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김홍도, 신윤복
제목 |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 김홍도와 신윤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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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 황인희 |
교열자 | 유안리 |
인물/기관/단체 | 단원, 혜원, 도화서, 화원, 문인화가, 강세황, 영조, 왕세손, 정조, 김응환, 정선, 한량과 기녀 |
장소/공간 | 충청도 연풍, 간송미술관, 삼성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
개념용어 | 조선, 풍속화, 근대 명수, 금세의 신필, 어진, 익선관본, 원유관본, 정형 산수, 진경산수, 단원법, 현감 |
목차
1차 원고
단원 김홍도(金弘道 檀園, 1745∼?)와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 1758∼?)은 조선 후기의 화가이다. 두 사람 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를 개척한 대표적 화가로서 후대의 화단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두 사람은 도화서(圖畫署)의 화원(畫員)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도화서는 왕실이나 양반들의 요청으로 그림을 그리도록 국가가 만든 관청이다. 이곳에 소속된 화가를 화원이라고 했는데 도화서는 화원을 양성하는 기관이기도 했다.
김홍도는 당대의 이름난 문인화가 강세황(姜世晃)의 제자였다.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운 것은 물론 그의 추천으로 도화서에 들어가게 되었다. 강세황은 김홍도에 대해 ‘근대 명수(近代名手)’ 또는 ‘우리나라 금세(今世)의 신필(神筆)’이라고 칭찬했다. 김홍도는 29세인 1773년에는 영조의 어진(御眞)과 왕세손(훗날의 정조)의 초상을 그렸다. 정조가 임금이 된 후 김홍도는 정조의 어진을 그리는 데 몇 차례 참여하였다. 1781년에는 익선관본(翼善冠本)을, 1791년에는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렸다. 정조는 특히 김홍도를 총애하여 “그림 그리는 일과 관련된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장하게 했다”라고 할 정도였다.
1788년에는 김응환(金應煥)과 함께 금강산 등 영동 지방을 돌아다니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려 임금에게 바쳤다. 김응환이 김홍도에게 그려준 시화첩 <금강전도>에 쓰인 글에 의하면 김홍도는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도량이 넓고 성격이 활달해서 마치 신선과 같았다고 한다.
그의 화풍은 50세를 중심으로 전후 2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산수화의 경우 50세 이전에는 주로 화첩을 보고 중국 정형 산수를 많이 그렸다. 또 인물로는 신선도를 그렸다. 굵고 힘차면서도 거친 느낌을 주는 옷자락 무늬, 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 그리고 티 없이 천진한 얼굴을 한 작품 ‘군선도병(群仙圖屛, 삼성미술관 소장, 국보 제139호)’은 이 시기의 작품이다.
50세 이후로는 한국적 정서가 어려 있는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즐겨 그렸다. 진경산수는 실제 경치는 소재로 그린 산수화를 말한다. 그러면서 ‘단원법’이라는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 화풍을 이룩하였다. 탁월한 공간 구성, 능숙하고도 강한 묵선(墨線)의 강조와 부드럽고도 조용한 담채(淡彩 : 엷은 채색)의 밝고 투명한 화면 효과는 한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김홍도 특유의 화풍이다.
만년에는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 주변의 풍경을 주로 그렸다.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의 모습, 풍속 등을 많이 그렸다. 간략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원형 구도 위에 표현된 그의 풍속화들은 정선(鄭敾)의 진경산수화와 함께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이 되었다.
김홍도는 1791년 원유관본을 그린 공으로 충청도 연풍 현감에 임명되어 5년 동안 현감을 지냈다. 현감에서 물러난 후에는 병고와 가난이 겹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여생을 마쳤다. 대표작으로는 <단원풍속화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527호)>을 비롯해서 <금강사군첩(金剛四君帖, 개인 소장)> ‘무이귀도도(武夷歸棹圖, 간송미술관 소장)’ ‘선인기려도(仙人騎驢圖)’ ‘단원도(檀園圖, 개인 소장)’ ‘단원화첩(삼성미술관 소장)’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 등이 있다.
