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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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원고

삼국 중의 하나인 고구려는 압록강 부근에서 부족 국가로 일어나, 주변 세력을 통합하면서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왕릉비에 따르면, 북부여 출신의 전설적인 왕자 주몽이 나라를 세웠다. 3세기에 고구려는 중국 위나라와 전쟁을 벌여 수도가 파괴되기도 했지만, 이후 회복하고서 영토를 확대해 나갔다. 전성기였던 476년에는 랴오닝 반도를 포함하여 만주의 대부분과 한반도의 남단을 제외한 3/4 지역을 장악하였다. 6세기에 들어서는 내우외환으로 인해 약세에 처하였다. 551년에 신라와 백제가 연합하여 고구려를 요충지인 한강 유역에서 몰아내었고, 결국 이 지역은 신라가 획득하였다. 또한 북쪽에서 벌어진 수나라 및 당나라와의 연이은 전쟁으로 국력이 쇠약해지면서 고구려는 668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한다. 이후 고구려의 영토는 신라와 당나라 및 훗날의 발해가 차지하였다.

고구려의 가장 유명한 왕인 광개토왕(374~413)은 북쪽으로는 중국 당나라를(잘못! 옮긴이 의견: 중국 후연을 Later Yan Dynasty in northern China), 그리고 남쪽으로는 신라와 백제를 물리치고 막대한 영토를 획득하였다. 그의 아들 장수왕(394~491)은 수도를 오늘날의 평양으로 옮기고 문화적 경제적 발전을 도모하였다. 고구려는 삼국 가운데 최초로 불교를 받아들였으며, 성곽 구조와 온돌 난방, 무예, 무용, 의복 등을 포함하여 고구려의 문화는 현대 한국 문화의 기원이 되고 있다. 오늘날 고분과 성곽, 궁성 등 중국과 북한에 남아 있는 몇몇 고구려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고구려 고분은 내부의 벽화로 유명하다.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1. “광개토왕(374~413)은 북쪽으로는 중국 당나라를(잘못! 옮긴이 의견: 중국 후연을”
  • 번역자의 지적이 맞음.

2. “고구려의 문화는 현대 한국 문화의 기원이 되고 있다.”

  • 지나친 표현임. 현대 한국 문화의 기원은 조선시대 정도에서 찾아야 함. 고대로 소급하더라도 신라 문화가 주요 기원임.



수정 원고

  • 제목: 초원을 달리고 대륙을 지배한 기상, 고구려

고구려는 압록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연맹체 국가로 일어나 주변 세력을 통합하면서 강력한 고대국가로 발전한 나라이다.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에 따르면, 북부여의 왕자 주몽이 남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이를 통해 고구려는 왕실이 부여로부터 나왔다는 계통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후 고구려에서는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부인을 부여신으로 섬기며 주몽과 함께 국가적으로 제사지내는 등 부여와의 관계를 명확히 내세우고 있다.

1세기 후반 태조왕을 기점으로 연맹체를 벗어나 고대국가 단계에 접어들기 시작한 고구려는 압록강 유역에서 점차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위로는 부여를 압박하고, 동쪽으로는 옥저와 동예를 정복했으며, 서쪽으로는 중국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한편, 남쪽으로는 대동강 유역까지 뻗어나갔다. 그 과정에서 3세기 중국 위나라와 전쟁을 벌이다 수도가 함락당하기도 하였지만, 4세기에 접어들어 불교를 받아들이고 율령을 반포하면서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체제를 확립하면서 국력을 회복하였다.

이에 5세기 고구려는 476년 요동반도를 포함하여 만주의 대부분과 한반도의 남부 지역까지 장악하면서 한반도의 3/4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구축하였다. 이 과정에서 삼국간 경쟁에서 가장 우세를 보이고 있었던 백제를 격파해 수도인 한성을 함락시키는 한편, 남쪽으로 내려가 가야를 압박하면서 신라 안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자국의 영향력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이때가 고구려의 최전성기에 해당한다.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국왕은 광개토대왕(374~413)과 그의 아들 장수왕(394~491)이었다. 광개토대왕은 중국의 후연(後燕)과 남쪽의 백제, 가야를 물리치면서 막대한 영토를 획득하였다. 이어 장수왕은 수도를 오늘날의 평양으로 옮기고 본격적 국력의 신장과 국가의 안정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6세기에 들어 고구려는 나라 안팎으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551년에 신라와 백제가 동맹을 체결하고 반격을 시도하면서 고구려의 요충지이자 백제의 옛 수도였던 한강유역을 빼앗겼다. 이어 북쪽에서는 중국의 오랜 분열을 통일하고 등장한 수나라와 당나라가 연이어 고구려를 쳐들어오면서 그들과 맞서 싸웠던 고구려는 크게 국력을 소모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신라는 한강유역을 점령한 뒤 백제와 나눠 갖기로 했던 약속을 무시하고 독차지하면서 이를 토대로 비약적인 성장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급기야 신라와 적대하기 시작한 백제와 손을 잡고 신라와 대항하였다. 삼국간 관계에서 고립되던 신라는 더욱 중국의 당나라와 견고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신라와 당나라는 동맹을 체결하여 고구려를 쳐들어왔고,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결국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그 결과 고구려의 영토는 대동강을 기준으로 북쪽을 당나라가, 남쪽을 신라가 나눠가졌다가 이후 대동강 북쪽의 고구려 영토를 발해가 다시 점령하면서 남북국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불교를 받아들였다. 372년 중국으로부터 불교가 수용된 이래 왕실을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보급되었다. 불교는 고대국가로 발전해 가던 과정에서 왕권을 뒷받침 해주는 중요한 사상적 근거로 기능하였기 때문에 고구려는 국왕을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또 고구려는 오랜 기간 중국과의 전쟁을 거치며 견고하고 탁월한 성곽 방어 체제를 마련할 수 있었다. 성곽의 돌을 계단식으로 들여쌓는 방식이나, 성곽 돌을 안쪽으로 뾰족하게 깎아 마치 사람의 이빨처럼 견고하게 맞물릴 수 있게 축성한 것은 고구려만의 독특한 축성 방식이자 수준 높은 기술로 널리 평가받고 있다.

