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광개토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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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광개토대왕
집필자 황인희
교열자 유안리
인물/기관/단체 고구려, 백제, 고국양왕, 아신왕, 왜(倭), 신라, 가야, 거란, 비려, 숙신, 선비족, 모용씨, 후연국, 모용성, 북연, 동부여, 장수왕
장소/공간 석현성, 관미성, 수곡성, 패수, 소자하, 남소성, 신성, 요하, 개원, 영안, 혼춘, 지린성 지안현
개념용어 영락, 연호, 왜구, 조공 관계, 장사, 사마, 참군, 광개토왕릉비, <삼국사기>, 일본이 왜곡



1차 원고

광개토대왕(374∼413)은 391년부터 413년까지 재위한 고구려의 왕이다. ‘광개토(廣開土)’는 영토를 넓게 개척했다는 뜻의 이름이다. 본명은 담덕(談德)인데 호태왕(好太王), 영락(永樂)대왕이라고도 불렸다. ‘영락’은 광개토대왕의 연호로, 고구려가 중국과 대등한 나라임을 나타내는 의미를 지닌다. 어려서부터 체격이 크고 큰 뜻을 품고 있었던 그는 아버지 고국양왕이 세상을 떠난 후 왕위에 올랐다.

광개토대왕은 이름 그대로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크게 확장시켰다. 먼저 남쪽으로는, 즉위 초부터 백제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392년에는 석현성(石峴城 : 개풍군 북면 청석동)을 비롯한 10개성과 관미성(關彌城 : 예성강 하류 혹은 강화 교동도)을 함락시켰다. 또 394년에는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 침공해 온 백제군을 수곡성(水谷城 : 지금의 신계)에서, 395년에는 패수(浿水 : 지금의 예성강)에서 각각 격퇴하고 396년에는 한강 너머에까지 진격하여 58성 700촌락을 차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백제의 아신왕으로부터 영원히 노객(奴客 : 신하가 임금을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가리키던 말)이 되겠다는 맹세를 받고 왕의 동생과 대신들을 인질로 잡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백제는 완전히 굴복하지 않고 왜(倭)와 힘을 합해 고구려는 물론 고구려와 연결되어 있던 신라까지 공격했다. 이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군대를 보내 왜구를 신라에서 몰아내고 가야 지역까지 추격했다. 407년에는 백제를 공격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고 6성을 쳐부수어 백제를 응징했다. 신라와는 친선 관계를 맺었는데 400년에 왜구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원해줌으로써 신라에 대한 영향력이 더욱 커졌다.

광개토대왕은 남쪽뿐만 아니라 북서쪽으로도 영토를 넓혀나갔다. 392년에는 북쪽에 있던 거란(契丹)을 정벌하여 거란에게 잡혀갔던 고구려 사람 1만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395년에는 거란의 일부인 비려(碑麗)를 친히 정벌하여 많은 가축을 노획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고 398년에는 숙신(肅愼)을 정벌하여 조공 관계를 맺었다.

당시 고구려의 서쪽에는 선비족 모용씨(慕容氏)가 세운 후연국(後燕國)이 있었는데 후연과는 한동안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400년에 후연왕 모용성(慕容盛)이 소자하(蘇子河) 유역에 위치한 고구려의 남소성(南蘇城)과 신성(新城)에 쳐들어오자 광개토대왕은 후연에 대한 보복전을 펼쳤다. 이 전쟁을 시작으로 몇 차례의 전투를 통해 광개토대왕은 408년 결국 후연을 멸망에 이르게 하였다. 그 뒤 후연 지역에 등장한 북연(北燕)과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410년에는 동해 주변에 있던 동부여(東夫餘)를 정벌하여 굴복시키는 등 활발한 정복 사업을 펼친 결과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팽창시킬 수 있었다. 광개토대왕의 재위 시기에 고구려는 서쪽으로는 요하, 북쪽으로는 개원(開原)에서 영안(寧安), 동쪽으로는 혼춘(琿春), 남쪽으로는 임진강 유역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광개토대왕이 정복 사업에 성공한 가장 큰 비결은 그가 뛰어난 전략 ‧ 전술가였다는 점이다. 또 그는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들과 우호를 맺고 힘이 약한 나라는 위협하거나 회유하여 동맹을 맺거나 복속시켰다. 이렇게 외교력으로 고구려를 도와줄 세력을 만들어놓은 후 원하는 지역을 정벌했다. 그래서 안정적인 전투를 치르고 승리의 확률을 높일 수 있었다. 또 바닷길이나 강을 통해 이동하고 싸우는 수군을 만들어 기병과 보병을 중심이던 당시 전투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광개토대왕은 국력을 외부로 팽창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중앙과 지방 통치, 군사, 종교 등 여러 분야에서 획기적인 개혁을 했다. 장사(長史) · 사마(司馬) · 참군(參軍) 등의 중앙 관직을 신설하고 393년에는 평양에 9사(寺)를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였다. 나라 안의 안정을 도모하여 백성들의 삶도 크게 개선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은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했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라고 ‘광개토왕릉비’에 기록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은 413년 40세에 세상을 떠났다. 414년 능(陵)을 조성하고 생전의 업적을 기록한 능비(陵碑)를 세웠다. 화강암으로 된 능비의 높이는 6.39미터, 밑면 넓이는 1.43미터이고, 44행, 1775자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광개토왕릉비는 지금도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남아 있는데 일제강점기에 마모된 그 비문을 일본이 왜곡하여 논란이 되어왔다.

