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김부식

Korea100
이동: 둘러보기, 검색
제목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
집필자 황인희
교열자 유안리
인물/기관/단체 태종무열왕, 위영, 고려 태조, 인종, 이자겸, 여진족, 묘청, 조광, 윤첨, 신채호, 화랑도, 인종, 낭가, 불가, 독립당, 사대당, 유가
장소/공간 경주, 개경, 서경, 송나라
사건 묘청의 난, 이자겸의 난, 서경 천도
개념용어 고려, 문신, <삼국사기>, 신라, 풍수지리설, 칭제건원, 북벌, 천도, 사대주의, 고구려, 기전체, 본기, 지(志), 표, 열전, <고기>, <삼한고기>, <신라고사>, <구삼국사>, <삼국지>, <후한서>, <신당서>, <구당서>, <자치통감>, 진삼국사기표, <옥해>, 초간본, 성암본



1차 원고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은 고려 시대의 문신이며 학자였다. 그와 관련된 가장 큰 두 가지 사건은 묘청의 난의 진압과 <삼국사기>의 편찬이다.

김부식은 삼국 통일을 이끈 신라 태종무열왕의 후손으로, 신라가 망할 무렵 그의 증조부인 위영(魏英)이 고려 태조(太祖)에게 귀의해 경주 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관리가 되었다.

1126년 고려의 임금 인종의 외조부인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일어난 후 국내외 정세는 극도로 불안해졌다. 궁전이 불타고 정치 기강이 해이해졌고 여진족의 외교적인 압력에도 시달리게 되었다. 이때 승려 묘청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개경의 왕기가 약해져서 고려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며 나라를 중흥시키려면 왕기(王氣)가 충만한 곳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묘청이 추천한 곳은 서경이었다. 또 묘청은 ‘칭제건원(稱帝建元)’과 북벌(北伐)도 주장하였다. 중국 여러 나라의 침략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고려 스스로 황제국이 되어 진취적이고 자주적인 국가 경영과 외교 관계를 펴나갈 것을 제안한 것이다.

인종은 묘청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천도를 위해 서경에 궁궐을 짓게 하였다. 그러나 개경의 기득권층은 서경 천도에 반대하였다. 김부식은 천도 반대 세력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반대 세력을 설득하지 못한 인종은 서경 천도를 포기하였다.

서경 천도 계획이 실패하자 묘청 일파는 1135년 서경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고려 정부는 김부식에게 진압의 책임을 맡겼다. 김부식은 군사를 이끌고 서경 가까이 다가가 묘청에게 항복을 권유하였다. 반란군의 중심 인물인 조광은 형세가 불리해지자, 묘청 등의 목을 베어 개경으로 보냈다. 그러나 고려 정부는 목을 가져간 윤첨(尹瞻)을 옥에 가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광 등은 항복해도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끝까지 결사 항전을 하였다. 반란군의 항전은 1년 넘게 계속되었다. 그동안 식량이 부족해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하면서 반란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1136년 진압군은 서경을 함락하였고 반란군의 우두머리들이 자결함으로써 묘청의 난이 끝났다.

역사학자 신채호(申采浩)는 묘청의 난을, 신라 화랑도에서 이어진 낭가(郎家)와 불가(佛家)에 한학파가 대항한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 난이 실패함으로써 유가(儒家)의 사대주의가 득세해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애석해 했다. 그런 결과의 중심에 김부식이 있었던 것이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김부식은 임금의 명령으로 <삼국사기> 집필했고 1145년에 50권의 <삼국사기>를 편찬하여 인종에게 바쳤다. 현재 전하는 역사책 중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삼국사기>는 기전체로 집필되었고 본기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통일신라 12권), 지(志) 9권, 표 3권, 열전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삼국사기>는 편찬자들이 독단적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고기(古記)>, <삼한고기(三韓古記)>, <신라고사(新羅古史)>, <구삼국사(舊三國史)> 등 국내 문헌과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 <신당서(新唐書)>, <구당서(舊唐書)>,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의 중국 문헌을 참고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책임 편찬자인 김부식은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와 각 부분의 머리말, 사료의 취사 선택, 인물의 평가 등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부식은 우리나라의 식자층조차도 우리 역사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개탄하면서 진삼국사기표에 <삼국사기>의 편찬 동기와 목적, 방향을 언급하였다. 그 첫째는, 중국 문헌들은 우리나라 역사를 지나치게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으니 우리 것을 자세히 써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고기> 내용이 빈약하기 때문에 다시 서술해야 한다는 것이며, 셋째는 왕과 신하, 백성들의 잘잘못을 가려 행동 규범을 드러냄으로써 후세에 교훈을 삼고자 한다는 것이다.

