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명성황후 시해
제목 | 일본, 조선의 황후를 살해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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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 황인희 |
교열자 | 유안리 |
인물/기관/단체 | 고종, 조선, 대한제국, 명성황후, 청나라, 개화당, 친러파, 흥선대원군 |
장소/공간 | 요동반도, 경복궁, 건천궁 장안당, 녹산, 러시아 공사관 |
사건 | 개항, 을미사변, 갑신정변, 동학농민혁명, 청일전쟁, 삼국 간섭 |
기록물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개념용어 | 톈진조약, 친러 내각, ‘여우 사냥’ |
목차
1차 원고
고종은 조선의 제26대 임금이며 1897년 대한제국을 세워 첫 황제가 된 인물이다. 그가 임금의 자리에 있는 동안 조선에서는 수많은 사건이 일어났다. 개항으로 나라의 문호를 개방하였고 자주 독립을 위해 부국강병을 이루려는 적극적인 노력도 이 시기에 이뤄졌다. 그 중 조선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는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가 일본 사람들에게 살해된 사건이었다.
을미사변(1895)이라 불리는 이 사건 뒤에는 복잡다단한 배경이 있다. 당시 조선 사회가 여러 가지로 혼란해지자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입김이 점점 강해졌다. 청나라 세력이 조정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에 대해 반발하고 부국강병을 위해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자각을 가진 개화당이 쿠데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갑신정변의 뒤처리로 일본과 청나라가 톈진조약을 맺었고 그 조약 때문에 동학농민혁명(1894) 때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한반도에 들어올 수 있었다. 두 나라 군대의 충돌로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전쟁에 이긴 일본은 중국의 요동반도라는 전리품을 챙기려 했다. 일본의 팽창을 막기 위해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 삼국이 이에 간섭을 하였고 일본은 요동반도를 도로 내놓게 되었다. 이후 러시아를 중국보다, 일본보다 더 강한 나라라고 여긴 조선은 러시아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삼국간섭의 영향으로 조선에 친러 내각이 들어서자 일본은 위기를 느꼈다.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공들였던 그동안의 노력이 헛일이 되고 그 공을 러시아가 대신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친러파 대신들을 자주 궁궐로 불러들여 열강으로부터 조선을 지킬 방법과 러시아의 협조 방안에 대해 의논했다. 일본은 친러 내각의 중심 인물이 명성황후라고 생각했다. 고종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명성황후만 처치하면 고종을 자신들의 손 안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1895년 을미년 8월 20일 일본은 ‘여우 사냥’이라는 작전을 실천에 옮겼다.
그들은 명성황후 살해의 책임을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에게 덮어씌우려 했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이다. 경복궁을 습격하러 오기 전 그들은 흥선대원군을 억지로 경복궁으로 데리고 갔다. 조선의 왕실에서 시아버지가 왕비인 며느리를 끝내 죽였다고, 천륜을 거역한 사건으로 꾸미려 한 것이다.
일본의 폭도는 잔인무도하게 명성황후를 살해했다. 새벽에 임금과 그 가족이 자고 있는 궁궐에 쳐들어와 왕비를 내놓으라며 이 방 저 방을 마구 뒤지고 다녔다. 그 와중에 세자는 상투를 잡히고 폭도의 칼등에 맞아 실신하기까지 했다. 고종은 미처 손을 써볼 겨를도 없이 눈앞에서 왕비가 살해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폭도는 궁녀의 옷으로 갈아입고 병풍 뒤에 숨은 명성황후를 찾아냈다. 그리곤 건천궁 장안당 뒤뜰로 끌어내어 칼로 찔러 죽이고 홑이불로 시신을 싸서 건청궁 옆 녹산으로 가서 석유를 붓고 불태웠다.
일본은 을미사변이 일본 정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은 단순한 폭도가 아니었고 일본 신문 특파원 등 지식인들이었다. 또 일본 정부의 지원과 사주를 받은 것이 여러 자료를 통해 증명되었다.
