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집회와 한국의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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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와 한국의 민주주의

위법을 피하기 위한 시위 방식

촛불집회는 비폭력 평화시위의 주요방식으로 한국에서 촛불집회는 ‘촛불문화제’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집회·시위 문화를 바꿔놓았을 뿐 아니라 직접민주주의의 새로운 형식으로 수용되면서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촛불집회는 1960년대 말 미국의 반전운동 과정에서 나타났으나 한국에서 문화제 성격으로 개최된 것은 현행법에 저촉되지 않기 위한 이유가 가장 크다. 현행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서는 해가 진 이후에는 옥외집회나 시위를 금지하고 있으나, 문화행사 등은 예외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촛불집회의 첫 번째 사례는 1992년 온라인 서비스인 코텔의 유료화에 반대하기 위해 온라인 사용자들이 모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2년 11월에는 미군 장갑차에 깔려 사망한 두 여중생의 추모집회가 열리면서 평화적 시위문화를 이끌었다. 또 2004년 3월에는 노무현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집회가 열려 탄핵을 주도한 한나라당이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참패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후 촛불집회는 야간시위의 주요방식으로 정착하면서 2004년 말 밀양지역 고교생의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 항의시위와 2004년 말에서 2005년 2월까지의 국가보안법 반대 시위가 촛불집회 형식으로 치러졌다.

직접민주주의로서의 촛불집회

촛불집회가 장기화·대규모화하면서 직접민주주의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2008년 소위 광우병 파동과 관련해서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 협상내용에 반대하는 학생과 시민의 모임에서 출발한 집회가 100일 이상 계속되었다. 중반부터 2개월간은 연일 수백에서 수십만 명이 참가했으며 7월 이후에는 주말집회로 이어졌다. 집회가 계속되면서 시민들의 요구는 4대강 운하 반대, 공기업민영화, 정권퇴진 등의 이슈로 확대되기도 했다.

한국의 촛불집회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2016년 10월 말부터 2017년 4월 말까지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과 관련해서이다. 소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고 불린 대통령 측근에 의한 국정농단 사태에 대한 국민들의 항의가 대통령 탄핵과 구속에까지 이어졌다. 23차에 걸친 평화적이고 대규모적인 촛불시위가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국민직접행동의 모범으로 찬사를 받았다.

2016년 9월에서 10월 사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선실세인 최순실 씨가 미르 · K스포츠재단 설립에 관여했다는 의혹에 이어 최 씨의 태블릿PC를 입수한 언론의 보도가 나오면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에 박근혜 전 대통령은 JTBC의 보도가 나온 지 하루만인 10월 25일 최 씨의 연설문 수정 사실을 일부 시인하는 내용의 1차 대국민 사과를 했고 10월 29일 국정농단 의혹을 규탄하는 첫 촛불집회가 열렸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 참모진의 전격 교체와 기습 개각을 단행하고 11월 4일 2차 대국민 사과를 내놓았지만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이 됐나 자괴감이 든다”는 담화 내용 등으로 더 큰 분노를 샀다.

집회 시위의 새 장을 열다

촛불집회가 23차례 진행되는 동안 한국 집회·시위 역사에서 신기원이 될 만한 일도 많았다. 참가인원이 처음으로 100만명을 넘어선 3차 집회(11월 12일) 때는 시민들이 4개 경로로 경복궁역까지 행진했다. 집시법은 청와대 100m 이내의 행진만 금지하고 있고 “집회·시위를 항의의 대상으로부터 떨어뜨리는 것은 집회·시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있었음에도 그동안 경찰은 광화문광장을 넘어서는 행진을 불허해왔다. 11월 26일 5차 집회 때는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까지 시위대가 진출했다. 전국적으로 232만명이 참가한 12월 3일 6차 집회 때는 드디어 법으로 보장한 청와대 100미터 앞까지 시위대가 진출할 수 있었다.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고 난 뒤부터는 대세가 기울었다는 여론 속에 집회 참가자가 다소 줄기 시작했다. 그러나 2016년 12월 31일 10차 집회에서는 누적 인원 1000만명을 돌파했으며 2017년 1월 7일 세월호 침몰 사고 1000일을 기념한 11차 때에는 정원스님이 분신하는 일도 발생했다. 또 1월 14일 12차 집회는 1987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던 중 사망한 서울대 학생 박종철 열사의 30주기를 맞아 체감온도 영하 13도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14만여 명이 참가했으며 7차 민중총궐기와 함께 열린 2월 25일 17차 집회에는 107만여 명이 참가해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안 인용과 특검 연장 등을 요구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선고가 내려진 3월 10일을 전후해서는 9일부터 11일까지 연속적으로 20차 집회가 열렸고, ‘촛불승리 축하콘서트’로 끝을 맺었다.

