하게 교류하였고 다수의 유학생들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빈공과에 합격시키기도 하였다. 같은 시기 신라도 당나라에 유학생을 보내 적극적으로 선진 문물을 흡수하려 노력하였는데, 이 때 발해와 신라는 서로 실력을 경쟁하기도 하였다. 특히 문왕 대에는 적극적인 문화정책을 시행하면서 이러한 양상은 더욱 두드러졌다.

그 결과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무덤 지문에서 보듯이 유교 경전과 사서의 내용이 언급된 화려한 변려체 문장이 구사될 수 있을 만큼 발해의 문화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처럼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강한 인식 속에서 중국과의 적극적인 문화교류를 통하여 높은 수준의 문화와 강성한 국력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발해의 역사 귀속 문제

그러나 10세기에 접어들어 5대 10국 시대로 접어들면서 북방의 거란족이 발흥하는 가운데 발해를 침략하였고, 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발해는 926년 멸망에 이르고 말았다. 발해가 멸망한 이후 그 유민은 당나라에 흡수되거나 남하하여 고려에 투항하였다. 남북국 시대의 두 나라를 모두 통합한 고려는, 이로써 진정한 의미의 민족 통일을 이루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발해는 고구려 계통의 지배계층과 말갈 계통의 피지배계층으로 구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통해 발해 역사가 어느 나라 역사로 귀속되어야 하는 문제가 관련 국가들 간 치열한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다만 고구려 자체가 말갈 및 북방의 유목민족들을 포함한 다민족 국가였으며, 발해의 고고학 발굴 자료들이 고구려의 문화를 토대로 토착문화와 당나라의 문화가 융합된 복합적인 문화임을 증명하고 있는 만큼 보다 총체적인 측면에서 고구려와의 계승성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