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를 닮은 기상, 발해
고구려를 닮은 기상, 발해
발해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 걸쳐 옛 고구려의 영토를 넘어 한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나라이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면서 대동강 이북의 고구려 옛 땅을 당나라에게 빼앗겼는데 이후 발해가 그 땅을 회복하고 나라를 세운 것이다. 이 시기 남쪽과 북쪽에 각각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함께 공존할 수 있었다 하여 이를 ‘남북국시대’로 칭하기도 한다.
해동성국의 자신감
발해는 옛 고구려 장수 출신인 대조영(고왕, ?~719)이 천문령 전투에서 당나라를 물리친 이후 진(震)이라 칭하며 나라를 세웠고, 이후 762년에 국호를 발해로 고치면서 확립되었다. 이후 무왕 때 대대적인 영토 확장이 이루어져 북쪽으로 흑룡강과 남쪽으로 신라의 국경선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며 스스로 강대국임을 자임하였다. 특히 732년 장군 장문휴(張文休)로 하여금 당나라 등주를 공격케 할 만큼 국력에 대한 자신감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무왕에 이어 즉위한 문왕은 문치(文治)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당나라의 제도를 기준으로 국가의 통치제도를 정비해 나갔다. 또 신라와의 교통로인 신라도를 개설하면서 수도를 중심으로 한 기반시설 등도 정비해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발해를 황제국의 반열로 격상시키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발전상을 두고 발해의 제 10대 선왕 때에는 당나라마저도 ‘해동성국’이라 칭송하며 인정하였다.
고구려의 후예
발해의 통치제도는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면서도 독자적인 칭호와 관청을 세워 운영하였고, 대외적으로는 고구려를 계승한 후예로 자칭하면서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분명히 내세우고 있다. 특히 발해의 무왕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 발해가 ‘고구려와 부여의 땅을 모두 회복했음’을 선언하기도 하였고, 문왕 역시 일본에 사신을 보내며 국서에 ‘고려의 국왕 대흠무’라고 표현하였다. 발해의 왕이 스스로 고구려의 왕이라고 칭했다는 것은 그만큼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강렬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인 셈이다.
한편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은 문화 유적과 유물 등에서도 확인이 된다. 문왕의 둘째 딸인 정혜공주묘의 조성 방식은 굴식 돌방무덤으로 전체 구조와 천장을 모줄임 방식으로 조성하였다. 이것은 전형적인 고구려의 고분 조성 방식이라는 점에서 그 계승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심지어 당나라 문화의 영향으로 조성되었다고 알려진 문왕의 넷째 딸 정효공주묘 역시 당나라 방식과 고구려 방식이 융합된 형태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적극적 문화 수용 정책
이 밖에 발해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불교 유물의 경우 불상의 상당수가 같은 시기 당나라의 양식보다 좀 더 이른 시기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또 지붕을 덮었던 막새기와는 전형적인 고구려 양식이었다는 점에서 당나라의 영향보다는 고구려의 문화적 영향을 기반으로 그 전통을 계승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당나라와 문화적으로 활발하게 교류하였고 다수의 유학생들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빈공과에 합격시키기도 하였다. 같은 시기 신라도 당나라에 유학생을 보내 적극적으로 선진 문물을 흡수하려 노력하였는데, 이 때 발해와 신라는 서로 실력을 경쟁하기도 하였다. 특히 문왕 대에는 적극적인 문화정책을 시행하면서 이러한 양상은 더욱 두드러졌다.
그 결과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무덤 지문에서 보듯이 유교 경전과 사서의 내용이 언급된 화려한 변려체 문장이 구사될 수 있을 만큼 발해의 문화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처럼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강한 인식 속에서 중국과의 적극적인 문화교류를 통하여 높은 수준의 문화와 강성한 국력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발해의 역사 귀속 문제
그러나 10세기에 5대 10국 시대로 접어들면서 북방의 거란족이 발흥하여 발해를 침략하였고, 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발해는 926년 멸망에 이르고 말았다. 발해가 멸망한 이후 그 유민은 당나라에 흡수되거나 남하하여 고려에 투항하였다. 남북국시대의 두 나라를 모두 통합한 고려는, 이로써 진정한 의미의 민족 통일을 이루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발해는 고구려 계통의 지배계층과 말갈 계통의 피지배계층으로 구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통해 발해 역사가 어느 나라 역사로 귀속되어야 하는 문제가 관련 국가들 간 치열한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다만 고구려 자체가 말갈 및 북방의 유목민족들을 포함한 다민족 국가였으며, 발해의 고고학 발굴 자료들이 고구려의 문화를 토대로 토착문화와 당나라의 문화가 융합된 복합적인 문화임을 증명하고 있는 만큼 보다 총체적인 측면에서 고구려와의 계승성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관련항목
참고문헌
- 발해와 고구려의 연관성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 서병국, 『발해제국사 :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인 34가지 증거』, 한국학술정보, 2010. |
• 고구려발해학회, 『고구려와 발해 문화의 특성과 상관성』, 고구려발해학회, 2008. |
• 정진헌, 『고구려와 발해의 계승 관계』, 고구려연구재단, 2005. |
『발해제국사』는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가인 이유를 34가지 항목으로 나눠 다루며 논증하고자 하였다. 이 책은 발해의 주민구성에서 말갈족을 부각시키려는 사료에 일정한 의도가 반영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발해 주민 대부분은 고구려계라고 설명하였다. 또 당대 주변국가들이 모두 발해를 고구려 계승국으로 인정하고 있었으며, 발해의 문화 전반에 걸쳐 고구려의 문화를 이어받았거나 계승 발전시킨 것임을 주장하고 있다.
