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 주자 이후 성리학의 일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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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 주자 이후 성리학의 일인자

왕들이 흠모한 학자

퇴계 이황(退溪 李滉 : 1501∼1570)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였다. 이황은 1527년 처음 과거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리로서 첫발을 들여놓았다. 풍기군수로 재임할 때는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 군수 주세붕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 · 서적 · 학전을 하사할 것을 조정에 청원하였다. 이는 주자가 백록동서원을 부흥한 선례를 좇은 것이다. 이황의 청원은 받아들여졌고 백운동서원은 조선조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이 되었다.

그 후에도 이황은 20여 차례에 걸쳐 많은 관직을 제안 받았지만 모두 사양하였다. 육십이 된 1560년 도산서당을 짓고 서당에서 독서 · 수양 · 저술을 하며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조선의 제13대 임금 명종은 이황이 관직에 나오도록 예의를 갖춰 여러 번 청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당시는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 연구와 덕성을 쌓는 것에 전념하는 것을 선비의 미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명종은 신하들과 함께 ‘현명한 학자를 불렀지만 오지 않음을 탄식함’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보내 이황이 지내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병풍을 만들어 펼쳐놓고 아침저녁으로 이황을 흠모했다고 한다.

1567년 명종이 세상을 떠나고 왕위에 오른 선조는 이황을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 때문에 부득이 고향에 돌아오고 말았다. 선조도 이황을 자신의 곁에 여러 차례 불러들이려 했다. 번번이 사퇴하던 이황은 더 이상 거절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의 중임을 맡았다. 1569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음해 11월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 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 한 뒤 단정히 앉은 자세로 세상을 떠났다.

『성학십도』로 집대성된 퇴계 사상

이황의 학문은 50세 이후부터 더욱 원숙해졌다. 56세에 향약을 기초하였고, 58세에 『주자서 절요』 및 『자성록』을 거의 완결지어 그 서문을 썼다. 59세에 기대승과 더불어 사단칠정에 관한 질의 응답을 시작하였고, 68세에 선조에게 「무진육조소」라는 상소를 올렸으며 『논어집주』, 『주역』 등을 강의하였다. 선조는 「무진육조소」를 천고의 격언으로 여기고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굳게 약속했다고 한다. 그 뒤 이황은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를 저술하여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무진육조소」에는, 계통을 중히 여겨 전 왕 명종에게 인효(仁孝)를 온전히 할 것, 곁에서 모시는 신하와 궁인의 참소와 이간을 막아 명종궁과 선조궁 사이에 친교가 이루어지게 할 것, 성학(聖學)을 돈독히 존숭해 그것으로서 정치의 근본을 정립할 것, 임금 스스로가 모범적으로 도덕과 윤리를 밝혀 인심을 바로잡을 것, 군주가 대신에게 진심을 다해 접하고 왕에게 조언하는 대간을 잘 채용해 군주의 이목을 가리지 않게 할 것, 수양과 반성을 성실히 하여 하늘의 도움을 받을 것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이황 학문의 집약체로 볼 수 있는 『성학십도』에는 주희, 정복심, 권근, 주돈이, 이황 등의 말과 저작이 실려 있다. 그러나 이들 유학 사상의 정수는 이 책에서 이황에 의해 독창적으로 배치되어 서로 유기적으로 관련됨으로써 생명 있는 전체적 체계를 이루게 되었다.

그의 학풍을 따르는 300명에 가까운 학자들로 하여금 주리파 철학을 형성하게 한 이황은 한국 유학 사상의 중심 인물이다. 임진왜란 후 이황의 문집이 일본으로 전해져 도쿠가와가 집정한 에도시대에 그의 저술 11종 46권 45책이 일본각판으로 복간되었다. 일본 유학 사상의 주류인 기몬학파 및 구마모토학파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황은 이 두 학파로부터 깊은 흠숭을 받아 왔다. 또한, 개화기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에게서도 크게 존경을 받아, 퇴계는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3국의 도의철학의 건설자이며 실천자였다고 할 수 있다.

