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한국인의 저항
목차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한국인의 저항
강제로 맺은 을사늑약
1904년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한 일본은 한국 정부를 위협하여 강제 협약을 체결하고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일본은 제국주의 열강의 동의를 받기 위해 1905년 미국과 가쓰라-태프트협약을 체결하고 곧이어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맺었다. 또 러시아와 맺은 포츠머스조약으로 한국에 관한 독점적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후 일본은 한국 정부를 보호국으로 삼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를 한국에 파견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가 강하게 반대하자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곳곳에 무장한 일본군을 배치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고종과 대신들은 서명을 거부하였으나, 이토 히로부미는 그 중 5명의 대신의 찬성을 받아 조약을 체결하였다. 한국에서는 이 조약을 ‘을사조약’ 또는 ‘을사늑약’이라고 하며, 조약 체결에 찬성한 5명의 대신을 ‘을사오적’이라고 부른다.
을사조약에 따라 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박탈당하였다. 외국에 있던 한국 외교 기관이 전부 폐지되고 영국, 미국, 청국, 독일, 벨기에 등 주한 공사들은 공사관에서 철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서울에는 통감부가 설치되었으며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취임하였다. 통감부는 외교뿐 아니라 내정 면에서까지도 한국 정부에 직접 명령, 집행하게 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써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각계각층의 치열한 저항
이에 대해 한국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했다. 장지연이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발표하여 일본의 침략성을 규탄하고 조약체결에 찬성한 대신들을 공박하자, 한국인들은 일제히 일어나 조약의 무효화를 주장하고 반대투쟁에 나섰다. 민영환, 조병세 등은 죽음으로써 조국의 수호를 호소하였으며, 상인들은 가게 문을 닫고 학생들은 동맹 휴학으로 항의하였다.
일본 침략자와 을사오적 등을 처단하기 위한 활동도 꾸준히 전개되었다. 나인영과 오기호 등은 5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매국노를 처단하려 하였고, 이재명은 이완용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혔다.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장인환과 전명운이 일본의 침략이 정당하다고 주장한 스티븐스를 저격하였다(1908.3.). 전국 각지에서는 민종식, 최익현, 신돌석, 유인석 등이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고종은 조약 체결 4일 뒤 미국에 체재 중인 황실고문 헐버트(Hulburt. H.B.)에게 “총칼의 위협과 강요 아래 체결된 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이에 동의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이 뜻을 미국정부에 전달하기 바란다.”고 통보하며 이를 선포하라고 하였다.
또한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1907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와 이미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한 열강의 비협조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오히려 일본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을 체결하였다. 일본인 관리를 대한제국 정부의 차관으로 임명하고 통감부가 내정을 직접 지배하였다. 이어서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였다.
목숨으로 맞선 의병들
서울과 지방에서 해산된 군인들은 대거 의병에 가담하였다. 자연히 의병의 전투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무장한 의병들은 본격적인 의병 전쟁 형태로 저항을 강화해 나갔다. 계속해서 유생과 농민, 상인과 군인 등 전국에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하며 의병 세력은 점차 확산되었다. 지역 의병이 서로 연합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항일 의병 투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는 1908년과 1909년으로 두 해 동안 1000여 차례 이상의 전투가 벌어졌다. 의병들은 하루빨리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려는 일본의 의도를 목숨을 걸고 막아내었다.
1909년 7월 일본 내각회의는 비밀리에 한국을 완전한 식민지로 병탄하기로 의결하고 일본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 이와 동시에 일본군은 9월부터 2개월간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을 실시하여 의병과 민간인을 학살하고 마을을 통째로 불태우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의병과의 전쟁을 끝낸 뒤 한국을 병합하려 한 것이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인 의병장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의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토의 하얼빈 방문은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한반도 및 만주 문제를 협의하는 회담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안중근은 ‘대한제국의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 죄,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식민화를 꾀하며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등 15가지 조항을 들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재판정에서 그는 “개인의 사사로움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서 대한의 독립 주권을 침탈한 원흉이자 동양 평화의 교란자인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하였다. 나는 살인자가 아니니 전쟁 포로로 대우해 달라”며 당당하게 재판에 임하여 일본인들도 놀라게 하였다.
1910년 3월 26일 일본은 안중근을 처형한다. 이어 6월에 한국의 경찰권을 가져간 후 대한제국을 완전히 병합하기 위해 친일 단체인 일진회를 앞세워 합방 청원서를 제출하게 하였다. 마침내 일본은 군대와 경찰을 곳곳에 배치한 가운데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의 이름으로 이른바 한일병합조약을 조인하였다.(1910.8)
불법으로 점철된 강제 조약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하기 시작한 한일병합조약은 처음부터 불법이며, 원천 무효의 것이었다. 1905년 체결된 을사조약은 국가 간의 조약으로서의 기본적인 형식조차 갖추지 못했다.
