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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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목: 철의 나라, 잊혀진 연맹국가, 가야

가야 연맹은 서기 1세기경부터 6세기까지 한반도의 남부, 즉 낙동강의 연안을 중심으로 형성된 연맹체를 지칭한다. 대략 6개 소국으로 구성된 연맹체라는 측면에서 6가야 연맹체로 설명된다. 이 지역에는 본래 변한의 12개 소국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변한의 소국들이 3세기경부터 가야 연맹의 6개 소국을 중심으로 흡수되어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야의 건국과 관련하여서는 󰡔삼국유사󰡕의 「가락국기」를 통해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그 기록에 따르면 토착세력의 추대로 김수로가 왕으로 등극하면서 가야 연맹체가 시작되고 있으며, 이후 6개의 연맹체는 인도 아유타국의 왕비를 맞아들이며 더욱 번성하였다고 말한다. 허황옥으로 알려진 김수로의 왕비는 가야로 들어올 때 불상을 함께 가지고 왔다고 전해지는데, 이를 가지고 한반도 남부의 불교가 중국을 거치지 않고 바다를 통해 인도에서 직접 전파된 것이다라는 주장을 하는 학자도 있다.

가야의 역사는 크게 전기 가야 연맹과, 후기 가야 연맹으로 나눠 볼 수 있는데, 김수로왕 설화는 이중 전기 가야 연맹에 해당하는 것이다. 전기의 가야 연맹은 김해 지역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는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김해지역은 낙동강과 주변의 평야가 널리 분포하고 있어 농경에 매우 유리한 지역이었다. 또한 일찍부터 철자원이 풍부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어 금관가야는 철이 가져다주는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주변지역을 압도하며 강력한 정치력을 확보하게 된 집단으로 판단이 된다.

철은 당시 화폐로 쓰일 만큼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서에는 가야의 철이 수출되어 활용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어 일찍부터 가야는 철을 매개로 주변국가인 중국과 일본과의 교역에 적극적으로 나섰음을 알 수 있다.

금관가야가 자리 잡고 있는 김해가 낙동강 하류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바다를 활용한 해양 교역 뿐만 아니라 경상도 지방의 내륙지방과 교류에도 유리하다는 장점을 지닌다. 따라서 금관가야가 전기 가야연맹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내륙과 해양을 망라한 대외 교역을 통한 경제력에 밑바탕이 있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더구나 창원 다호리에서는 기원전 1세기에 사용된 붓이 발견되었던 만큼 낙동강 하류 지역은 단순한 경제적 교역뿐만 아니라 선진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교류의 창구로 역할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환경을 토대로 전기 가야는 가야 연맹을 넘어 낙동강 동쪽의 신라까지도 압박하면서 위력을 떨치게 되었다.

하지만 전기 가야연맹은 대략 4세기 이후부터 고구려의 남진이 계기로 급격하게 위축되었다. 백제와 가야가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압박하는 상황에서 고구려는 신라의 요청으로 낙동강 하류로 진출하여 이들 세력들을 격파하였다.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고구려는 보병과 기병 5만을 동원하여 백제와 가야, 그리고 왜 세력들을 격파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며, 이때 금관가야는 크게 타격을 받아 쇠약해지게 되었다.

급기야 가야 연맹은 금관가야를 대신해 고령 지방에 위치한 대가야를 중심으로 새로운 연맹체를 구성하였으니, 이때부터 후기 가야연맹이 시작된다. 대가야가 위치한 고령은 내륙지방에 위치해있었던 만큼 고구려의 남하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가야연맹은 낙동강 하류의 활발한 수운 교역 중심의 활동에서 벗어나 내륙을 중심으로 하는 활동과 세력 확장을 꾀하게 되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신라시대 최치원이 남긴 「석리정전」안에 대가야 시조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대가야의 시조가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와 형제 사이로 소개되고 있다. 따라서 후기 가야 연맹을 주도했던 대가야는 전기 가야연맹을 계승해 가야 연맹체 전체를 주도한다는 계승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가야 연맹은 끝내 6세기 경 신라에 복속당하였다. 금관가야는 532년에, 대가야는 562년에 각각 신라에 정복당하면서 가야 연맹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가야의 유민들은 신라의 백성으로 남아 활발히 활동하였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끌었던 김유신은 가야 유민 출신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으며, 통일신라시대 음악가 우륵과 문장가 강수 역시 가야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또 현재 국악기로 널리 쓰이고 있는 가야금 역시 가야로부터 전래된 전통악기로써 우리 민족의 음악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교열본

