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고려

Korea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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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원고

고려는 신라의 몰락 시기에 등장하였다. 918년에 왕건이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고려라고 건국한 이 나라는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영토는 한반도의 최북단을 제외하고 전역을 차지하였다. 10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초반에 고려는 북쪽에 인접해 있던 거란족 요 왕조로부터 여러 차례 침략을 받았다. 요 왕조가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에 위협을 느끼고 가해 온 공격이었지만, 고려는 이를 격퇴시켰다. 당시 고려는 1170년 무인 정권이 집권하게 될 때까지 150년간에 걸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이후 1231년부터 몽골이 여러 차례 고려를 침략하였고, 고려는 원나라의 피보호국이 되었다. 한편으로 몽골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고려의 왕자는 몽골의 공주와, 그리고 몽골 왕자는 고려 공주와 혼인하게 됨에 따라 고려와 원의 왕실은 관계가 매우 긴밀해졌다. 고려는 14세기 중엽에 나라의 자주성을 회복했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1392년에 조선 왕조가 성립하면서 끝나게 된다. 고려 왕조는 474년 동안 지속되었다.

건국 당시부터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으면서도 과거 시험과 같은 유학의 여러 제도를 채택하였다. 왕조의 전성기에는 불교 경전을 8만 장이 넘게 목판에 새긴 팔만대장경이 간행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최초의 인쇄용 금속 활자가 발명되었고, 현존하는 금속 활자본으로 가장 오래된 <직지>가 인쇄되었다. 고려는 청자로도 유명한데, 고려 청자는 한반도 밖으로 널리 수출되었다. 당시 외국 상인들이 “고려”란 말을 전 세계에 퍼뜨렸고, 그에 따라 서양에서는 이 나라를 “코리아”라고 부르게 된다.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1. “고려는 원나라의 피보호국이 되었다.” → “고려는 오랜 항쟁 끝에 원나라에 종속한 자치국이 되었다.”
  • “ 피보호국”은 생경한 용어임.

2. “<직지>가 인쇄되었다.” → “<직지심체요절>이 인쇄되었다.”
3. 추가 : 고려후기 고려와 원의 교류 및 그에 따른 성리학의 수입에 대해 언급이 필요함.

  • “14세기에 고려는 원 나라의 간섭 하에 있었지만, 두 나라 지배층과 학자들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그에 따라 고려의 유학자들은 원나라에서 장기간 거주하면서 새로이 융성하기 시작한 성리학(Neo-Confucianism)을 배우고 원 나라에서 시행한 과거에 급제하여 관료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이들이 고려에 돌아와 성리학을 보급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이 이른바 ”신흥사대부“ 계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들은 성리학의 새로운 이념을 바탕으로 사회 개혁을 추진하였고, 무장 세력인 이성계 일파와 연합하여 고려를 타도하고 조선 왕조를 세우게 되었다.”



수정 원고

  • 제목: 용의 후손들이 꿈꾼 고구려 부흥의 꿈, 고려

고려는 통일신라 말기 내부적 분열과 혼란에 직면한 정세 속에서 궁예가 세운 후고구려를 뒤 이어 등장하였다.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왕실의 혼란은 지방 사회의 분열과 반란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에 각각 궁예가 세운 북부의 후고구려, 견훤이 세운 남서부의 후백제를 출현시키며 다시금 후삼국의 분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중 개성 지역의 유력한 호족의 후원을 받았던 궁예는 개성에 도읍을 두고 후고구려를 세우며 고구려의 회복을 주창하였다.

그러나 궁예가 점차 포악해지고 민심에서 멀어지자 개성 유력 호족인 왕건은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새롭게 고려를 건국하여 고구려를 계승한 강성한 나라를 만들 것을 선언한 것이다. 태조 왕건은 후백제를 정복하고, 신라에게 항복을 받아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이미 926년 발해가 멸망한 뒤 그 유민들이 지속적으로 고려에 귀화하고 있었으므로, 이 때 고려의 통일은 명실공이 민족을 하나로 통합한 것이라고 평가될 수 있다.

태조 왕건은 북진정책을 내세워 고구려의 옛 땅을 향해 영토를 확장하였고, 평양을 또 하나의 수도로 격상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하였다. 또 오랜 분열 속의 후삼국 사회를 통합하기 위해 유력 호족 가문과 직접 혼인함으로써 견고한 유대감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또 「훈요십조」를 남겨 후대 왕들이 통치에 활용할 왕실의 전범을 마련하며 기틀을 다졌다.

뒤 이어 광종은 지방에서 독립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모든 호족들을 제거하고 강력한 왕권과 통치제도를 확립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할 수 있었다. 나아가 역사상 최초로 과거제도를 시행하여 관료제도를 구축하면서 스스로 연호를 사용하고 황제를 칭하기도 하였다.