조약의 이름이 없으며, 고종으로부터 위임장을 받지 않은 외무대신의 직인으로만 체결되었다. 고종은 이를 승인하지 않았고 비준 절차도 갖추지 않았으므로 국제법상 효력이 없는 불법 조약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뒤 일제의 통감 및 통감부가 주체가 된 정책과 조약은 모두 효력을 상실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일병합조약이 한국 황제 및 정부의 자발적 의사로 이루어지지 않고, 일제의 군사적 점령과 강제 하에서 강요되어 체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일제의 병합은 의병 투쟁에 나섰던 한국인 1만 7600여 명을 학살하고 그보다 훨씬 많은 한국인을 구속하는 폭력 위에 이루어진 것이다.
관련항목
참고문헌
- 일제강점기 의열투쟁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 김영범, 『혁명과 의열 : 한국독립운동의 내면』, 경인문화사, 2010. |
• 오영섭,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 14 - 한말 순국, 의열투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 한국민족운동사학회, 『의열투쟁과 한국독립운동』, 국학자료원, 2003. |
『혁명과 의열 : 한국독립운동의 내면』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사를 ‘혁명’이란 카테고리로 정리해내고자 한 책이다. 저자는 이 시기 한국의 독립운동은 단순한 일제의 강점에 대한 독립의 요망일 뿐만 아니라 전근대 사회 조선에서 근대국가로 새로운 건국과 그 이행을 위한 노력과 움직임이었다고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당시의 의열투쟁의 내용과 사실 못지않게 그 내면을 구성하고 있는 혁명적 사상과 그 인식에 주목하고 책을 서술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를 ‘신국가건설’의 일환으로 소개하면서 그 적극적인 방법론 가운데 의열투쟁이 존재한다고 전제하고, 그 맥락을 이어가는 오랜 기간의 투쟁과정과 단체 및 개인의 의열활동을 자세히 소개하였다. 특히 제9장에서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의열활동을 훼손시키려는 의도에서 이를 ‘테러’로 규정하려는 관점과 관련하여 의열과 테러가 어떻게 구분되고 그러한 관점이 어떤 측면에서 비판받아야 하는지를 함께 제시하여 주목된다.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 14 - 한말 순국, 의열투쟁』은 제국주의 일본의 침탈이 거세지는 가운데 조선의 민중이 보인 ‘순국행위’에 초점을 맞춰 내용을 정리하였다. 순국은 일제의 야욕에 맞서는 또 하나의 의열투쟁이었다고 역설하면서 조선의 민중이 결코 일제의 강점과 통치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결의를 보이고자 했던 의지의 표현이었음을 강조하였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민영환과 최익현 등 몇몇의 사례만으로 접했던 순국과 의열투쟁의 사례들을 매우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어 그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의열투쟁과 한국독립운동』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을 위해 활약했던 각종 의열투쟁의 사례를 심도 있게 분석하여 연구해낸 성과를 모아 정리한 책이다. 이봉창과, 윤봉길 등 잘 알려진 의열투쟁을 주도했던 한인애국단의 활동 내용과 그 성격, 그 외 북경지역에서 활동했던 다물단 등 개인의 의열투쟁뿐 아니라 그 조직의 성격과 내용 등을 자세히 다루고 있어 주목된다. 특히 일반 논문으로 일본의 정세와 의열투쟁을 바라보는 시각 등을 분석한 성과들도 함께 포함하고 있어 다각도의 시야를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 의병활동과 전통 유학자들의 대응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 홍원식, 『동도관의 변화로 본 한국 근대철학』, 예문서원, 2016. |
• 권오영, 『근대이행기의 유림』, 돌베개, 2012. |
• 불함문화사, 『한국사상논문선집-한말 이후 유림의 항일운동』, 불함문화사, 2001. |
『동도관의 변화로 본 한국 근대철학』은 개항기 유림들의 가장 대표적인 시대관이었던 동도서기론을 중심으로 유림들의 사상적 변화와 그 활동의 양상을 규명하고자 한 책이다. 동도서기론은 기존 동양사회의 가치관과 인식의 틀을 유지한 채 서양의 기술문명을 수용하고자 한 보수적 태도를 지칭하는 것이다. 위정척사론의 대두와 함께 개항기와 일제강점기를 목도한 유림들의 대외적 인식과 활동의 면면을 설명하는 가장 핵심적인 개념어이다. 조선후기 성리학의 사상적 발전과 그 전승은 이론적 심화를 거듭하였고,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된 서구물질문명의 충격에 조선의 유림은 동양의 정신문화로서 성리학적 인식과 사상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따라서 각 학문집단을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과 대응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에는 성리학적 관점에서 벗어나 보다 유연한 태도를 취하는 집단들도 나타났다. 저자는 이 시기 유림들의 인식과 활동이 전근대 성리학에서 근대 사상으로 자연스럽게 변화하고 이행하는 과정이라고 보고 그 양상의 면면들을 정밀하게 소개하며 분석하고 있다. 근대와 단절된 것으로 이해하기 쉬운 전근대 학문세계와 유림에 대한 오해를 벗어버리기에 좋은 내용들을 담고 있다.