『고구려와 발해 문화의 특성과 상관성』은 고구려와 발해의 상관관계를 밝히기 위해 열린 학술대회의 자료집으로 두 나라의 문화적 계승성을 이해하기 위한 전문 지식과 학계의 동향을 이해하기에 좋은 자료이다. 특히 이 자료집에서는 발해 유적에 대한 북한과 중국, 러시아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가 소개되는 한편 발해의 언어와 축성방식, 신라와의 교섭 양상을 통해 그 계승성을 규명하고 있어 흥미롭다.
『고구려와 발해의 계승 관계』는 발해의 고구려에 대한 계승성을 대부분 문화적 측면으로 접근하려는 성향이 큰 가운데 발해의 강역, 수도의 위치, 지명의 특징을 중심으로 그 계승성을 설명하고자 한 방향에서 주목된다. 특히 발해 지명 가운데 주와 현의 명칭으로 고구려와의 상관관계를 밝히고자 하였다는 점은 매우 참신한 시각을 제시해 주어 발해사의 이해에 폭을 넓혀 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 발해의 민족구성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 송기호, 『발해 사회문화사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1. |
• 서병국, 『고구려인과 말갈족의 발해국』, 한국학술정보, 2007. |
• 최무장, 『발해의 기원과 문화』, 한국학술정보, 2002. |
『발해 사회문화사 연구』는 발해의 사회구조와 통치제도, 그리고 민족구성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특히 제1장에서는 발해 건국집단의 성격을 집중적으로 규명하여 발해의 정체를 설명하고 있고, 그 연장으로 제10장에서는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을 정밀하게 밝히고자 하였다. 또 제2장에서는 발해 피지배계층인 말갈족의 원류가 부여계통임을 밝혀 민족사의 범주에서 발해를 설명하고 있다.
『고구려인과 말갈족의 발해국』은 발해의 민족구성에 초점을 맞추고 집중적으로 연구 성과들을 제시하고 있는 책이다. 발해의 민족구성과 관련한 가장 일반적인 대중적 관심사를 세분화해서 개별적으로 답변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발해 건국을 주도한 민족이 누구인지, 발해 왕실이 대(大)씨를 표방한 이유, 말갈식 성명이 어떤 이유로 고구려풍으로 변모하는지 등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발해의 기원과 문화』는 발해의 사회와 문화 전반을 매우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는 책이다. 특히 제1장에서 발해 민족의 기원에 초점을 맞춰 말갈족의 특징과 기원을 살피고 나아가 발해 왕족인 대(大)씨의 정체를 집중적으로 고찰함으로써 발해의 사회구조와 민족구성의 실체를 증명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고구려와의 계승성도 함께 설명하고자 하였다.
- 발해 유민의 활동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 나영남, 『요·금시대 이민족 지배와 발해인』, 신서원, 2017. |
• 이효형, 『발해 유민사 연구』, 혜안, 2007. |
• 서병국, 『발해국과 유민의 역사 : 발해사의 주체는 누구인가』, 대진대학교 출판부, 2000. |
『요·금시대 이민족 지배와 발해인』은 발해의 멸망 이후 거란과 여진이 발해의 유민들을 지배하는 방식에 대해 밝히고자 하였다. 나아가 요나라와 금나라 시기 발해인들의 사회적 지위와 존재 양태를 밝힘으로써, 고려로의 내투 이후 만주지역에 남았던 발해 유민들의 삶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발해 유민사 연구』는 발해 멸망 이후의 역사적 전개에 대해 크게 관심이 부족했던 상황에서 발해 유민들의 활동 내용과 양상을 집중적으로 규명한 성과라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발해 유민이 멸망 이후 주변국으로 투항하거나 부흥운동에 가담하였다고 구분하면서 동단국과 흥료국의 성립과 발해 유민의 활동 양상 등을 규명하고 있는 점은 발해 망국 이후 과정에 대한 이해에 큰 도움을 준다. 또한 제5장에서는 고려의 발해에 대한 인식과 계승의식을 집중적으로 다룸으로써, 민족사의 영역에서 발해의 위상을 분명히 다지고 있다.
『발해국과 유민의 역사』는 발해 민족구성의 연장선 상에서 멸망 이후 그 유민들의 이주와 활동의 양상을 정리한 책이다. 거란의 통치권 주변에서 발해 유민들이 어떠한 삶의 모습들을 보이고 있었는지, 거란의 요나라 건국에 발해 유민이 어떤 활약을 했는지 등을 분석하였다. 또 여진이 금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발해의 유민들이 여진족의 문화 발전을 선도하였으며, 나아가 금나라의 시조 자체가 발해 사람이었다는 다소 도발적인 주장도 담고 있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