신윤복도 산수화와 풍속화를 주로 그렸다. 김홍도의 영향으로 참신한 색채 감각이 돋보이는 산수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신윤복은 한량과 기녀 등 남녀 간의 낭만이나 애정을 다룬 풍속화를 그린 작가로 특히 유명하다. 남녀 간의 정취와 낭만적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섬세한 선과 화려한 채색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의 풍속화에 나타난 배경이나 인물 등은 사실적으로 그려진 덕분에 조선 후기의 생활상과 살림살이, 복식 등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신윤복의 경우 작품에 언제 그린 그림인지를 밝히지 않아 그의 화풍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대표작으로는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미인도’와 <풍속화첩>이 있다. <풍속화첩>에는 ‘단오도(端午圖)’ ‘연당(蓮塘)의 여인’ ‘무무도(巫舞圖)’ ‘산궁수진(山窮水盡)’ ‘선유도(船遊圖)’ 등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출처 및 관련자료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관련자료
- 『한국(韓國)의 미(美)』 21-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정양모 감수, 중앙일보사, 1985)
- 『한국회화사(韓國繪畫史)』(안휘준, 일지사, 1980)
- 『우리나라의 옛 그림』(이동주, 박영사, 1975)
- 『한국회화대관(韓國繪畫大觀)』(유복렬 편, 문교원, 1969)
-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오세창, 계명구락부, 1928)
-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생애와 예술」(홍선표, 『학원』296, 1984.7.)
-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재세연대고(在世年代攷)」(최순우, 『미술자료』11, 국립중앙박물관, 1966)
- 『한국회화(韓國繪畵)의 전통(傳統)』(안휘준, 문예출판사, 1988)
- 『한국(韓國)의 미(美) 19 -풍속화(風俗畵)-』(안휘준 감수, 중앙일보사, 1985)
- 『한국회화사(韓國繪畵史)』(안휘준, 일지사, 1980)
- 『우리나라의 옛그림』(이동주, 박영사, 1975)
- 『한국회화대관(韓國繪畵大觀)』(유복렬 편, 문교원, 1969)
-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오세창, 계명구락부, 1928)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 |
• - 단원 김홍도(金弘道↔檀園, 1745∼?)와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 1758∼?) - 1788년에는 김응환과 함께~ : 김응환에 대해 설명할 것. 김홍도와 함께 도화서 화원이었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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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원고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와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 1758∼?)은 조선 후기의 화가이다. 두 사람 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를 개척한 대표적 화가로서 후대의 화단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두 사람은 도화서(圖畫署)의 화원(畫員)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도화서는 왕실이나 양반들의 요청으로 그림을 그리도록 국가가 만든 관청이다. 이곳에 소속된 화가를 화원이라고 했는데 도화서는 화원을 양성하는 기관이기도 했다.
김홍도는 당대의 이름난 문인화가 강세황(姜世晃)의 제자였다.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운 것은 물론 그의 추천으로 도화서에 들어가게 되었다. 강세황은 김홍도에 대해 ‘근대 명수(近代名手)’ 또는 ‘우리나라 금세(今世)의 신필(神筆)’이라고 칭찬했다. 김홍도는 29세인 1773년에는 영조의 어진(御眞)과 왕세손(훗날의 정조)의 초상을 그렸다. 정조가 임금이 된 후 김홍도는 정조의 어진을 그리는 데 몇 차례 참여하였다. 1781년에는 익선관본(翼善冠本)을, 1791년에는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렸다. 정조는 특히 김홍도를 총애하여 “그림 그리는 일과 관련된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장하게 했다”라고 할 정도였다.
1788년에는 김홍도와 함께 도화서 화원이었던 김응환(金應煥)과 더불어 금강산 등 영동 지방을 돌아다니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려 임금에게 바쳤다. 김응환이 김홍도에게 그려준 시화첩 <금강전도>에 쓰인 글에 의하면 김홍도는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도량이 넓고 성격이 활달해서 마치 신선과 같았다고 한다.