이후 성종이 즉위하면서 유학을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수용하였다. 그리고 현종대에는 전국에 군현을 설치하고 여기에 지방관리를 파견하여 모든 영역을 중앙에서 국왕이 통제하는 국가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다. 이렇게 통치제도를 발전시켜 나간 고려는 문종대 이르러서는 화려하고 성대한 문화의 최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10세기 후반 이후 고려는 외부로부터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북쪽에서 국경을 접하고 있던 거란족이 요(遼)나라를 세운 뒤 고려를 압박하면서 크게 3차례의 침략을 받았다. 서희의 외교적 담판으로 전쟁 없이 물리쳐 내기도 하였지만, 중국 송(宋)나라와의 관계를 지속해 나가는 것에 불만을 품은 거란은 지속적으로 침략을 해와 한때 수도인 개성이 함락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끝내 강감찬의 활약으로 귀주대첩을 통해 거란을 물리쳐 낸 고려는 이후 수도 개성을 둘러싼 성벽을 축조하면서 다시금 외침에 대비하였다.

하지만 위기는 다시 이어졌다. 11세기 거란을 물리치고 등장한 여진은 금(金)나라를 세운 뒤 고려를 쳐들어 왔다. 여진과의 위기는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내용으로 강화를 체결하면서 마무리 될 수 있었다. 이로써 고려는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여진에게 조공을 바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내부적으로는 정변도 겪어야만 했다. 1170년, 건국 이래로 문신과는 현저히 다른 차별에 불만이 쌓여있던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왕과 문신 귀족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았다. 이른바 무신정권의 등장이었다. 무신정권은 이후 1270년 몰락할 때 까지 약 100년 동안 무신들간 권력자를 이어가면서 권력을 독점하였다.

무신정권이 몰락하게 된 계기는 바로 몽고의 침략이었다. 초원에서 급격하게 성장한 뒤 이미 거란과 여진, 그리고 송나라를 멸망시키며 강성해진 몽고는 1231년부터 고려를 침공하기 시작하였다. 총 9차례에 걸쳐 이뤄진 몽고의 침입은 고려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며 결국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항전하던 무신정권까지도 몰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몽고의 침략 속에서도 항전을 굽히지 않았던 고려는 끝내 몽고와 강화를 체결하면서 본래 수도인 개성으로 환도할 수 있었고, 그 댓가로 고려는 몽고, 즉 원나라의 영향력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려의 왕자는 원나라 황실의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자연히 사위의 나라, 즉 부마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또 대대로 황제국의 지위로 운영되던 고려의 행정 조직은 한 단계 격하 되면서 일정부분 내정간섭까지도 감수하여야 했다.

14세기 중엽 공민왕의 즉위를 계기로 대대적인 반원운동과 고려의 자주정책이 추진될 수 있었다. 공민왕은 원나라 내부의 반란이 속출해 내정이 혼란한 틈을 타 고려 안 친원파들을 숙청하고 몽고의 풍습을 타파하는 등 강력한 자주정책을 펼쳤다. 원나라가 편입해간 북방의 영토를 회복시키는가 하면 친원파들이 착취해간 대규모의 토지를 백성들에게 되돌려 주는 등 적극적인 개혁정책들을 펼치게 되었다.

그 결과 고려 안 몽고의 잔재는 어느 정도 청산 될 수 있었으며, 왕실의 전통적인 통치 질서 역시 다소 회복될 수 있었다. 하지만 공민왕이 갑작스럽게 암살되어 죽고 그 뒤를 이은 우왕이 원나라가 명나라에 쫓겨 남기고 간 요동 지역을 정벌하려 하면서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 강력한 무신 가운데 하나였던 이성계는 요동정벌에 반대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권력을 잡았다. 이른바 ‘위화도 회군’이었다.

이후 고려의 실권은 무신인 이성계에게 넘어가고 끝내 1392년 고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공양왕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바로 조선의 개창이었다. 이성계가 조선의 왕으로 등극하면서 고려 왕조는 474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막을 내린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하면서 유학을 통치의 이념으로 적극 수용했던 나라였다. 한국의 역사상 과거제도를 처음 시행한 나라가 바로 고려이며, 과거제도는 바로 유학적 소양을 가지고 시험을 봐 우수한 인물을 관리로 등용했던 제도였다. 후삼국을 통일하고, 지방에 흩어진 세력들을 흡수해 중앙의 통치력을 더욱 넓혀나갔으며, 과거제를 통해 왕과 관리들이 국가를 통치하고 운영하는 지배계층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관료제도를 안착시킨 것은 고려의 역사적 업적으로 평가되는 부분이다.