명성황후의 장례는 을미사변으로부터 2년 후에야 제대로 치를 수 있었다. 슬픔과 암살의 두려움에 떨던 고종은 일본의 눈을 피해 경복궁을 탈출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고 왕비의 장례조차 제대로 치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을 세우고 황제가 된 고종은 아내의 장례식을 황후의 예우로 성대하게 치러주었다. 그러나 훼손된 시신 대신 단지 손가락 뼈 조각과 입었던 옷가지를 넣어 왕비릉을 조성할 수 있었을 뿐이다.
연구원 1차검토
검토의견 | |
• 을미사변의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충격적인 사건이지만 이 글의 대상이 외국인 집필자나 한국학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글의 내용이 지나치게 감정적이다. 여러 근거와 시각적 자료를 제시해 객관적으로 기술될 필요가 있다. 또한 명성황후가 다양한 작품에서 다뤄지고 있는 만큼 창작 뮤지컬 <명성황후> 또는 이문열의 <여우사냥> 등을 추가 자료로 제시하여 이야기적 요소로 독자의 이해를 돕는 것도 필요하다. | |
• - 명성황후 자체에 대한 소개 및 명성황후의 서양 세력, 서구 문물, 제도 등에 대한 생각 서술 - 1894년 조선을 둘러싼 내외 정세와 일본의 위기감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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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원고
고종은 조선의 제26대 임금이며 1897년 대한제국을 세워 첫 황제가 된 인물이다. 그가 임금의 자리에 있는 동안 조선에서는 수많은 사건이 일어났다. 개항으로 나라의 문호를 개방하였고 자주 독립을 위해 부국강병을 이루려는 적극적인 노력도 이 시기에 이뤄졌다. 그 시기에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가 일본 사람들에게 살해된 사건이이 일어났다.
을미사변(1895)이라 불리는 이 사건 뒤에는 복잡다단한 배경이 있다. 당시 조선 사회가 여러 가지로 혼란해지자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입김이 점점 강해졌다. 청나라 세력이 조정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에 대해 반발하고 부국강병을 위해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자각을 가진 개화당이 쿠데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갑신정변의 뒤처리로 일본과 청나라가 톈진조약을 맺었고 그 조약 때문에 동학농민혁명(1894) 때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한반도에 들어올 수 있었다. 두 나라 군대의 충돌로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전쟁에 이긴 일본은 중국의 랴오둥반도를 전리품으로 챙기려 했다. 일본의 팽창을 막기 위해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 삼국이 이에 간섭을 하였고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도로 내놓게 되었다. 이후 러시아를 중국보다, 일본보다 더 강한 나라라고 여긴 조선은 러시아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삼국간섭의 영향으로 조선에 친러 내각이 들어서자 일본은 위기를 느꼈다.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공들였던 그동안의 노력이 헛일이 되고 그 공을 러시아가 대신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친러파 대신들을 자주 궁궐로 불러들여 열강으로부터 조선을 지킬 방법과 러시아의 협조 방안에 대해 의논했다. 일본은 친러 내각의 중심 인물이 명성황후라고 생각했다. 고종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명성황후만 처치하면 고종을 자신들의 손 안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1895년 을미년 8월 20일 일본은 ‘여우 사냥’이라는 작전을 실천에 옮겼다.
그들은 명성황후 살해의 책임을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에게 떠넘기려 했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이다. 경복궁을 습격하러 오기 전 그들은 흥선대원군을 억지로 경복궁으로 데리고 갔다. 조선의 왕실에서 시아버지가 왕비인 며느리를 죽인 사건으로 꾸미려 한 것이다.
일본의 폭도는 잔인하게 명성황후를 살해했다. 새벽에 임금과 그 가족이 자고 있는 궁궐에 쳐들어와 왕비를 내놓으라며 이 방 저 방을 마구 뒤지고 다녔다. 그 와중에 세자는 상투를 잡히고 폭도의 칼등에 맞아 실신했다. 고종은 미처 손을 써볼 겨를도 없이 눈앞에서 왕비가 살해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폭도는 궁녀의 옷으로 갈아입고 병풍 뒤에 숨은 명성황후를 찾아냈다. 그리곤 건천궁 장안당 뒤뜰로 끌어내어 칼로 찔러 죽이고 홑이불로 시신을 싸서 건청궁 옆 녹산으로 가서 석유를 붓고 불태웠다.
