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시대부터 축적된 교육에 대한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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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시대부터 축적된 교육에 대한 의지

한국을 이끌어온 교육의 역사

한국은 전통적으로 교육을 중시해 왔다. 한국의 교육은 성공적인 경제적 성취의 근간으로 평가되며 경제성장의 원동력으로 인정받고 있다. 오늘날 OECD 국제학업성취도 평가에서 나타난 한국 학생들의 우수한 결과는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좁은 국토와 보유한 천연자원이 없었던 한국이 이와 같은 성장을 기록할 수 있었던 비결은 교육에 있었다는 데에 큰 이견은 없을 것이다.

교육에 대한 한국의 높은 관심은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 오랜 역사와 전통에서 찾을 수 있다. 372년 고구려는 최초의 국립 교육기관인 태학을 세웠으며, 이후 지방에도 경당이라는 학교를 세워 청소년들에게 유교와 무예를 가르쳤다. 신라화랑도를 만들어 인재를 양성하였고, 7세기경 삼국을 통일한 이후 신라에서는 국학을 세워 유교를 교육하고 관리를 양성하였다. 중국의 고대 역사서에 한국인들이 책을 사랑하고 밤낮으로 책을 읽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통해서 당시에도 교육에 대한 한국인의 관심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고려는 관리 양성을 위하여 중앙 교육기관으로 국자감을 설치하였다. 국자감에는 유학부와 기술학부가 있어 기술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지방에는 항교를 세워 지방 향리의 자제들이나 서민들이 교육을 받았다. 국가가 설립한 교육기관 외에도 개인이 유교적 지식의 습득과 교육을 위해 설립한 사학도 존재하였다. 사학은 최충(崔沖, 984~1068)이 세운 9재 학당에 이어 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11개의 사학이 설립되어 사학 12도라 불렸다.

조선의 체계적 교육 기관

고려의 학교 교육을 계승한 조선에서는 유교적 이념에 바탕을 둔 새로운 교육 체계를 만들었다. 고려 말에 만들어진 성균관조선이 건국된 이후 최고의 학부로 정착하여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를 양성하였다. 중등 교육기관으로는 수도 한양에 사부학당이 설치되었고 지방에는 향교가 설치되어 중등 교육을 담당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향교는 지방에 있는 모든 고을 329개소에 설치되어 전국적으로 유교에 관한 소양 교육을 실시하는 기반이 되었다.

성균관, 사부학당, 향교 외에도 초등 교육기관으로 서당이 있었다. 서당은 문자해득과 기초 유학에 관한 학습을 담당하였다. 서당은 중앙정부의 규제 없이 학문적 바탕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개설하여 교육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서당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지방의 유력자들이 경비를 부담하고 숙식을 함께 해결하는 가정교사로 훈장을 초빙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는 훈장이 자신의 집에서 서당을 열기도 하였고, 양반 계층에서 별도로 조직한 서당이 개설되기도 하였다. 서당이 없는 지역에서는 서원에서 한문 초급과정을 가르쳐 서원 부설 서당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유교를 바탕으로 한 소양 교육을 장려하였던 조선의 환경 속에서 서당은 지방민을 중심으로 자유롭게 운영되어 왔으며 19세기 근대적 교육이 도입되기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서당은 가장 보편적인 초등 교육기관으로 조선이 멸망한 직후인 1911년 기준으로 전국에 1만 6540개소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향교와 서원의 두 가지 역할

서당향교와 함께 조선시대의 교육․학문을 담당했던 서원이 있다. 국가가 설립한 향교와 달리 서원은 개인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향교성균관이 관리를 선발하는 국가시험인 과거(科擧)에만 치중한 것에 대한 반발로 선비들은 고요하고 한적한 곳을 찾아 학문에 정진하고 후학을 교육하기 위하여 서원을 만들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중앙 정치에 진출한 선비들이 정치적 갈등을 겪고 낙향한 후에는 재기를 위한 일종의 은둔처 역할도 하였다.

