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과 번영의 이름, 대한민국
영광과 번영의 이름, 대한민국
대한민국임시정부 계승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는 1919년 제국주의 일본으로부터 한민족의 독립을 주도했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이래로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은 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계승하였음을 헌법에 명시하면서 그 정통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과정은 험난함의 연속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중국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해방된 이후에도 대한민국은 미국과 소련의 분할점령에 따라 분단을 경험하였고, 그들의 신탁통치를 받아야만 했다. 최장 5년간으로 약속된 신탁통치는 한민족의 독립정부 수립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결국 남북한 분단은 광복 후 7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냉전의 대립 속에 남한과 북한에는 각자 미국과 소련이 지지하는 이념의 정부가 수립되었고, 남한에도 1948년 8월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을 대통령으로 하는 단독정부가 세워졌다. 그리고 이 남한 정부는 헌법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계승하였음을 분명히 천명하였다.
4.19혁명이 몰아낸 부정부패
그러나 이 정부는 곧 대대적인 전쟁의 참극에 직면하게 되었다. 바로 한국전쟁(1950-1953)이었다. 그리고 전쟁 이후, 폐허가 된 한국에는 계속해서 미군이 주둔하였다. 모든 것이 파괴되어 황폐해진 상태에서 미국은 대한민국을 후원하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당시 경제적으로 북한에 비해 한참 뒤쳐진 대한민국은 미국의 원조로 식량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그들의 지원으로 경제적인 기반을 조성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그 속에서 부패해갔다. 미국의 원조를 통해 얻어지는 많은 경제적 이익들을 개인적으로 착복하는가 하면, 권력을 연장하기 위해서 많은 불법을 저질렀다. 이승만 정부의 부정부패는 급기야 선거 결과를 조작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거대한 민중봉기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것이 곧 4.19혁명이다. 그 결과 이승만은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나 하와이로 망명하였고, 곧 바로 사망하였다.
쿠데타로 빼앗긴 민주주의
4.19혁명 이후 등장한 민주정부는 곧바로 1961년 박정희(朴正熙, 1917~1979)가 일으킨 5.16 군사쿠데타로 무너졌다. 그리고 박정희는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된 이후 18년간 권력을 독점한 독재자로 전락하였다. 그는 자신에게 유리한 내용으로 헌법을 고쳐가면서 대통령의 자리를 유지하였다. 마침내 선거 없이도 영구히 대통령직을 유지할 수 있는 내용으로 헌법을 바꾸었다. 바로 유신헌법이었다. 간혹 자신에게 불리한 시국이 조성되거나 시민들의 반대 분위기가 높아질 때는 종종 계엄령을 선포하여 이를 억눌렀다.
경제개발계획과 새마을운동
박정희는 자신의 도덕적 한계가 뚜렷한 만큼 그 약점을 가릴 수 있는 업적이 필요했다. 때문에 그는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에 적극적으로 매달렸다. 그의 정책은 당시까지 농업중심의 경제구조에 놓여있던 경제 체질을 근대적 산업국가 구조로 탈바꿈시키는 것에 집중되었다. 따라서 이를 위한 여러 기반 시설들을 구축하는 데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다. 도로, 공장 및 주택 건설과 같은 도시의 근대화뿐만 아니라 농촌 근대화를 표방한 새마을운동은 그의 대표적인 정책이다.