출처 및 관련자료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인터넷 이이화의 인물한국사(인터넷 주소 추가)

관련자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광개토왕릉비문(廣開土王陵碑文)」
  • 『광개토왕비연구 100년』(고구려연구회, 학연문화사, 1996)
  • 『광개토대왕릉비신연구』(이형구·박노희, 동화출판공사, 1986)
  • 「광개토왕의 정복활동」(천관우, 『한국사 시민강좌』3, 1988)
  • 「광개토호태왕기의 내정정비에 대하여」(박성봉, 『천관우선생환력기념한국사학논총』, 1985)
  • 「광개토왕릉비문에 나타난 한일관계」(김술학, 『일본학』1, 1981)
  • 「광개토왕릉비문국론」(천관우, 『전해종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1979)
  • 「광개토왕의 웅략」(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광개토대왕이 활동했던 시기의 한반도 지도 및 유적을 추가할 필요가 있다. 즉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광개토대왕 시기의 한반도 모습을 지도를 통하여 보여줄 수 있도록 하여 독자의 이해를 도울 필요가 있다.
- 원고의 가장 마지막 문장인 ‘일제강점기에 마모된 그 비문을 일본이 왜곡하여 논란이 되어왔다’는 내용은 없애는 것이 나을 듯. 만약 이 문장을 넣고 싶으면 마모된 비문을 일본이 왜곡하여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활용하였다는 말 정도는 적어주는 것이 좋을 듯.
- 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에 대한 내용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데, 지도와 함께 영토확장 정도를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



수정 원고

광개토대왕(374∼413)은 391년부터 413년까지 재위한 고구려의 왕이다. ‘광개토(廣開土)’는 영토를 넓게 개척했다는 뜻의 이름이다. 본명은 담덕(談德)인데 호태왕(好太王), 영락(永樂)대왕이라고도 불렸다. ‘영락’은 광개토대왕의 연호로, 고구려가 중국과 대등한 나라임을 나타내는 의미를 지닌다. 어려서부터 체격이 크고 큰 뜻을 품고 있었던 그는 아버지 고국양왕이 세상을 떠난 후 왕위에 올랐다.

광개토대왕은 이름 그대로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크게 확장시켰다. 먼저 남쪽으로는, 즉위 초부터 백제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392년에는 석현성(石峴城 : 개풍군 북면 청석동)을 비롯한 10개성과 관미성(關彌城 : 예성강 하류 혹은 강화 교동도)을 함락시켰다. 또 394년에는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 침공해 온 백제군을 수곡성(水谷城 : 지금의 신계)에서, 395년에는 패수(浿水 : 지금의 예성강)에서 각각 격퇴하고 396년에는 한강 너머에까지 진격하여 58성 700촌락을 차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백제의 아신왕으로부터 영원히 노객(奴客 : 신하가 임금을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가리키던 말)이 되겠다는 맹세를 받고 왕의 동생과 대신들을 인질로 잡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백제는 완전히 굴복하지 않고 왜(倭)와 힘을 합해 고구려는 물론 고구려와 연결되어 있던 신라까지 공격했다. 이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군대를 보내 왜구를 신라에서 몰아내고 가야 지역까지 추격했다. 407년에는 백제를 공격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고 6성을 쳐부수어 백제를 응징했다. 신라와는 친선 관계를 맺었는데 400년에 왜구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원해줌으로써 신라에 대한 영향력이 더욱 커졌다.