아울러 고구려의 주거형태 가운데 온돌을 활용한 난방이나, 고구려의 무예, 무용과 의복과 같은 당시 실질적인 생활 모습들이 왕과 귀족들의 무덤 안 벽화를 통해 잘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현재 한국 전통 문화의 원형에 해당하는 것으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때문에 오늘날 고구려의 고분과 성곽, 궁성터 등 중국과 북한에 남아 있는 몇몇 유적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매우 신중하게 보호되고 있다.

교열본

  • 제목: 초원을 달리고 대륙을 지배한 기상, 고구려

압록강 유역의 왕권국가

고구려는 압록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연맹체 국가로 일어나 주변 세력을 통합하면서 강력한 고대국가로 발전한 나라이다.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에 따르면, 북부여의 왕자 주몽이 남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이를 통해 고구려 왕가는 부여로부터 나왔다는 계통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구려에서는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부인을 부여신으로 섬기며 주몽과 함께 국가적으로 제사지내는 등 부여와의 관계를 명확히 내세웠다.

1세기 후반 태조왕을 기점으로 연맹체를 벗어나 고대국가 단계에 접어들기 시작한 고구려는 압록강 유역에서 점차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위로는 부여를 압박하고, 동쪽으로는 옥저와 동예를 정복했으며, 서쪽으로는 중국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한편, 남쪽으로는 대동강 유역까지 뻗어나갔다. 그 과정에서 3세기 중국 위나라와 전쟁을 벌이다 수도가 함락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4세기에 접어들어 불교를 받아들이고 율령을 반포하여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체제를 확립하면서 국력을 회복하였다.

고구려 전성기

이에 5세기 고구려는 476년 요동반도를 포함하여 만주의 대부분과 한반도의 남부 지역까지 장악하면서 한반도의 3/4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구축하였다. 이 과정에서 삼국간 경쟁에서 가장 우세를 보이고 있었던 백제를 격파해 수도인 한성을 함락시키는 한편, 남쪽으로 내려가 가야를 압박하면서 신라 안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자국의 영향력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이때가 고구려의 최전성기에 해당한다.

광개토대왕(374~413)과 그의 아들 장수왕(394~491)은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국왕이었다. 광개토대왕은 중국의 후연(後燕)과 남쪽의 백제, 가야를 물리치면서 막대한 영토를 획득하였다. 이어 장수왕은 수도를 오늘날의 평양으로 옮긴 후 본격적으로 국력을 신장시키고 국가의 안정을 확립하였다.

극복하지 못한 위기

그러나 6세기에 들어 고구려는 나라 안팎으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551년에 신라와 백제가 동맹을 체결하고 반격을 시도하면서 고구려의 요충지이자 백제의 옛 수도였던 한강유역을 빼앗겼다. 이어 북쪽에서는 중국의 오랜 분열을 통일하고 등장한 수나라와 당나라가 연이어 고구려에 쳐들어온다. 연이어 그들과 맞서 싸웠던 고구려는 국력을 크게 소모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신라는 한강유역을 점령한 뒤 백제와 나눠 갖기로 했던 약속을 무시하고 독차지하면서 이를 토대로 비약적인 성장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급기야 신라와 적대하기 시작한 백제와 손을 잡고 신라와 대항하였다. 삼국 간 관계에서 고립되던 신라는 중국의 당나라와 더욱 견고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신라와 당나라는 동맹을 체결하여 고구려를 쳐들어왔고,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결국 멸망하였다. 그 결과 고구려의 영토는 대동강을 기준으로 북쪽은 당나라가, 남쪽은 신라가 나눠가졌다가 이후 대동강 북쪽의 고구려 영토를 발해가 점령하면서 남북국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뛰어난 기술과 높은 문화 수준

고구려는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불교를 받아들였다. 372년 중국에서 전파된 불교를 수용한 이래 왕실을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보급되었다. 불교는 고대국가로 발전해 가던 과정에서 왕권을 뒷받침 해주는 중요한 사상적 근거로 기능하였기 때문에 고구려는 국왕을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또 고구려는 오랜 기간 중국과의 전쟁을 거치며 견고하고 탁월한 성곽 방어 체제를 마련할 수 있었다. 성곽의 돌을 계단식으로 들여쌓는 방식이나, 성곽 돌을 안쪽으로 뾰족하게 깎아 마치 사람의 이빨처럼 견고하게 맞물릴 수 있게 축성한 것은 고구려만의 독특한 축성 방식이자 수준 높은 기술로 널리 평가받고 있다.

아울러 고구려의 주거형태 가운데 온돌을 활용한 난방이나, 고구려의 무예·무용과 의복과 같은 당시 실질적인 생활 모습들이 왕과 귀족들의 무덤 안 벽화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현재 한국 전통 문화의 원형에 해당하는 것으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때문에 오늘날 고구려의 고분과 성곽, 궁성터 등 중국과 북한에 남아 있는 몇몇 유적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매우 신중하게 보호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