박정희 정부는 이렇게 조성된 산업적 결과물들을 적극적으로 해외에 수출하여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을 이루려고 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출의 역량을 지닌 기업들을 국가가 적극적으로 보조하고 장려하여 그 규모를 키움으로써 한국 경제의 기반을 형성한다는 논리 하에 이른바 대기업과 재벌이 탄생할 수 있었다. 이로써 한국경제의 구조는 정부 주도의 수출중심, 대기업 중심의 기형적인 경제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민주주의를 유보하고 얻은 경제성장
박정희 정부는 경제적인 성장과 산업의 근대화라는 측면에서는 눈에 보이는 성과를 만들어 내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농업사회에서 근대적 산업사회로 변화할 수 있었고, 빠른 경제 발전은 인구의 증가와 도시화로 이어져 경제적인 풍요를 낳았다. 일부에서는 박정희 정책 덕분에 수천 년 간 이어져온 가난과 굶주림에서 우리 민족이 해방될 수 있었다고 칭송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독재와 반민주, 인권에 대한 탄압이라는 그림자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시민의 자유에 대한 억압, 인권에 대한 외면, 독재에 방해가 되는 야당과 언론의 억압과 말살, 심지어 선거에 대한 조작과 각종 정치적 공작 및 법적 절차를 무시한 사법살인까지 박정희 정부의 그늘은 너무나 깊었다. 그 결과 박정희는 1979년 대대적인 민중의 저항이 일어나던 즈음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 1926~1980)에게 암살당하였다. 이로써 17년에 걸친 장기간의 독재는 막을 내리는 듯 했다.
다시 쿠데타, 또 독재자
그러나 전두환(全斗煥, 1931~2021)이 또 다른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으면서 등장하여 독재는 다시 연장되었다. 전두환은 1980년 스스로 대통령에 올라 박정희의 유산을 기반으로 그의 뒤를 그대로 따라갔다. 그는 1980년 광주에서 발발한 독재에 반대하는 거대한 민중봉기를 대학살 수준으로 진압하여 무마시켰다. 그리로 이를 북한의 간첩들이 남한을 공산화시키기 위해 선동한 폭동으로 조작하여 이에 동조했던 자신의 정치적 반대파들까지 체포하고 억압하였다. 그 역시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많은 불법을 자행하였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전자산업 및 자동차 산업의 발전으로 대한민국의 경제는 계속 발전할 수 있었다. 전 세계적인 호경기로 전두환 정부 당시 대한민국의 경제는 매우 안정되고 빠른 성장세를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이로써 그는 경제적인 안정과 성과를 내세우며 자신의 정치적인 약점을 만회하고자 하였다. 그러면서도 전임자인 박정희와 같이 영구집권을 추진하지 않겠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7년 단임제로 헌법을 개정하여 임기 만료 후 스스로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약속하였다.
전두환 대통령은 2021년 노태우가 10월 26일에 사망한 지 정확히 4주되는 11월 23일에 사망했다.
6월 민주화 항쟁
하지만 전두환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슬그머니 기존 헌법을 계속 유지해 나갈 것을 천명하기 시작하면서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전두환의 호헌조치에 반발한 시민들은 1987년 학생과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시위를 일으켰다. 시위를 통해 시민들은 7년 단임제 이후 국민들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는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에 대한 약속을 이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전두환은 굴복하였고, 당초 개정한 헌법의 내용대로 1988년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이후 대통령에 대한 직접 선거와 민권을 보장하는 다양한 내용이 추가된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다.
그 첫 번째 선거가 치러진 1988년, 20여년 만에 국민들의 손으로 직접 뽑은 대통령으로 전두환의 후계자였던 노태우(盧泰愚, 1932~2021)가 선출되었다. 노태우 정부는 당시 공산진영의 몰락으로 중국과 소련을 위시한 공산국가가 민주화되던 상황에서 적극적인 북방정책을 추진해 그들과 수교하였고 대한민국의 외연을 넓혀 나갔다. 또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남한과 북한이 UN에 회원국으로 동시 가입함으로써 국제 사회에서 그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
민주화에 대한 약속을 이루며 최초로 직선제로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은 2021년 10월 26일에 생을 마감했다.