관련항목

참고문헌

  • 이황의 생애 및 학문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이병도, 『한국유학사』, 아세아문화사, 1987.
이상은, 『퇴계의 생애와 학문』, 예문서원, 1999.


『한국유학사』는 고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한국 유학을 총 정리한 개설서이다. 제11장 제1절에서 퇴계문집의 연보를 활용하여 이황의 생애를 서술하였으며, 특히 그가 일생토록 연구한 성리학에 대해서는 이기론, 사단논변, 물격·격물설, 수양론, 저술 등 항목을 세분하여 다루고 있다. 제2절에서는 이황과 동시대에 활동하였던 여덟 명의 학자들(이항, 조식, 정지운, 김인후, 이중호, 류희춘, 노수신, 기대승)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이황의 학문적 교유관계 및 당시 사상적 경향을 알 수 있다.

『퇴계의 생애와 학문』은 이황의 생애를 크게 네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고 있는데, 수학 시기, 출사 시기, 은퇴 강학 시기, 퇴계 사후 평가이다. 학문 분야에서는 퇴계 학문의 배경, 성과, 그리고 퇴계사상의 핵심으로 『천명도설』을 꼽아 설명하고 있다.


  • 이황이 살았던 시기의 사림 정치와 사화가 궁금하다면...
이병도, 『한국유학사』, 아세아문화사, 1987.
최이돈, 『조선중기 사림정치구조연구』, 일조각, 1994.
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8.
윤사순, 『한국유학사』 상, 지식산업사, 2012.


이병도의 『한국유학사』의 제9장에서는 이황이 살았던 시기의 사림 정치와 사화에 대해 다루고 있다.

『조선중기 사림정치구조연구』에서는 조선 중기 사림의 등장으로 형성된 붕당정치의 발생 과정과 정치운영의 원리 및 구조를 조명한 연구논저로 4·5장이 이황의 활동 시기와 겹친다.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는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원하는 독자들을 위한 대중서이다.

윤사순의 『한국유학사』는 한국유학사의 흐름을 관통하는 개론서로서, 16세기 중엽의 조선시대 사상사를 폭 넓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이황 당시의 시기를 보다 집중적으로 보려고 한다면 이 책의 제3편 18장을 참조할 수 있다.


  • 이황과 서원과의 관계에 대해 알고 싶다면...
정만조, 『조선시대 서원연구』, 집문당, 1997.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임하던 시절 왕에게 상소를 올려 백운동서원에 편액, 서적, 학전을 하사할 것을 청원하였는데 『조선시대 서원연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저서의 1장 “조선서원의 성립과정”과 2장 “퇴계의 서원론”을 통해 본문 내용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


  •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논변에 대해 알고 싶다면...
윤사순, 『한국유학사』 상, 지식산업사, 2012.
금장태, 『한국유학의 탐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4.


그의 학문 활동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기대승과 논쟁을 한 사단칠정논쟁을 들 수 있다. 둘 사이에 왕복편지를 통해 8년간이나 진지하게 토론을 벌였는데, 과정이 복잡하고 내용도 어렵다. 다만, 전반적인 논쟁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저서로서, 윤사순의 『한국유학사』 상의 제3편 19장을 보면 논쟁의 발단과 전개 및 성격과 영향 등을 이해할 수 있다.

『한국유학의 탐구』의 7장을 보면 당시 성리학의 쟁점으로서 사단칠정논쟁과 인물성동이논쟁을 함께 다루고 있다. 조선시대 성리학이 발달하면서 발생하는 여러 쟁점들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 이황의 저술 및 사상과 관련하여 더 알고 싶다면...
한형조, 『조선유학의 거장들』, 문학동네, 2008.
이황, 『자성록 언행록 성학십도』, 동서문화사, 2008.


『조선유학의 거장들』의 2장을 보면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성학십도』의 편찬배경과 의미를 이해할 수 있고, 그의 대표적인 사상인 경(敬)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자성록 언행록 성학십도』는 이황의 대표적인 저서들을 현대어로 번역한 책으로 비록 원문은 아니지만, 직접 그의 글을 읽고 싶어하는 독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