그의 화풍은 50세를 중심으로 전후 2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산수화의 경우 50세 이전에는 주로 화첩을 보고 중국 정형 산수를 많이 그렸다. 또 인물로는 신선도를 그렸다. 굵고 힘차면서도 거친 느낌을 주는 옷자락 무늬, 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 그리고 티 없이 천진한 얼굴을 한 작품 ‘군선도병(群仙圖屛, 삼성미술관 소장, 국보 제139호)’은 이 시기의 작품이다.
50세 이후로는 한국적 정서가 어려 있는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즐겨 그렸다. 진경산수는 실제 경치는 소재로 그린 산수화를 말한다. 그러면서 ‘단원법’이라는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 화풍을 이룩하였다. 탁월한 공간 구성, 능숙하고도 강한 묵선(墨線)의 강조와 부드럽고도 조용한 담채(淡彩 : 엷은 채색)의 밝고 투명한 화면 효과는 한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김홍도 특유의 화풍이다.
만년에는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 주변의 풍경을 주로 그렸다. 씨름, 서당, 대장간, 벼 타작, 기와 잇기, 길쌈 등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의 모습, 풍속 등도 많이 그렸다. 간략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원형 구도 위에 표현된 그의 풍속화들은 정선(鄭敾)의 진경산수화와 함께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이 되었다.
김홍도의 대표작으로는 <단원풍속화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527호)>을 비롯해서 <금강사군첩(金剛四君帖, 개인 소장)> ‘무이귀도도(武夷歸棹圖, 간송미술관 소장)’ ‘선인기려도(仙人騎驢圖)’ ‘단원도(檀園圖, 개인 소장)’ ‘단원화첩(삼성미술관 소장)’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 등이 있다.
신윤복도 산수화와 풍속화를 주로 그렸다. 김홍도의 영향으로 참신한 색채 감각이 돋보이는 산수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신윤복은 한량과 기녀 등 남녀 간의 낭만이나 애정을 다룬 풍속화를 그린 작가로 특히 유명하다. 남녀 간의 정취와 낭만적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섬세한 선과 화려한 채색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의 풍속화에 나타난 배경이나 인물 등은 사실적으로 그려진 덕분에 조선 후기의 생활상과 살림살이, 복식 등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신윤복은 과부, 기녀, 비구니, 의녀와 같은 소외 계층 여인들을 주제로 삼은 그림도 많이 그렸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을 갸름한 얼굴과 가는 눈썹, 요염하게 치켜 올라간 눈, 앵두 같은 입술, 희고 통통한 손과 피부 등을 가진, 아름답고 관능미 넘치는 여인들로 표현했다. 신윤복의 〈미인도〉는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꼽힌다.
신윤복의 경우 작품에 언제 그린 그림인지를 밝히지 않아 그의 화풍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대표작으로는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미인도’와 <풍속화첩>이 있다. <풍속화첩>에는 ‘단오도(端午圖)’ ‘연당(蓮塘)의 여인’ ‘무무도(巫舞圖)’ ‘산궁수진(山窮水盡)’ ‘선유도(船遊圖)’ 등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교열본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와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 1758∼?)은 조선 후기의 화가이다. 두 사람 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를 개척한 대표적 화가로서 후대의 화단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두 사람은 도화서(圖畫署)의 화원(畫員)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도화서는 왕실이나 양반들의 요청으로 그림을 그리도록 국가가 만든 관청이다. 이곳에 소속된 화가를 화원이라고 했는데 도화서는 화원을 양성하는 기관이기도 했다.
정조의 총애를 받은 김홍도
김홍도는 당대의 이름난 문인화가 강세황(姜世晃)의 제자였다.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운 것은 물론 그의 추천으로 도화서에 들어가게 되었다. 강세황은 김홍도에 대해 ‘근대 명수(近代名手)’ 또는 ‘우리나라 금세(今世)의 신필(神筆)’이라고 칭찬했다. 김홍도는 29세인 1773년에는 영조의 어진(御眞)과 왕세손(훗날의 정조)의 초상을 그렸다. 정조가 임금이 된 후 김홍도는 정조의 어진을 그리는 데 몇 차례 참여하였다. 1781년에는 익선관본(翼善冠本)을, 1791년에는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렸다. 정조는 특히 김홍도를 총애하여 “그림 그리는 일과 관련된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장하게 했다”라고 할 정도였다.