김영삼 정부의 명암
노태우에 뒤이어 1993년에는 김영삼(金泳三, 1927~2015)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인 출신 대통령이 아닌 민간 정치인 출신임을 내세운 김영삼은 박정희 정부 때 오랜 기간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주도했던 인물로 명성이 높았다. 그는 오랜 군인통치의 구조와 환경을 개선하려 노력하였다. 박정희 이래로 오랜 기간 존재하였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하고, 금융실명제를 실시하여 경제구조를 투명하게 하는 등 여러 업적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정권 말 국가의 외환보유액 문제가 채무 불이행으로 이어지는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끝내 대한민국은 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하는 초유의 사태를 경험한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IMF의 요구에 따라 여러 경제적 조치들을 감내해야만 했고, 많은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무너졌으며, 중산층들은 크게 타격을 입어 사회적인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민들이 거국적인 금모으기 운동을 전개한 끝에 대한민국은 2년 만에 IMF 구제금융 부채를 상환함으로써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1998년 김영삼 정부에 이어 등장한 김대중 정부는 전 정부가 남긴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정책들을 시행하여 일정부분 성공을 거두었다.
김대중 정부, 획기적 남북관계 개선
김대중 정부에서는 특히 남북 간의 관계가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우선 무려 30년 만에 맞이한 정권교체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김대중 대통령이 비행기를 타고 직접 평양으로 가 당시 북한의 지도자였던 김정일과 정상회담을 진행하였다는 점에서, 한국전쟁과 냉전의 긴장 속에 지내왔던 남북 관계를 일거에 불식시킬 만큼 역사적 장면들을 연출해냈다.
남북은 함께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하여 향후 남북의 화해와 협력 및 통일을 위해 점진적으로 노력해 나갈 것을 합의하였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 내내 다양한 방식과 채널을 통해 그 물꼬를 트기 위한 노력이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그 다음 등장한 노무현 정부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새로운 지지세력, 새로운 정책 방향
2002년 역사상 최초로 이른바 디지털 지지자라고 할 수 있는 ‘노무현을 사랑하는 시민들의 모임(노사모)’의 열풍을 등에 업고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였다. 그는 당시 한참 발전해가는 대한민국의 인터넷과 정보통신이 만들어낸 대통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권변호사 출신의 정치인 노무현의 당선은 그 활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모인 뒤 점차 규모가 확산되자 오프라인 활동으로 이어지면서 큰 지지세력으로 성장하여 이뤄낸 결실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그간 대한민국 사회가 고민하고 있던 권위주의와 기회주의를 비판하고, 당면한 계층구조, 계급구조, 미국 일변도의 외교정책 등을 다양한 측면에서 개혁하고자 하였다. 또 북한과의 관계에서도 이전 김대중 정부를 계승하여 화해와 협력의 관계를 지속해 나갔다. 그 결과 개성지역에 남과 북이 합작해 운영하는 대규모 공단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이후 남북간의 경제협력은 남한의 기업과 북한의 노동자가 협력하는 형식으로 다양하게 추진되었다.
CEO출신 대통령
2007년에는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였다. 그는 성공한 CEO 출신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서울시장을 역임하면서 그 정무 능력을 높게 평가받던 인물이다. 이 때문에 그는 노무현 정권 말기 경제정책의 실패에 따른 실망과 그 회복에 대한 열망에 힘입어 대통령에 선출될 수 있었다.
그는 4대강에 운하를 건설하여 혁신적인 물류와 교통수단으로 개발해 내겠다는 공약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여론의 반대로 단순하게 4대강의 수역을 정비하는 수준으로 정책을 수정하였다. 또 미국과 한미 FTA를 체결해 세계 최대인 미국시장에 적극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어 자원외교를 표방하면서 중동과 남아메리카에 적극적인 투자를 진행하여 일정한 성과를 얻었다고 공언하였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으로 개성에서 운영되던 개성공단 규모는 대폭 축소되었다. 그러면서 북한과의 협력과 교류를 중단하는 대북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이전 정부가 구축한 남북간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를 한 순간에 좌절시켜버렸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박근혜와 최순실
이어 2012년에는 박근혜가 대통령에 선출되어 주목을 받았다. 박근혜는 바로 독재자 혹은 경제발전 기여로 평가가 엇갈리는 박정희의 장녀로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여자 대통령이자, 역사상 최초의 부녀 대통령이라는 이야깃거리를 낳으며 화려하게 출범하였다.