일본은 을미사변이 일본 정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은 단순한 폭도가 아니었고 일본 신문 특파원 등 지식인들이었다. 또 일본 정부의 지원과 사주를 받은 것이 여러 자료를 통해 증명되었다.
명성황후의 장례는 을미사변으로부터 2년 후에야 제대로 치를 수 있었다. 슬픔과 암살의 두려움에 떨던 고종은 일본의 눈을 피해 경복궁을 탈출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고 왕비의 장례조차 제대로 치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을 세우고 황제가 된 고종은 아내의 장례식을 황후의 예우로 성대하게 치러주었다. 그러나 훼손된 시신 대신 손가락 뼈 조각과 입었던 옷가지를 넣어 왕비릉을 조성할 수 있었을 뿐이다.
연구원 2차 검토
검토의견 | |
• 일본은 을미사변이 일본 정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은 단순한 폭도가 아니었고 일본 신문 특파원 등 지식인들이었다. 또 일본 정부의 지원과 사주를 받은 것이 여러 자료를 통해 증명되었다. → 위 부분에 관한 보완 서술이 필요함. 아래의 내용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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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출처: 문화원형백과> 이날 아침 7시경 이 모든 만행의 지휘자인 미우라 일본공사는 당당하게 고종을 알현했다. 고종은 공포에 질려 그에게 사건 수습을 요청했다. 미우라는 이 사건을 해산에 직면한 훈련대의 난동으로 규정하여 고종에게 훈련대 군인들을 처벌할 것과 무단으로 궁궐을 탈출한 명성황후를 서인(庶人)으로 만드는 조치를 취할 것을 강요했다. 참으로 뻔뻔한 행동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각국 외교사절들이 일본공사관을 찾아갔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일본의 관련여부를 추궁했다. 그러자 미우라는 태연히 이를 부인하면서 악의에 찬 조선인의 말보다 일본 외교관의 말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 러시아공사 베베르가 목격자가 조선인이 아니라 서양인임을 밝혔다. 그러자 미우라는 당황하면서 사실을 확인하겠다고 얼버무렸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현장에서 목격한 서양인은 러시아인 건축기사 사바찐과 미국인 군사교관 다이 장군이었다. 이들의 목격에 따르면 이날의 사건은 일본인 낭인무사들이 명성황후를 목표로 치밀하게 준비하여 저지른 만행이었다. 사바찐과 다이의 목격을 근거로 베베르는 조선정부의 외무아문을 방문하여 “살인자와 살인 교사자는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고 선언했으며, 조선주재 외교관들 사이에서 “일본은 야만의 나라”로 각인되었다. 결국 국제여론에 밀린 일본정부는 사건 일주일 후에 미우라를 비롯한 관련자 40여 명을 자국으로 소환해 재판절차를 밟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무죄 방면되었다.
교열본
열강들의 알력 사이에 놓인 조선
고종은 조선의 제26대 임금이며 1897년 대한제국을 세워 첫 황제가 된 인물이다. 그가 임금의 자리에 있는 동안 조선에서는 수많은 사건이 일어났다. 개항으로 나라의 문호를 개방하였고 자주 독립을 위해 부국강병을 이루려는 적극적인 노력도 이 시기에 이뤄졌다.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가 일본 사람들에게 살해된 사건 역시 그 시기에 일어났다.