특히 14세기에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 하에 있었지만, 두 나라 지배층과 학자들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그에 따라 고려의 유학자들은 원나라에서 장기간 거주하면서 새로이 융성하기 시작한 성리학(Neo-Confucianism)을 배우고 원나라에서 시행한 과거에 급제하여 관료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이들이 고려에 돌아와 성리학을 보급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이 이른바 ‘신흥사대부’ 계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들은 성리학의 새로운 이념을 바탕으로 사회 개혁을 추진하였고, 무장 세력인 이성계 일파와 연합하여 고려를 타도하고 조선 왕조를 세우게 되었다.

많은 외부의 침략과 몽고의 침공에서도 끝내 굴복하지 않고 자주성을 지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고려의 역사에서 자랑할 만한 불굴의 정신이다. 화려한 귀족 문화를 꽃피우며 고려청자나 금속 활자본, 팔만대장경과 같은 인쇄술을 발전시켰고, 그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을 조판하였다는 것은 고려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업적이다.

특히 개성 아래 예성강 하류에 있던 벽란도라는 항구를 통해 다양한 외국의 상인과 멀리 아라비아 상인과도 활발히 교역하였던 고려는 현재 한국을 지칭하는 ‘코리아’의 어원이 될 만큼 우리 역사에 견고한 뿌리와 자양분을 제공해주고 있다.

교열본

  • 제목: 용의 후손들이 꿈꾼 고구려 부흥의 꿈, 고려

후삼국 평정으로 한반도 통일

고려는 통일신라 말기 내부적 분열과 혼란한 정세 속에서 궁예가 세운 후고구려에 이어 등장하였다.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왕실의 혼란은 지방 사회의 분열과 반란으로 이어졌다. 이에 각각 궁예가 세운 북부의 후고구려, 견훤이 세운 남서부의 후백제가 출현하며 다시금 후삼국으로 분열하게 되었다. 이 중 개성 지역의 유력한 호족의 후원을 받았던 궁예는 개성에 도읍을 두고 후고구려를 세우며 고구려의 회복을 주창하였다.

그러나 궁예가 점차 포악해지고 민심에서 멀어지자 역시 개성의 유력한 호족인 왕건은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새롭게 고려를 건국하여 고구려를 계승한 강성한 나라를 만들 것을 선언한다. 태조 왕건은 후백제를 정복하고, 신라에게 항복을 받아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이미 926년 발해가 멸망한 뒤 그 유민들이 지속적으로 고려에 귀화하고 있었으므로, 이 때 고려의 통일은 명실공히 민족을 하나로 통합한 것이라고 평가될 수 있다.

강력한 국가 기반 확립

태조 왕건은 북진정책을 내세워 고구려의 옛 땅을 향해 영토를 확장하였고, 평양을 또 하나의 수도로 격상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하였다. 또 오랜 분열 속의 후삼국 사회를 통합하기 위해 유력 호족 가문과 직접 혼인함으로써 견고한 유대감을 조성하였다. 또 「훈요십조」를 남겨 후대 왕들이 통치에 활용할 왕실의 전범을 마련하며 기틀을 다졌다. 이어 광종은 지방에서 독립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모든 호족들을 제거하고 강력한 왕권과 통치제도를 확립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할 수 있었다. 나아가 역사상 최초로 과거제도를 시행하여 관료제도를 구축하면서 스스로 연호를 사용하고 황제를 칭하기도 하였다.

이후 성종이 즉위하면서 유학을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수용하였다. 그리고 현종 대에는 전국에 군현을 설치하고 여기에 지방관리를 파견하여 모든 영역을 중앙에서 국왕이 통제하는 국가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다. 이렇게 통치제도를 발전시켜 나간 고려는 문종 대에 이르러서는 화려하고 성대한 문화의 최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거란과 여진의 잦은 침략

그러나 10세기 후반 이후 고려는 외부로부터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북쪽 국경을 마주하고 있던 거란족이 요(遼)나라를 세운 뒤 고려를 압박하면서 크게 3차례나 침략을 하였다. 거란은 중국 송(宋)나라와의 관계를 지속해 나가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서희의 외교적 담판으로 전쟁 없이 물리쳐 내기도 하였지만, 지속적인 침략으로 한때 수도인 개성을 함락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끝내 강감찬이 활약한 귀주대첩의 승리로 거란을 물리쳐 낸 고려는 이후 수도 개성을 둘러싼 성벽을 축조하면서 다시금 외침에 대비하였다.