『근대이행기의 유림』은 그간 개항기와 일제강점기 유림들의 활동과 관련해 의병활동 위주의 정치적 행보를 중심으로 접근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전통적인 성리학 사상의 연장에서 그것이 그들의 학문활동의 일환임을 정밀하게 밝히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탄탄한 성리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근대 유림으로 활동하던 다양한 유학자들의 활동 면면을 살피는 가운데, 그들이 단순한 정치활동에 나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행합일이라는 성리 사상의 덕목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자 한 학문활동의 연장이었음을 강조하였다. 특히 근대 유림들이 보인 다양한 활동 양상이 항일과는 다른 은일의 방향도 존재하지만 이것 역시 유학적 관점에서의 대응이었음을 언급하면서, 근대 유림의 활동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학문과 사상적 인식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함을 밝혔다. 무엇보다 사상사의 측면에서 성리학 사상의 전승과 발전이라는 관점을 바탕에 두고 일제강점기 유림의 활동을 역사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학자 집단으로서 유림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지식들을 충실히 전달해주고 있다.
『한국사상논문선집-한말 이후 유림의 항일운동』은 제국주의 일본의 침탈에 대응해 유학자들의 항일 운동의 양상과 그 내용들을 정리한 책이다. 전통적으로 조선사회에서 유학자들은 국난이 닥쳤을 때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의병을 조직해 맞서 싸워왔다. 한말 일본의 침탈 앞에서도 역시 유학자들은 결연하게 일어나 항일활동을 전개했는데, 의병뿐 아니라 국제사회에 문서를 작성해 그 부당함을 알린다든지, 순국으로 그 의지를 밝힌다든지 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조선의 유학자들을 망국의 책임을 지닌 폐족으로 폄훼하는 사례가 많은 상황에서 한말 국난을 맞은 유림들의 적극적인 항일운동의 사례들을 살펴봄으로써 그 인식을 전환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책이다.
- 애국계몽과 실력양성운동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 이송희, 『대한제국기의 애국계몽운동과 사상』, 국학자료원, 2011. |
• 조동걸, 『한국계몽주의와 민족교육』, 역사공간, 2010. |
• 신용하, 『한말 애국계몽운동의 사회사』, 나남출판, 2004. |
『대한제국기의 애국계몽운동과 사상』은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진행된 애국계몽과 실력양성운동을 전반적으로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이 시기 피식민지 조선의 독립과 자강이 가능하려면 민족의 역량의 증진이 필수적임을 인식하고 적극적인 민중계몽운동에 앞장선 다양한 단체와 인물들의 활동 양상을 세세히 소개하면서 그 의미와 내용을 분석하였다. 특히 당시 애국계몽운동은 서구의 사회진화론이 수용되면서 나타난 결과라고 보고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당시 사회진화론이 어떻게 수용될 수 있었으며, 그 성숙과 전개의 양상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명확히 이해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때 1920년대 이후 집중적으로 출현하는 각종 애국계몽단체들을 사회진회론적 사상에 입각하여 체계화 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저자는 각종 애국계몽단체들의 활동을 밝힘과 동시에 그 이면과 한계 등도 함께 다루고 있어 균형감 있는 이해를 돕기에 충분하다.
『한국계몽주의와 민족교육』은 일제강점기 애국계몽과 실력양성 운동에 관련해 교육적 관점에서 접근하여 분석을 시도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이 시기 민족계몽 활동과 관련해 주로 애국계몽 단체의 활동과 그 내용을 중심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실력양성운동’으로 규정된 이와 같은 접근을 벗어나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당시 서양 근대 사상의 수용과 그 대응을 ‘계몽주의’로 규정하고 이를 민중에게 보급하고 교육하기 위한 활동 전반을 모두 포괄하여 계몽으로 인식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를 위해 근대적 교육활동과 민족교육의 양상을 애국계몽과 실력양성 운동의 확장으로 해석하여 분석을 시도하였다. 특히 저자는 해외에서 진행된 교포들에 대한 민족교육 역시도 이 범주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보고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양상을 더욱 적극적이고 포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른바 ‘계몽주의’에 입각한 일제강점기 민족계몽과 교육을 전반적으로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책이다.
『한말 애국계몽운동의 사회사』는 일제강점기 일본의 강압적이고 수탈적인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루기 위한 지식인들의 노력과 민중계몽의 활동 양상을 정리해 분석하였다. 애국계몽운동에 대해 실력양성을 위한 소극적인 움직임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 책에서는 애국계몽운동을 사회사적 관점에서 접근하여 민중에 대한 각성을 유도하여 역사발전과 추동을 위한 토대가 될 수 있는 주체로 탈바꿈 시켜 나가려고 했다는 측면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1910년대 전후로 활발하게 등장하는 다양한 애국계몽 단체의 활동과 내용을 자세히 소개함으로써 한민족의 저항 양상을 폭넓은 시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