그는 국가의 문화수준을 높이고 대한민국의 품격을 높인다는 의미에서 문화융성을 내걸고 다양한 문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어 경제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경제정책과 세금정책을 추진해 여론으로부터 친기업적 정부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재임 기간 발생한 세월호 사건과 메르스 사태와 같은 국가의 재난 상황에 대해 효과적이고 적절한 리더쉽을 발휘하지 못해 많은 비난과 비판을 받았다. 특히 임기 말 불거진 최순실 게이트는 그가 국민의 위임을 통해 일하는 정부의 수반이 아니라 개인의 영향력 속에서 특정한 이익만을 추구하는 문제의 인물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기에 이르렀다.
촛불이 견인한 탄핵과 정권 교체
그 과정에서 소통과 통치력 부재의 정황이 드러나고, 그 빈자리를 제3의 인물들이 대신 행사해 왔음이 밝혀져 국민들의 거센 분노를 낳았다. 이에 국민들의 분격은 2016년 10월부터 수개월에 걸친 촛불집회로 이어졌고, 정권 반대와 퇴출의 목소리가 거세게 분출되었다. 결국 박근혜는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탄핵소추안 인용을 통해 대통령직에서 탄핵되고 말았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대한민국 역사상 초유의 사태였으며, 촛불집회라는 평화적 시외를 통해 이뤄낸 결과라는 점에서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박근혜의 탄핵으로 새로운 대통령 선거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2017년 5월 노무현 정부 시절 비서실장을 역임했던 인권변호사 출신 정치인 문재인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숨 가쁘게 달려온 대한민국
대한민국은 36년간의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식민지배와 수탈을 경험하였고, 해방 이후 1950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온 국토가 폐허와 잿더미에 뒤덮이는 절망을 경험하였다. 1950년대 대한민국의 생산 수준은 1인당 GNP 50달러 수준으로 당시 아프리카 최빈국에 해당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이후 근면함과 성실함을 발휘하여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문화적으로도 놀라운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1988년 개최된 서울올림픽은 한참 발전하는 대한민국의 위상과 면모를 전 세계에 알리고 소개하였다는 데 의미를 둘 수 있다. 당시까지의 올림픽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가 참가하였다는 점과 더불어 냉전의 대립으로 각 진영 간 참여를 견제해오던 상황에서, 서울올림픽에서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뿐만 아니라 북한까지도 참가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더욱 깊다고 할 수 있겠다.
또 2002년 한일월드컵의 개최는 또 한 번 대한민국의 위상과 저력을 세계에 자랑한 뜻 깊은 대회였다. 당시까지 월드컵에서 한 번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던 대한민국 축구팀은 예선에서의 미국전 무승부를 제외하고 전승을 거두며 월드컵 4강에 올라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특히 1997년 IMF 구제금융신청 이후 침체돼있던 국민들의 정서를 환기시키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심어주었다는 점에서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의 성과는 매우 컸다. 이어 최근에는 그동안 준비해온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을 진행하여 무사히 올림픽을 마쳤다. 2020년에 범유행전염병으로 지정된 코로나-19 이전에 치뤄진 마지막 하계/동계 통틀어 진행된 올림픽이다. 그 다음 치뤄진 도쿄올림픽은 코로나-19 범유행의 영향으로 1년 연기되었다.
문화강국, 정보강국을 향하여
그간 전자산업과 자동차, 조선 등과 같이 제조업과 중화학공업 위주에서 큰 성과를 보였던 대한민국은 이제는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활용한 문화산업으로까지 산업영역을 확장해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른바 ‘한류’라는 분위기가 아시아를 넘어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을 거쳐 전 세계에 불기 시작하였다. 대한민국이 제작하는 드라마와 음악, 게임과 같은 문화콘텐츠는 대한민국의 경제를 지탱하는 매우 주요한 산업으로 발전하였다.
이제 대한민국은 그간 성장의 기반이었던 제조업 구조를 확장하여 더욱 공고히 하는 한편, 현재의 정보화 단계를 한층 발전시켜 문화콘텐츠를 활용한 융합적인 구조로의 변화와 발전을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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