1788년에는 김홍도와 함께 도화서 화원이었던 김응환(金應煥)과 더불어 금강산 등 영동 지방을 돌아다니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려 임금에게 바쳤다. 김응환이 김홍도에게 그려준 시화첩 <금강전도>에 쓰인 글에 의하면 김홍도는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도량이 넓고 성격이 활달해서 마치 신선과 같았다고 한다.
한국의 진경을 그리다
그의 화풍은 50세를 전후로 1기와 2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산수화의 경우 50세 이전에는 주로 화첩을 보고 중국의 정형화된 산수를 많이 그렸다. 또 인물로는 신선도를 그렸다. 굵고 힘차면서도 거친 느낌을 주는 옷자락 무늬, 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 그리고 티 없이 천진한 얼굴을 한 작품 ‘군선도병(群仙圖屛, 삼성미술관 소장, 국보 제139호)’은 이 시기의 작품이다.
50세 이후로는 한국적 정서가 어려 있는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즐겨 그렸다. 진경산수는 실제 경치를 소재로 그린 산수화를 말한다. 그러면서 ‘단원법’이라는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 화풍을 이룩하였다. 탁월한 공간 구성, 능숙하고도 강한 묵선(墨線)의 강조와 부드럽고도 조용한 담채(淡彩 : 엷은 채색)의 밝고 투명한 화면 효과는 한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김홍도 특유의 화풍이다.
만년에는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 주변의 풍경을 주로 그렸다. 씨름, 서당, 대장간, 벼 타작, 기와 잇기, 길쌈 등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의 모습, 풍속 등도 많이 그렸다. 간략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원형 구도 위에 표현된 그의 풍속화들은 정선(鄭敾)의 진경산수화와 함께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이 되었다.
김홍도의 대표작으로는 <단원풍속화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527호)>을 비롯해서 <금강사군첩(金剛四君帖, 개인 소장)> ‘무이귀도도(武夷歸棹圖, 간송미술관 소장)’ ‘선인기려도(仙人騎驢圖)’ ‘단원도(檀園圖, 개인 소장)’ ‘단원화첩(삼성미술관 소장)’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 등이 있다.
화려한 색채로 그린 남녀 풍속화
신윤복은 서자 출신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족보에도 올리지 않은 중인 신분이었는데 특히 종조부와 아버지 신한평 같은 화원이 많이 나왔다.신한평은 영조의 어진을 두 번이나 그릴 정도로 인정 받는 화가였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신윤복도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다. 김홍도의 영향으로 참신한 색채 감각이 돋보이는 산수화를 그리기도 하였지만 그는 그림에서 양반의 위선과 이중적인 태도를 풍자한 해학을 표현하기도 했다. 신윤복은 한량과 기녀 등 남녀 간의 낭만이나 애정을 다룬 풍속화를 그린 작가로 특히 유명하다. 남녀 간의 정취와 낭만적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섬세한 선과 화려한 채색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의 풍속화에 나타난 배경이나 인물 등은 사실적으로 그려진 덕분에 조선 후기의 생활상과 살림살이, 복식 등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혜원은 과부, 기녀, 비구니, 의녀와 같은 소외 계층 여인들을 주제로 삼은 그림도 많이 그렸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을 갸름한 얼굴과 가는 눈썹, 요염하게 치켜 올라간 눈, 앵두 같은 입술, 희고 통통한 손과 피부 등을 가진, 아름답고 관능미 넘치는 여인들로 표현했다. 신윤복의 〈미인도〉는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꼽힌다.
신윤복의 경우 작품에 언제 그린 그림인지를 밝히지 않아 그의 화풍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대표작으로는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미인도’와 <풍속화첩>이 있다. <풍속화첩>에는 ‘단오풍정(端午風情)‘, ‘연당(蓮塘)의 여인’ ‘무무도(巫舞圖)’ ‘산궁수진(山窮水盡)’ ‘선유도(船遊圖)’ 등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