향교서원은 공부를 하는 곳과 존현(尊賢)의 제사를 지내는 곳, 두 가지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전국에 설치된 향교에서 공자를 비롯한 4성(안회, 증자, 자사, 맹자)에 대한 제사를 지냈으며, 향교의 규모에 따라 제사를 지내는 존현의 수가 증감되기도 하였다. 서원의 경우 서원이 설치된 지역의 주요 엘리트 또는 학덕이 높은 사람들을 기리는 제사를 지냈으므로 서원마다 제사 대상이 달랐으며 이는 지역적 특수성을 반영하였다.

한국은 고대 시대부터 유교적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지도자 또는 지배계층으로 활동하기 쉬운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유교적 이념에 따라 국가를 운영한 조선에 와서 더욱 강화되었다. 조선 건국 이후 국가적인 차원에서 학문 증진이 촉구되면서 상위 계층이 되기 위해서 교육열이 한층 강력해지는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교육이 지향하는 바와 내용은 변화하였으나, 교육을 중시하는 한국의 교육문화는 전통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한국의 교육은 오늘날 경제성장의 원동력 중 하나로 기능하였으며, 동시에 한국 문화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관련항목

참고문헌

  • 한국의 전통교육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최완기, 『한국의 전통교육』,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5.


『한국의 전통교육』에서는 전통시대 교육을 살펴보고 있다. 조선 시대 선비들이 가장 중요시한 것은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도리였다. 즉, 바른 사람이라면 옳고 그름이 분명해야 하고, 감정과 욕심을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이 사회적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진정한 교육의 길을 모색하며 지난날 우리 선조들의 교육 방침을 되새겨 보고자 했다. 2장에서는 서당과 향교의 교육을 다루었고, 3장에서는 서원과 성균관에서의 교육을 살펴보았다.


  • 서당의 교육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정순우, 『서당의 사회사』, 태학사, 2013.
노재찬 외, 『서당의 일상』, 신지서원, 2013.


『서당의 사회사』는 '서당'을 통해 조선 교육의 흐름을 읽어나간 연구서이다. 한국 교육의 발원지이지만 한국 사회에 근대 교육이 들어오면서 사라져간 서당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늙고 남루한 학문의 상징이던 서당을 치밀한 고증을 통해 사회ㆍ문화적으로 복원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서당에는 다양하고 풍부한 인문학적 자산과 교육적 혜안이 담겼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 교육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가능성도 발견한다.

『서당의 일상』은 소눌 노상직의 서당 일지인 『자암일록(紫巖日錄)』 해제이다. 백여 년 전 20세기 초 조선 서당의 교육 현장을 생생하게 수록한 기록물이다. 조선조 서당교육의 실제 현장 사정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 향교와 서원의 교육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강대민, 『한국의 향교연구』, 경성대학교출판부, 1992.
정순우, 『서원의 사회사』, 태학사, 2013.


『한국의 향교연구』는 고려시대 향교의 창설부터 제도, 조직, 교생, 재정적 기반, 교육적 기능, 사회교화적 기능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서원의 사회사』는 조선조 교육의 역사와 풍속을 고문서를 통해 살펴본 것이다. 서원을 통해 한국사회에서 학교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학교와 교육을 움직이는 그 문화적 힘의 정체는 무엇인가를 역사 속에서 찾아본 책이다. 고문서로 본 서원의 역사, 고문서를 통해서 본 교육과 사회변동, 학교의 제향공간과 교육문화 등의 내용을 다룬다.


  • 과거와 교육의 관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김경용, 『과거제도와 한국 근대교육의 재인식』, 교육과학사, 2003.


과거제도는 합리주의의 소산이었고, 우리가 지금 현재 가지고 있는 과거제도의 유산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지금도 과거제도의 정신은 어김없이 작동하고 있다. 그것은 업적주의이고, 사회적 공인주의이고, 여러 경로의 선택 가능성을 열어 놓고 그 사이의 이동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조선조 사회에서의 지위집단은 폐쇄적, 조작적 지위집단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 비조직적이었다는 특성을 가진다. 그러한 자발적·비조직성의 이면에는 도덕적 품성 도야를 포괄하는 능력주의가 깔려 있었다. 『과거제도와 한국 근대교육의 재인식』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해서 새로운 시각으로 과거제도를 조명하고 교육적인 성격을 도출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