인터넷 세대의 개성을 펼치다

2016년 촛불집회는 처음에는 민중총궐기 투쟁본부에서 주최하고 이후 백남기 투쟁본부, 4.16 연대와 시민사회단체연대회 등이 함께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을 결성하여 집회를 주최했다. 그러나 이들 단체는 집회 신고와 중앙무대 가설 등 형식적인 측면에서 집회를 주관했을 뿐 집회 참가 시민들은 주최 측과 무관했으며 자발적인 참여 속에 나중에 가서는 스스로를 대표하는 깃발을 제작해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따라 민주노총이나 전교조 등 기존에 한국사회 저항운동을 대표하던 단체들의 깃발 외에도 개인이나 단체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깃발들이 갈수록 많아졌다.

한국의 촛불집회는 최초의 사례인 코텔 유료화 반대집회로 알 수 있듯이 인터넷 세대의 대두와 맥을 같이 한다. 1992년 촛불집회는 전화선을 이용한 모뎀을 통해 작동하던 PC통신 시절 소수의 사용자들이 주도했다. 그러다가 김대중 정부 시절 초고속인터넷망의 보급으로 사용자 층이 확대되면서 2002년 여중생 추모시위는 중학생들도 주요 참가자가 되었다. 또 2008년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시위는 인터넷이 생활의 일부가 되면서 ‘삼국카페’로 불린 소울드레서, 쌍코, 화장발과 안티MB카페 등 다양한 인터넷 카페 회원들이 초기 집회를 주도했다.

연인원 1천만명이 넘는 규모로 전개된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퇴진과 관련한 촛불집회는 SNS((Social Network Services)의 폭발적 성장에 힘입은 것이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SNS 사용자들은 실시간으로 집회상황을 공유하면서 시민들의 참여를 독려했으며 집회과정상의 문제점들이 SNS를 통해 공유되면서 해결책을 집단적으로 모색하기도 했다.

민주 시민으로서의 자신감을 키우다

촛불집회는 기존의 사회운동단체들이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일반시민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비폭력시위의 새 장을 열기도 했다. 비폭력 대 폭력의 논쟁이 매번 집회 때마다 이어졌지만 주부들이 유모차를 끌고 나오고 가족이 함께 참여하는 수가 많아지면서 비폭력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압도적으로 커질 수 밖에 없었다. 다수 시민들이 폭력적이라 지칭한 내용들이 사실은 경찰의 불법적인 집회 방해 행위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행위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한국의 촛불집회는 직접민주주의의 평화적 실험이라는 점에서 세계적인 찬사를 얻었지만 논란도 적지 않았다. 촛불집회로 표현된 ‘광장정치’의 승리는 거꾸로 정당정치의 실패로 해석되면서 대의민주주의의 위기로 해석되기도 했다. 이에 민심을 수렴하는 창구가 광장정치보다는 제도권 대의정치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가 하면 촛불집회의 요구와 에너지를 수용할 수 있는 대안정당의 설립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양한 평가와 논란에도 불구하고 촛불집회는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음에 틀림없다. 촛불집회는 참가자 각자가 집합적 군중을 넘어 직접민주주의 실현의 구체적 주체였음을 의미하는 일이다. 또한 촛불집회를 통해 해방감을 맛본 국민들은 이후 기존 체제의 모든 억압적 구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자기주장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촛불집회는 단편적 사회운동이 아니라 정보통신기술의 발전과 시민의식의 성장에 따른 복합적 사회현상으로 주권자적 지위를 확인하는 일이었으며 국민의 역사적 체험이 전면화하는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2016년 광화문 촛불 집회 / 사진 제공 남해선

관련항목

참고문헌

  • 촛불집회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촛불은 시작이다 : 2016-2017 천만 촛불 광장의 시』, b, 2017.
김인영, 『(2008년 촛불시위와) 프레임 전쟁』, 한국학술정보, 2011.
경향닷컴, 『촛불, 그 65일의 기억』, 경향신문사, 2008.


『촛불은 시작이다 : 2016-2017 천만 촛불 광장의 시』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과 부정부패에 분노하여 시작된 촛불집회를 기념하며 한국작가회의에 소속된 시인들이 자작 시를 모아 발간한 시집이다. 2017년의 촛불집회는 결국 한국 역사상 초유의 탄핵사태를 야기하였으며,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부도덕한 정권을 징벌하고 국민이 주권자임을 만천하에 확인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 원인과 배경이 되는 잡다한 사실을 습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국민들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러한 상황과 현실에 분노하게 되었는지, 왜 사람들은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서게 되었는지, 그 직전까지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였던 세대와 계층의 갈등이 왜 촛불집회 속에서는 하나로 어우러질 수 있었는지 그 감성과 느낌을 접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일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 감성과 느낌을 시로 전달해 주고 있는 책이다.