하지만 위기는 다시 이어졌다. 11세기 거란을 물리치고 등장한 여진은 금(金)나라를 세운 뒤 고려에 쳐들어왔다. 여진과의 위기는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내용으로 강화를 체결하면서 마무리될 수 있었다. 이로써 고려는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여진에게 조공을 바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무신정권의 등장과 몰락

이 과정에서 내부적으로는 정변도 겪어야만 했다. 1170년, 건국 이래로 문신과는 현저히 다른 차별에 불만이 쌓여있던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왕과 문신 귀족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았다. 이른바 무신정권의 등장이었다. 무신정권은 이후 1270년 몰락할 때까지 약 100년 동안 무신들로 이어가면서 권력을 독점하였다.

무신정권이 몰락하게 된 계기는 바로 몽고의 침략이었다. 초원에서 급격하게 성장한 뒤 이미 거란과 여진, 그리고 송나라를 멸망시키며 강성해진 몽고는 1231년부터 고려를 침공하기 시작하였다. 총 9차례에 걸쳐 이뤄진 몽고의 침입은 고려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며 결국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항전하던 무신정권까지도 몰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몽고에 대한 저항과 굴욕

몽고의 침략 속에서도 항전을 계속하였던 고려는 끝내 몽고와 강화를 체결하게 되었다. 그제야 본래 수도인 개성으로 환도할 수 있었고, 그 대가로 고려는 몽고, 즉 원나라의 영향력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려의 왕자는 원나라 황실의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자연히 사위의 나라, 즉 부마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또 대대로 황제국의 지위로 운영되던 고려의 행정 조직은 한 단계 격하되면서 일정부분 내정간섭까지도 감수하여야 했다.

14세기 중엽 공민왕의 즉위를 계기로 대대적인 반원운동과 고려의 자주정책이 추진되었다. 공민왕은 원나라 내부에서 반란이 속출하여 원의 내정이 혼란한 틈을 타 고려 안에 있는 친원파들을 숙청하고 몽고의 풍습을 타파하는 등 강력한 자주정책을 펼쳤다. 원나라가 편입해간 북방의 영토를 회복시키는가 하면 친원파들이 착취해간 대규모의 토지를 백성들에게 되돌려 주는 등 적극적인 개혁정책들을 펼치게 되었다.

새로운 국면, 새로운 인물

그 결과 고려 안 몽고의 잔재는 어느 정도 청산되었으며, 왕실의 전통적인 통치 질서 역시 다소 회복될 수 있었다. 하지만 공민왕이 갑작스럽게 암살되어 죽고 그 뒤를 이은 우왕이 원나라가 명나라에 쫓겨 남기고 간 요동 지역을 정벌하려 하면서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 강력한 무신 가운데 하나였던 이성계는 요동정벌에 반대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잡았다. 이후 고려의 실권은 무신인 이성계에게 넘어가고 끝내 1392년 고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공양왕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바로 조선의 개창이었다. 이성계가 조선의 왕으로 등극하면서 고려 왕조는 474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막을 내린다.

고려가 이룩한 업적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하면서 통치의 이념으로써 유학을 적극 수용했던 나라였다. 한국의 역사상 과거제도를 처음 시행한 나라가 바로 고려이며, 과거제도는 바로 유학적 소양에 대한 시험으로 우수한 인물을 뽑아 관리로 등용했던 제도였다. 과거제를 통해 왕과 관리들이 국가를 통치하고 운영하는 지배계층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관료제도를 안착시킨 것은 고려의 역사적 업적으로 평가되는 부분이다.

특히 14세기에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 하에 있었지만, 두 나라 지배층과 학자들은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그에 따라 고려의 유학자들은 원나라에서 장기간 거주하면서 새로이 융성하기 시작한 성리학(Neo-Confucianism)을 배우고 원나라에서 시행한 과거에 급제하여 관료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이들이 고려에 돌아와 성리학을 보급하기 시작하면서 이른바 ‘신흥사대부’ 계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들은 성리학의 새로운 이념을 바탕으로 사회 개혁을 추진하였고, 무장 세력인 이성계 일파와 연합하여 고려를 타도하고 조선 왕조를 세우게 되었다.

고려의 문화융성

고려는 주변국들의 잦은 침략과 몽고의 강력한 공습에도 불굴의 정신으로 자주성을 지켜 나갔다. 화려한 귀족 문화를 꽃피우며 고려청자나 금속 활자본, 팔만대장경과 같은 인쇄술을 발전시켰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을 조판하였다는 것은 고려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업적이다.

특히 개성 아래 예성강 하류에 있던 벽란도라는 항구를 통해 멀리 아라비아 상인에 이르는 다양한 외국의 상인과 활발히 교역하였다. 고려는 현재 한국을 지칭하는 ‘코리아’의 어원이 될 만큼 우리 역사에 견고한 뿌리와 자양분을 제공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