광개토대왕은 남쪽뿐만 아니라 북서쪽으로도 영토를 넓혀나갔다. 392년에는 북쪽에 있던 거란(契丹)을 정벌하여 거란에게 잡혀갔던 고구려 사람 1만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395년에는 거란의 일부인 비려(碑麗)를 친히 정벌하여 많은 가축을 노획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고 398년에는 숙신(肅愼)을 정벌하여 조공 관계를 맺었다.

당시 고구려의 서쪽에는 선비족 모용씨(慕容氏)가 세운 후연국(後燕國)이 있었는데 후연과는 한동안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400년에 후연왕 모용성(慕容盛)이 소자하(蘇子河) 유역에 위치한 고구려의 남소성(南蘇城)과 신성(新城)에 쳐들어오자 광개토대왕은 후연에 대한 보복전을 펼쳤다. 이 전쟁을 시작으로 몇 차례의 전투를 통해 광개토대왕은 408년 결국 후연을 멸망에 이르게 하였다. 그 뒤 후연 지역에 등장한 북연(北燕)과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410년에는 동해 주변에 있던 동부여(東夫餘)를 정벌하여 굴복시키는 등 활발한 정복 사업을 펼친 결과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팽창시킬 수 있었다. 광개토대왕의 재위 시기에 고구려는 서쪽으로는 요하, 북쪽으로는 개원(開原)에서 영안(寧安), 동쪽으로는 혼춘(琿春), 남쪽으로는 임진강 유역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광개토대왕이 정복 사업에 성공한 가장 큰 비결은 그가 뛰어난 전략 ‧ 전술가였다는 점이다. 또 그는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들과 우호를 맺고 힘이 약한 나라는 위협하거나 회유하여 동맹을 맺거나 복속시켰다. 이렇게 외교력으로 고구려를 도와줄 세력을 만들어놓은 후 원하는 지역을 정벌했다. 그래서 안정적인 전투를 치르고 승리의 확률을 높일 수 있었다. 또 바닷길이나 강을 통해 이동하고 싸우는 수군을 만들어 기병과 보병을 중심이던 당시 전투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광개토대왕은 국력을 외부로 팽창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중앙과 지방 통치, 군사, 종교 등 여러 분야에서 획기적인 개혁을 했다. 장사(長史) · 사마(司馬) · 참군(參軍) 등의 중앙 관직을 신설하고 393년에는 평양에 9사(寺)를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였다. 나라 안의 안정을 도모하여 백성들의 삶도 크게 개선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은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했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라고 ‘광개토왕릉비’에 기록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은 413년 40세에 세상을 떠났다. 414년 능(陵)을 조성하고 생전의 업적을 기록한 능비(陵碑)를 세웠다. 화강암으로 된 능비의 높이는 6.39미터, 밑면 넓이는 1.43미터이고, 44행, 1775자의 비문이 새겨져 있고 지금도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남아 있다.

연구원 2차 검토

검토의견
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 과정이 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광개토대왕의 생애, 고구려의 국력이 최고에 달했던 시기라는 점의 강조, 국내적으로 이룬 정치, 문화적 업적 등 균형감 있는 내용의 서술이 필요하다.



교열본

백제, 신라, 가야 공략

광개토대왕(374∼413)은 391년부터 413년까지 재위한 고구려의 왕이다. ‘광개토(廣開土)’는 영토를 넓게 개척했다는 뜻의 이름이다. 본명은 담덕(談德)인데 호태왕(好太王), 영락(永樂)대왕이라고도 불렸다. ‘영락’은 광개토대왕의 연호로, 고구려가 중국과 대등한 나라임을 나타내는 의미를 지닌다. 어려서부터 체격이 크고 큰 뜻을 품고 있었던 그는 아버지 고국양왕이 세상을 떠난 후 왕위에 올랐다.