을미사변(1895)이라 불리는 이 사건에는 복잡다단한 세력 충돌의 배경이 있다. 당시 조선 사회가 여러 가지로 혼란해지자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입김이 점점 강해졌다. 청나라 세력이 조정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에 대해 반발하고 부국강병을 위해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자각을 가진 개화당이 쿠데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갑신정변의 뒤처리로 일본과 청나라가 톈진조약을 맺었고 그 조약 때문에 동학농민혁명(1894) 때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한반도에 들어올 수 있었다. 두 나라 군대의 충돌로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전쟁에 이긴 일본은 중국의 랴오둥반도를 전리품으로 챙기려 했다. 일본의 팽창을 막기 위해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 삼국이 이에 간섭을 하였고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도로 내놓게 되었다. 이후 러시아를 중국이나 일본보다 더 강한 나라라고 여긴 조선은 러시아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삼국간섭의 영향으로 조선에 친러 내각이 들어서자 일본은 위기를 느꼈다.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공들였던 그동안의 노력이 헛일이 되고 그 공을 러시아가 대신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일본이 저지른 만행 을미사변
고종과 명성황후는 친러파 대신들을 자주 궁궐로 불러들여 열강으로부터 조선을 지킬 방법과 러시아의 협조 방안에 대해 의논했다. 일본은 친러 내각의 중심 인물이 명성황후라고 생각했다. 고종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명성황후만 처치하면 고종을 자신들의 손 안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1895년 을미년 8월 20일 일본은 ‘여우 사냥’이라고 이름 붙인 작전을 실천에 옮겼다.
그들은 명성황후 살해의 책임을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에게 떠넘기려 했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복궁을 습격하러 오기 전 그들은 흥선대원군을 억지로 경복궁으로 데리고 갔다. 조선의 왕실에서 시아버지가 왕비인 며느리를 죽인 사건으로 꾸미려 한 것이다.
일본의 폭도는 잔인하게 명성황후를 살해했다. 새벽에 임금과 그 가족이 자고 있는 궁궐에 쳐들어와 왕비를 내놓으라며 이 방 저 방을 마구 뒤지고 다녔다. 그 와중에 세자는 상투를 잡히고 폭도의 칼등에 맞아 실신했다. 고종은 미처 손을 써볼 겨를도 없이 눈앞에서 왕비가 살해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폭도는 궁녀의 옷으로 갈아입고 병풍 뒤에 숨은 명성황후를 찾아냈다. 그리곤 건천궁 장안당 뒤뜰로 끌어내어 칼로 찔러 죽이고 홑이불로 시신을 싸서 건청궁 옆 녹산으로 끌고 가서 석유를 붓고 불태웠다.
증언으로 드러난 참극의 범인, 일본
일본은 을미사변이 일본 정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황후시해를 획책하고 실행한 무리들은 단순한 폭도가 아니었고 일본 외교관과 일본인 신문사 사장, 일본군 고문 등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이 사건을 황후와 갈등 관계에 있는 대원군이 조선인 훈련원과 모의하여 벌인 일로 위장하려 했다. 그러나 고종을 비롯해 러시아인 사바틴, 미국인 다이 등 목격자가 많아 사건의 은폐에 실패했다.
만행을 목격한 외국인들은 외교관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폭로했고, 이에 미국공사대리 앨런과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각각 군병들을 동원하여 시위를 하는 한편, 각국 공사의 회합 후 일본의 관여사실과 폐위 조치 불인정 등을 발표했다. 또 이들은 일본이 뒷받침하고 있는 김홍집 내각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난처해진 일본은 사건관련자를 형식적으로 처벌하기로 결정하고 관련 일본인들을 체포하여 히로시마[廣島]로 압송하는 한편, 미우라 대신 고무라[小村壽太郞]를 주한공사로 임명했다. 일본정부는 미우라를 비롯한 관련자 40여 명을 자국으로 소환해 재판절차를 밟게 하였으나 이들은 모두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방면되었다.
명성황후의 장례는 을미사변으로부터 2년 후에야 제대로 치를 수 있었다. 슬픔과 암살의 두려움에 떨던 고종은 일본의 눈을 피해 경복궁을 탈출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고 왕비의 장례조차 제대로 치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을 세우고 황제가 된 고종은 아내의 장례식을 황후의 예우로 성대하게 치러주었다. 그러나 훼손된 시신 대신 손가락 뼈 조각과 입었던 옷가지를 넣어 왕비릉을 조성할 수 있었을 뿐이다.
출처 및 관련자료
- 관련자료
- 『고종실록(高宗實錄)』
- 『매천야록(梅泉野錄)』
- 진단학회, 『한국사: 현대편』, 진단학회, 을유문화사, 1963.
- 角田房子 저, 김은숙 역, 『민비암살』, 조선일보사.
- 이민원, 「아관파천 전후의 한로관계」 한국학대학원박사학위논문,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