1174년 고려 사신이 <삼국사기>를 송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옥해(玉海)>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초간본은 12세기 중엽(1149∼1174)에 간행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판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 판본은 ‘성암본(誠庵本)’이라 불리는데 이는 13세기 후반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및 관련자료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관련자료

  • 「김부식(金富軾)」(정구복, 『한국사시민강좌』9, 일주각, 1991)
  • 『삼국사기연구』(신형식, 일조각, 1981)
  • 『삼국사기조사보고서』(천혜봉·황천오, 문화재관리국, 1981)
  • 『삼국사기의 원전검토(原典檢討)』(정구복 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 『삼국사기전거론(三國史記典據論)』(이강래, 민족사, 1996)
  • 『역주삼국사기 1.2.3.4.5』(정구복 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1998)
  •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朝鮮歷史上一千年來第一大事件)』(신채호, 조선사연구초, 1930)
  • 「삼국사기에 있어서의 역사서술」(고병익, 『김재원박사회갑기념논총』, 1969)
  • 「삼국사기론」(이기백, 『문학과 지성』7·4, 1976)
  • 「삼국사기 열전의 분석」(신형식, 『한국사논총』 3, 1978)
  • 「삼국사기 지(志)의 분석」(신형식, 『단대학술논총』 3, 1979)
  • 「새로 발견된 고판본(古板本) 삼국사기에 대하여」(천혜봉, 『대동문화연구』 15, 성균관대학교대동문화연구원, 1982)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 개경, 서경 등 당시의 지명 옆에 괄호를 사용하여 현재의 지명을 표기할 것

- 역사학자 신채호에 대해 간단히 설명할 것 : 적어도 어느 시대의 인물인지...
- 역사학자 신채호의 묘청에 대한 평가에 서술된 개념이 어려워, 낭가, 불가, 한학파, 독립당, 사대당 등에 대해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 생각된다. 이 부분을 풀어쓰거나 아니면 이 난이 실패함으로써~ 이 부분만 쉽게 설명하여 서술하는 것이 나을 듯

- <삼국사기>의 기전체, 열전 등등이 무엇인지 설명할 것


수정 원고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은 고려 시대의 문신이며 학자였다. 그와 관련된 가장 큰 두 가지 사건은 묘청의 난의 진압과 <삼국사기>의 편찬이다.

김부식은 삼국 통일을 이끈 신라 태종무열왕의 후손으로, 신라가 망할 무렵 그의 증조부인 위영(魏英)이 고려 태조(太祖)에게 귀의해 경주 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관리가 되었다.

1126년 고려의 임금 인종의 외조부인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일어난 후 국내외 정세는 극도로 불안해졌다. 궁전이 불타고 정치 기강이 해이해졌고 여진족의 외교적인 압력에도 시달리게 되었다. 이때 승려 묘청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개경(지금의 개성)의 왕기가 약해져서 고려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며 나라를 중흥시키려면 왕기(王氣)가 충만한 곳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묘청이 추천한 곳은 서경(지금의 평양)이었다. 또 묘청은 ‘칭제건원(稱帝建元)’과 북벌(北伐)도 주장하였다. 중국 여러 나라의 침략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고려 스스로 황제국이 되어 진취적이고 자주적인 국가 경영과 외교 관계를 펴나갈 것을 제안한 것이다.

인종은 묘청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천도를 위해 서경에 궁궐을 짓게 하였다. 그러나 개경의 기득권층은 서경 천도에 반대하였다. 김부식은 천도 반대 세력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반대 세력을 설득하지 못한 인종은 서경 천도를 포기하였다.

서경 천도 계획이 실패하자 묘청 일파는 1135년 서경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고려 정부는 김부식에게 진압의 책임을 맡겼다. 김부식은 군사를 이끌고 서경 가까이 다가가 묘청에게 항복을 권유하였다. 반란군의 중심 인물인 조광은 형세가 불리해지자, 묘청 등의 목을 베어 개경으로 보냈다. 그러나 고려 정부는 목을 가져간 윤첨(尹瞻)을 옥에 가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광 등은 항복해도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끝까지 결사 항전을 하였다. 반란군의 항전은 1년 넘게 계속되었다. 그동안 식량이 부족해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하면서 반란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1136년 진압군은 서경을 함락하였고 반란군의 우두머리들이 자결함으로써 묘청의 난이 끝났다. 역사학자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묘청의 난이 실패함으로써 유가(儒家)의 사대주의가 득세해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애석해 했다. 그런 결과의 중심에 김부식이 있었던 것이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김부식은 임금의 명령으로 <삼국사기> 집필했고 1145년에 50권의 <삼국사기>를 편찬하여 인종에게 바쳤다. 현재 전하는 역사책 중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삼국사기>는 기전체로 집필되었고 본기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통일신라 12권), 지(志) 9권, 표 3권, 열전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삼국사기>는 편찬자들이 독단적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고기(古記)>, <삼한고기(三韓古記)>, <신라고사(新羅古史)>, <구삼국사(舊三國史)> 등 국내 문헌과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 <신당서(新唐書)>, <구당서(舊唐書)>,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의 중국 문헌을 참고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책임 편찬자인 김부식은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와 각 부분의 머리말, 사료의 취사 선택, 인물의 평가 등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부식은 우리나라의 배운 사람들조차도 우리 역사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개탄하면서 진삼국사기표에 <삼국사기>의 편찬 동기와 목적, 방향을 언급하였다. 그 첫째는, 중국 문헌들은 우리나라 역사를 지나치게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으니 우리 것을 자세히 써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고기> 내용이 빈약하기 때문에 다시 서술해야 한다는 것이며, 셋째는 왕과 신하, 백성들의 잘잘못을 가려 행동 규범을 드러냄으로써 후세에 교훈을 삼고자 한다는 것이다.