이름 그대로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크게 확장시켰다. 먼저 남쪽으로는, 즉위 초부터 백제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392년에는 석현성(石峴城 : 개풍군 북면 청석동)을 비롯한 10개성과 관미성(關彌城 : 예성강 하류 혹은 강화 교동도)을 함락시켰다. 또 394년에는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 침공해 온 백제군을 수곡성(水谷城 : 지금의 신계)에서, 395년에는 패수(浿水 : 지금의 예성강)에서 각각 격퇴하고 396년에는 한강 너머에까지 진격하여 58성 700촌락을 차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백제의 아신왕으로부터 영원히 노객(奴客 : 신하가 임금을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가리키던 말)이 되겠다는 맹세를 받고 왕의 동생과 대신들을 인질로 잡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백제는 완전히 굴복하지 않고 왜(倭)와 힘을 합해 고구려는 물론 고구려와 연결되어 있던 신라까지 공격했다. 이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군대를 보내 왜구를 신라에서 몰아내고 가야 지역까지 추격했다. 407년에는 백제를 공격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고 6성을 쳐부수어 백제를 응징했다. 신라와는 친선 관계를 맺었는데 400년에 왜구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원해줌으로써 신라에 대한 영향력이 더욱 커졌다.

거란, 후연, 부여 함락

광개토대왕은 남쪽뿐만 아니라 북서쪽으로도 영토를 넓혀나갔다. 392년에는 북쪽에 있던 거란(契丹)을 정벌하여 거란에게 잡혀갔던 고구려 사람 1만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395년에는 거란의 일부인 비려(碑麗)를 친히 정벌하여 많은 가축을 노획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고 398년에는 숙신(肅愼)을 정벌하여 조공 관계를 맺었다.

당시 고구려의 서쪽에는 선비족 모용씨(慕容氏)가 세운 후연국(後燕國)이 있었는데 후연과는 한동안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400년에 후연왕 모용성(慕容盛)이 소자하(蘇子河) 유역에 위치한 고구려의 남소성(南蘇城)과 신성(新城)에 쳐들어오자 광개토대왕은 후연에 대한 보복전을 펼쳤다. 이 전쟁을 시작으로 몇 차례의 전투를 통해 광개토대왕은 408년 결국 후연을 멸망에 이르게 하였다. 그 뒤 후연 지역에 등장한 북연(北燕)과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410년에는 동해 주변에 있던 동부여(東夫餘)를 정벌하여 굴복시키는 등 활발한 정복 사업을 펼친 결과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팽창시킬 수 있었다. 광개토대왕의 재위 시기에 고구려는 서쪽으로는 요하, 북쪽으로는 개원(開原)에서 영안(寧安), 동쪽으로는 혼춘(琿春), 남쪽으로는 임진강 유역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전략·전술가이자 정치가

광개토대왕이 정복 사업에 성공한 가장 큰 비결은 그가 뛰어난 전략 ‧ 전술가였다는 점이다. 또 그는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들과 우호를 맺고 힘이 약한 나라는 위협하거나 회유하여 동맹을 맺거나 복속시켰다. 이렇게 외교력으로 고구려를 도와줄 세력을 만들어놓은 후 원하는 지역을 정벌했다. 그래서 안정적인 전투를 치르고 승리의 확률을 높일 수 있었다. 또 바닷길이나 강을 통해 이동하고 싸우는 수군을 만들어 기병과 보병이 중심이었던 당시 전투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광개토대왕은 국력을 외부로 팽창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중앙과 지방 통치, 군사, 종교 등 내정 분야에서도 획기적인 개혁을 했다. 장사(長史) · 사마(司馬) · 참군(參軍) 등의 중앙 관직을 신설하고 393년에는 평양에 9사(寺)를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였다. 나라 안의 안정을 도모하여 백성들의 삶도 크게 개선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은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했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라고 ‘광개토왕릉비’에 기록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은 413년 40세에 세상을 떠났다. 414년 능(陵)을 조성하고 생전의 업적을 기록한 능비(陵碑)를 세웠다. 화강암으로 된 능비의 높이는 6.39미터, 밑면 넓이는 1.43미터이고, 직사각형 기둥 모양의 4면비이다. 4면 전체에 44행 1,755자를 새겼는데, 지금도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