『(2008년 촛불시위와) 프레임 전쟁』은 2008년 이명박 정부 당시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하여 전국민적 반대 분위기 속에 벌어진 촛불집회의 양상과 그 이면의 이야기를 전달해 주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당시 사실을 보도하던 언론의 태도가 촛불집회에 참가한 국민들의 감정과 뜻을 왜곡하는 데 앞장섰고, 이것을 자극적으로 다루기에 급급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언론의 태도를 ‘프레임’이라고 규정하고 촛불집회를 사회 혼란과 책임, 국가의 이익, 법치라는 프레임에 가둬 그 본질적인 문제점을 호도하는 데 그쳤다고 보았다. 나아가 이미 촛불시위가 끝난 이후임에도 사회의 다양한 면면을 전달하고 비평해야 할 언론이 이러한 편향성을 보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무엇을 준비하고 노력해야 하는지 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촛불, 그 65일의 기억』은 이명박 정부가 등장한 이후 미국과의 한미 FTA 체결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해 일어났던 촛불시위와 집회가 진행됐던 65일간의 사실과 동정을 정리해 기록하고 있는 책이다. 당시 상황을 취재했던 언론사가 취재 기사와 사진들, 그리고 관련자들과의 인터뷰 등을 모아 전체적인 메시지를 제시하고 있다. 그들이 왜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는지, 노인과 소년소녀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어머니들, 그 다양한 사람들은 왜 촛불을 지피게 되었는지 생생한 인터뷰를 통해 기억을 되살려내고 있다. 촛불집회에 대한 기록이자 객관적인 사료의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는 책이다.


  • 효순이와 미선이 사건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미디어오늘, 『대한민국 프레임 전쟁 : 뉴스로 뉴스를 덮는 언론을 말하다』, 동녘, 2017.
심양섭, 『한국의 반미 : 원인.사례.대응』, 한울아카데미, 2008.


『대한민국 프레임 전쟁 : 뉴스로 뉴스를 덮는 언론을 말하다』는 대한민국의 언론이 보이고 있는 진실을 대하는 태도와 논조가 가진 문제를 비판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언론이 사회문제와 현상을 국민들에게 정확하게 알리고 그 본질적 문제와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함에도 한국의 언론은 그간 사실을 외면하고 하나의 프레임을 내세워 본질을 가리는 데 급급해 왔다고 보았다. 이 책은 2002년 미군 탱크에 의해 희생된 여고생 효순이와 미선이 사건 역시 단순한 교통사고, 한미동맹관계와 국익의 프레임 속에 본질을 외면하여 다뤄졌다고 비판하고 있다. 언론 문제점의 핵심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보도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둬야 할 언론의 어두운 면을 잘 짚어내고 있는 책이다.

『한국의 반미 : 원인.사례.대응』은 한국사회에서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는 반미감정과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심층적으로 분석해 내고 있는 책이다. 한국에게 미국은 혈맹이자 국익을 위해 가장 중요한 동맹국이라는 존재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미국에 대한 혐오감과 반감 역시 매우 뿌리 깊게 뻗어 있다. 미국이 동맹국 한국에 대해 그 위세를 내세워 일방적으로 대하는 모습들이 한국민들을 자극했기 때문인데, 저자는 2002년 있었던 효순이와 미선이의 사망사건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반미감정을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고 보았다. 효순이와 미선이 사건은 결국 우리나라 최초의 촛불집회를 야기한 사건이었으며, 이를 대하는 미군과 미국정부, 한국정부의 대응 역시 기존의 입장과 태도에서 다르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 최초의 촛불집회가 벌어지게 된 배경과 한국사회에서 반미감정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좋은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 광우병 파동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김기흥, 『광우병 논쟁』, 북하우스, 2009.
장은성, 『프리온 : 광우병의 정체』, 한국학술정보, 2008.


『광우병 논쟁』은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가장 극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광우병 논쟁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저자는 광우병이 발생하게 된 원인과 그 전개 과정, 그것이 가진 본질적인 문제점이 무엇인지 진단하고 그것이 인간의 육식에 대한 탐욕과 전세계적인 육가공 산업의 확산에 따른 문제였다고 지적하였다. 육식에 대한 탐욕은 비정상적인 육우 환경을 낳았고 이것이 다시 인간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결과인 인간광우병으로 돌아온 것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광우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반문하였다. 2008년 촛불집회는 결국 그러한 공포와 탐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었다는 점도 아울러 밝히고 있다.

『프리온 : 광우병의 정체』는 이명박 정부 초반 촛불집회를 야기했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와 광우병 파동의 실체를 분석하고 파헤친 책이다. 저자는 광우병 공포가 야기된 그 시작점이 무엇인지를 찾아보면서 한미 쇠고기 협정문에 어떠한 문제가 있었는지 확인하였다. 또 이에 대한 비판에 어용학자들이 국민들의 우려를 어떻게 기만하였는지 함께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문제점과 과정들은 결국 국민들에게 정부에 대한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되었고, 나아가 촛불집회를 통해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를 야기하게 되었다고 저자는 분석하였다. 식인종에게만 생기는 쿠루병과 인간광우병의 증상으로 알려진 크로이츠펠트 야콥병 등 광우병이 대중에게 두려움을 일으키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면서 그 실체를 분석하는 노력도 이 책은 놓치지 않고 있다.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광우병의 문제점과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많은 도움을 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