1174년 고려 사신이 <삼국사기>를 송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옥해(玉海)>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초간본은 12세기 중엽(1149∼1174)에 간행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판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 판본은 ‘성암본(誠庵本)’이라 불리는데 이는 13세기 후반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구원 2차 검토

검토의견
글의 구성과 전개는 괜찮으나, 다양한 독자층을 고려하여 인용문 등을 좀 더 쉽게 윤문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으로 여겨짐



교열본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은 고려 시대의 문신이며 학자였다. 그와 관련된 가장 큰 두 가지 사건은 묘청의 난의 진압과 <삼국사기>의 편찬이다.

그는 삼국 통일을 이끈 신라 태종무열왕의 후손으로, 신라가 망할 무렵 그의 증조부인 위영(魏英)이 고려 태조(太祖)에게 귀의해 경주 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관리가 되었다.

묘청의 난 평정

1126년 고려의 임금 인종의 외조부인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일어난 후 국내외 정세는 극도로 불안해졌다. 궁전이 불타고 정치 기강이 해이해졌고 여진족의 외교적인 압력에도 시달리게 되었다. 이때 승려 묘청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개경(지금의 개성)의 왕기가 약해져서 고려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며 나라를 중흥시키려면 왕기(王氣)가 충만한 곳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묘청이 추천한 곳은 서경(지금의 평양)이었다. 또 묘청은 ‘칭제건원(稱帝建元)’과 북벌(北伐)도 주장하였다. 중국 여러 나라의 침략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고려 스스로 황제국이 되어 진취적이고 자주적인 국가 경영과 외교 관계를 펴나갈 것을 제안한 것이다.

인종은 묘청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천도를 위해 서경에 궁궐을 짓게 하였다. 그러나 개경의 기득권층은 서경 천도에 반대하였다. 김부식은 천도 반대 세력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반대 세력을 설득하지 못한 인종은 서경 천도를 포기하였다.

서경 천도 계획이 실패하자 묘청 일파는 1135년 서경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고려 정부는 김부식에게 진압의 책임을 맡겼다. 김부식은 군사를 이끌고 서경 가까이 다가가 묘청에게 항복을 권유하였다. 반란군의 중심 인물인 조광은 형세가 불리해지자, 묘청 등의 목을 베어 개경으로 보냈다. 그러나 고려 정부는 목을 가져간 윤첨(尹瞻)을 옥에 가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광 등은 항복해도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끝까지 결사 항전하였다. 반란군의 항전이 1년 넘게 계속되자 식량이 부족해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하면서 반란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1136년 진압군은 서경을 함락하였고 반란군의 우두머리들이 자결함으로써 묘청의 난이 끝났다. 역사학자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묘청의 난을 개경파와 서경파, 불가와 유가, 자주파와 사대파의 대결로 보았다. 그는 묘청이 실패함으로써 유가(儒家)의 사대주의가 득세해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애석해했다. 그런 결과의 중심에 김부식이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 삼국사기

관직에서 물러난 후 김부식은 임금의 명령으로 <삼국사기>를 집필하기 시작하여 1145년에 <삼국사기> 50권을 인종에게 바쳤다. 현재 전하는 역사책 중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삼국사기>는 역사적 인물의 전기를 중심으로 한 기전체로 집필되었다. 전체는 본기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통일신라 12권), 지(志) 9권, 표 3권, 열전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삼국사기>는 편찬자들이 독단적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고기(古記)>, <삼한고기(三韓古記)>, <신라고사(新羅古史)>, <구삼국사(舊三國史)> 등 국내 문헌과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 <신당서(新唐書)>, <구당서(舊唐書)>,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의 중국 문헌을 참고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책임 편찬자인 김부식은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와 각 부분의 머리말, 사료의 취사 선택, 인물의 평가 등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부식은 우리나라의 배운 사람들조차도 우리 역사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개탄하면서 진삼국사기표에 <삼국사기>의 편찬 동기와 목적, 방향을 언급하였다. 그 첫째는, 중국 문헌들이 우리나라 역사를 지나치게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으니 우리 것을 자세히 써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고기> 내용이 빈약하기 때문에 다시 서술해야 한다는 것이며, 셋째는 왕과 신하, 백성들의 잘잘못을 가려 행동 규범을 드러냄으로써 후세에 교훈을 삼고자 한다는 것이다.

1174년 고려 사신이 <삼국사기>를 송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송나라 왕응린의 책 <옥해(玉海)>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초간본은 12세기 중엽(1149∼1174)에 간행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판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 판본은 ‘성암본(誠庵本)’이라 불리는데 이는 13세기 후반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