  • 제목: 철의 나라, 잊힌 연맹국가, 가야

가야연맹체

가야연맹은 서기 1세기경부터 6세기까지 한반도의 남부, 즉 낙동강의 연안을 중심으로 형성된 연맹체를 지칭한다. 대략 6개 소국으로 구성된 연맹체라는 측면에서 6가야 연맹체로 설명된다. 이 지역에는 본래 변한의 12개 소국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변한의 소국들이 3세기경부터 가야연맹의 6개 소국을 중심으로 흡수되어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야의 건국과 관련하여서는 『삼국유사』의 「가락국기」를 통해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그 기록에 따르면 토착세력의 추대로 김수로가 왕으로 등극하면서 가야 연맹체가 시작되고 있으며, 이후 6개의 연맹체는 인도 아유타국의 왕비를 맞아들이며 더욱 번성하였다고 말한다. 허황옥으로 알려진 김수로의 왕비는 가야로 들어올 때 불상을 함께 가지고 왔다고 전해지는데, 이를 가지고 한반도 남부의 불교가 중국을 거치지 않고 바다를 통해 인도에서 직접 전파된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학자도 있다.

평야와 철을 가진 금관가야

가야의 역사는 크게 전기 가야연맹과, 후기 가야연맹으로 나눌 수 있는데, 김수로왕 설화는 이중 전기 가야연맹에 해당한다. 전기의 가야연맹은 김해 지역을 근거로 한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김해는 낙동강과 주변의 평야가 널리 분포하고 있어 농경에 매우 유리한 지역이었다. 또한 일찍부터 철자원이 풍부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어 금관가야는 철이 가져다주는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주변지역을 압도하며 강력한 정치력을 확보하게 된 집단으로 판단된다.

철은 당시 화폐로 쓰일 만큼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서에는 가야의 철을 수입하여 썼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어 일찍부터 가야는 철을 매개로 주변국가인 중국과 일본과의 교역에 적극적으로 나섰음을 알 수 있다.

낙동강 하류라는 유리한 입지 조건

금관가야가 자리 잡고 있는 김해가 낙동강 하류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바다를 활용한 해양교역뿐만 아니라 경상도 내륙지방과도 쉽게 교류할 수 있다는 장점이 되었다. 이렇듯 금관가야가 전기 가야연맹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내륙과 해양을 망라한 대외 교역을 통한 경제력에 밑바탕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더구나 창원 다호리에서는 기원전 1세기에 사용된 붓이 발견된 만큼 낙동강 하류 지역은 단순한 경제적 교역뿐만 아니라 선진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교류의 창구 역할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환경을 토대로 전기 가야는 가야연맹을 넘어 낙동강 동쪽의 신라까지도 압박하면서 위력을 떨치게 되었다.

지는 금관가야, 뜨는 대가야

하지만 전기 가야연맹은 대략 4세기 이후부터 고구려가 남진하자 급격하게 위축되었다. 백제와 가야가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압박하는 상황에서 고구려는 신라의 요청으로 낙동강 하류로 진출하여 이들 세력들을 격파하였다.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고구려는 보병과 기병 5만을 동원하여 백제와 가야, 그리고 왜 세력들을 격파하였다고 전한다. 이때 금관가야는 크게 타격을 받아 쇠약해지게 되었다.

급기야 가야연맹은 금관가야를 대신해 고령 지방에 위치한 대가야를 중심으로 새로운 연맹체를 구성하였으니, 이때부터 후기 가야연맹이 시작된다. 대가야가 위치한 고령은 내륙지방에 위치했던 만큼 고구려의 남하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가야연맹은 낙동강 하류의 활발한 수운 교역 중심의 활동에서 벗어나 내륙을 중심으로 하는 활동하며 세력 확장을 꾀하게 되었다.

가야의 흔적

『동국여지승람』에는 신라시대 최치원이 남긴 「석리정전」 안에 대가야 시조설화가 전한다. 여기에서는 대가야의 시조가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와 형제 사이로 소개되고 있다. 따라서 후기 가야연맹을 주도했던 대가야는 전기 가야연맹을 계승해 가야 연맹체 전체를 주도한다는 계승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가야연맹은 끝내 6세기 경 신라에 복속 당하였다. 금관가야는 532년에, 대가야는 562년에 각각 신라에 정복되면서 가야연맹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가야의 유민들은 신라의 백성으로 남아 활발히 활동하였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끌었던 김유신은 가야 유민 출신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으며, 통일신라시대 음악가 우륵과 문장가 강수 역시 가야 출신이다. 또 가야로부터 전래된 가야금은 현재도 주요 국악기로 연주되며 전통음악 역사에서 중요한 악기로 꼽히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