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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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wseo21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2년 10월 9일 (일) 08:11 판 (서일총재항일투쟁기념비(徐一总裁抗日斗争纪念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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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1921년 러시아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서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한 사건으로 흑하(黑河)사변이라고도 한다.자유시는 러시아 제야 강(Zeya river)변에 위치한 ‘알렉세예브스크(Alekseyevsk)’ 마을이며, 현재는 ‘스바보드니(Svobodny)’라는 지명으로 불린다. 러시아어로 ‘스바보다(Svoboda)’가 ‘자유’를 뜻하기 때문에 ‘자유시’라고 불렸다. 그리고 제야 강이 흘러 흑룡강(黑龍江)과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중국의 국경도시 헤이허[黑河]의 지명을 따서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도 한다.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을 감행한 일본군을 피해 만주 일대 독립군 부대는 항일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조직을 대한독립군단으로 규합하고 연해주로 이동하기로 결정한다. 1921년 3월 부대별 이동을 시작해 국경을 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부대가 만주에 남고 일부가 연해주까지 이동했다. 러시아로 이주한 독립군은 소련 적군(공산군) 소속 한인 부대장을 통해 군사훈련에 도움을 받는가 하면, 소련 정부와 군사협정을 맺고 무기를 공급받는다. 이에 일제는 강력한 외교공세를 벌여 소련 정부에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한다. 혁명 후 내란 발생이 불안했던 소련은 1921년 6월 22일 자유시에 주둔한 한국 독립군에게 무장해제의 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사살하고 포로로 잡은 사건이다.이 사건은 직접적으로는 사할린의용군이 소련 적군의 포위와 공격에 의한 참변이었지만 그 배경에는 한국독립군의 해체를 요구하던 일본군과 볼셰비키 공산당의 협상이 있었다. 시베리아 연해주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을 협상으로 철수시켜야 했던 볼셰비키 공산당은 일본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고 대한독립군을 볼셰비키로 흡수하여 일본과 마찰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독립군 내부적으로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 상하이 고려공산당 간의 정치적 대립투쟁까지 겹쳐진 결과로 일어난 복합적인 배경으로 발생한 사건이다.역사적 배경일본군은 봉오동 전투에서의 대패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를 침략하였는데, 이 보복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적단을 매수하여 훈춘사건을 조작하고, 간도에 군대를 투입했지만, 청산리전투에서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독립군에 대패하고 만다. 이후 일본군은 양민학살의 형태로 보복작전을 벌이면서, 간도의 동포들뿐만 아니라, 노령 연해주에 살고 있던 동포들도 많은 피해를 당했다.당시 소련은 혁명이후 내전 중으로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한 적군과 반혁명파의 백군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일본군은 백군 지원 명분으로 시베리아로 출병했고, 1920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 등 한인 거주지역을 습격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독립군은 적군에 가담한 후 적군이 후퇴함에 따라 연해주로 이동했고, 연해주 한인무장세력은 볼셰비키 세력의 강화에 따라 일본의 추격을 피해 자유시로 집결했다.1920년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등에서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한 일본은 5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한국독립군 토벌작전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상황이 위태롭게 돌아가자 서일,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이청천의 대한독립단,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 여러 조직으로 분산되어 있던 독립군은 일단 중국 독립군의 근거지였던 헤이룽장성 밀산(密山)에 집결했다. 이들은 독립군 10개 부대를 통합·재편성하여 1920년 12월 병력 3천5백 명의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했는데, 3개 대대로 편성되어 사실상의 북간도 독립군 통일군단이 되었지만, 무장이 빈약했기 때문에 제3국으로부터의 군사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은 약소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대한독립군단 지도자들은 이에 고무되어 1921년 정월 소만 국경선을 넘어 시베리아 땅을 밟았다. 김좌진은 이 때 소련으로 가는 것을 반대했다. 반대 이유는 공산주의자를 믿을 수 없다는 것으로, 어렵더라도 우리 동포가 많이 사는 간도 땅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독립군단은 다시 동쪽 이동하여 우수리강을 건넜고, 안전지대인 연해주의 이만(Iman, 달네레첸스크)에 집결했다.경과시베리아에 들어선 독립군단은 부대를 나누어 1여단을 이만에 두고, 2여단을 영안에 주둔시켰다. 이 때 소련 전역에서는 왕당파라 할 백군과 공산당을 지지하는 적군간의 전투가 계속되었고, 적군은 우리 독립군을 흡수하여 백군과의 전투에 투입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독립군 역시 그러한 의도를 알고 있었지만, 당시 워낙 추위와 굶주림, 빈약한 무장과 보급으로 인해 공산당의 군사지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독립군은 적군으로부터 대포 15문, 기관총 500정, 소총 3,000정 등의 장비를 지원받게 되었다.1921년 1월 중순부터 3월 중순에 걸쳐 시베리아와 간도로부터 한인무력이 자유시로 집결해, 간도지역의 한인무력으로 최진동·허욱 등의 총군부군대, 안무·정일무 등의 국민회군, 홍범도·이청천 등의 독립군과 서일·김좌진 등의 군정서군대가 있었으며, 노령지역의 의병대로는 이만군대·다반군대·이항군대·자유대대·독립단군대 등이 있었다. 총병력수는 1,900여 명이었다. 그런데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무장부대 중 자유대대와 이항군 사이에 한인무력군통수권을 둘러싼 갈등이 일어났다. 이때 자유대대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장악한 대한국민의회를 지지했고, 이항군은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장악한 상해임시정부를 지지했으므로 결국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간의 정면대결이 발생한 것이다. 즉 이항군을 이끌었던 박 일리아는 군통수권장악을 위해 극동공화국 원동부(遠東部) 내의 한인부를 찾아가 이항군대는 자유대대 편입 거부를 통고했다.이때 극동공화국 한인부에는 상해파의 이동휘계 인물인 박애·장도정 등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대한국민의회 및 자유대대측과의 협의도 없이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하여 박창은(朴昌殷)을 총사령관, 그레고리예프를 참모부장으로 지정하여 자유시로 보내는 동시에 이항군대를 사할린 의용대로 개칭하고 그 관할하에 자유시에 집결한 모든 한인무력을 두도록 했다.1921년 2월 중순 자유시에 도착한 박창은 일행은 총사령관으로서의 지휘권을 행사하려 하다가 실패하고 총사령관직을 사임했다. 이를 접수한 한인부는 다시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하여 그레고리예프를 연대장, 박 일리아를 군정위원장으로 지정했다. 두 사람은 즉시 군대관리에 착수하고 자유대대에 편입되었던 종래의 이항군대·다반군대를 마사노프로 이주시키고 간도군대에 대해서도 강제 이주시켰다. 그러나 자유대대는 끝까지 불응하다가 장교들이 체포당하고 기관포와 대대문서를 압수당하는 등의 횡포에 못이겨 크라스노야르스크로 이주했고, 이주 즉시 이항군대와 다반군대에 의해 무장해제당하고 지방수비대로 강제 인도되었다.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무력에 대한 군권이 일단 상해파를 지지하는 이항군대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은 자유대대의 오하묵·최고려 등은 이르쿠츠크에 있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가서 한인무력군의 통수권을 자기들이 가질 수 있도록 교섭했다. 이를 받아들인 동양비서부는 임시고려군정회의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갈란다라시윌린, 부사령관은 오하묵, 군정위원은 김하석·채성룡으로 임명했다. 이무렵 이용·박 일리아 등은 사할린 의용대가 주둔하는 마사노프에 와서 전한군사위원회(全韓軍事委員會, 이칭: 한인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이 위원회의 합법성을 주장하면서 한인무력군 통수권을 위해 극동공화국정부와 교섭했으나 실패하게 되면서 실력으로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극동공화국 군무총장에게 체포되어 이르쿠츠크로 압송당했다.한편 1921년 5월 23일 고려군정회의의 갈란다라시윌린 일행이 치타를 출발하여 6월 6일 자유시에 도착해보니 옛 이항군대·총군부군대·독립단군대·다반군대·국민군대·이만군대 등 1,400여 명이 사할린 의용대라는 이름으로 1개 연대를 편성하고 있었지만, 고려군정의회의 통제권 바깥에 있었다. 같은 해 6월 7일 갈란다라시윌린은 자유시의 전 부대를 소집하여 자기가 고려군정의회의 총사령관임을 선포하고 고려군정의회의 사명을 역설하며, 6월 8일 박 일리아에게 군대를 인솔하고 자유시에 출두하라고 명령했다.박일리아는 이를 거부했지만, 홍범도·안무의 군대는 자유시로 돌아갔고, 이후 사할린 의용대는 점점 고립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일리아는 고려군정의회에 대한 반항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1921년 6월 27일 오후 11시 사할린 의용대의 연대장 그레고리예프도 갈란다라시윌린에 투항하자, 갈란다라시윌린은 사할린 의용대의 무장해제를 단행하기로 결정했다.6월 28일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에서 파견된 군대가 사할린 의용대에 접근했고, 이후 제29연대 대장은 사할린 의용대 본부에 들어가 복종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사할린 의용대가 불응하자 공격명령을 내려 무장해제를 단행했다. 자유시사변은 사할린 의용군이 러시아 적군의 포위와 집중총격에 쓰러진 참변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 상해파 고려공산당 간의 대립투쟁이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이 전투 끝에 무장해제를 당한 사할린 의용대는 전사자·도망자를 제외한 864명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 교전 당시의 병력은 1,000여 명가량이었다.결과1921년 6월 2일 소련적군은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는데, 이는 우리 독립군이 소련 공산당을 위하여 싸워달라는 요구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소련 공산당을 위해 싸우라는 요구에 독립군은 항의하였으나 그들은 이미 독립군을 2증 3증으로 포위하여 무조건 수락을 강요하고 있었다. 이 때 소련군 배후에서 고려공산당(이르크츠크파)이 일을 꾸미고 있었으며, 김좌진은 이 때 이미 소련공산당의 이상한 눈치를 간파하고 극비리에 부하를 거느리고 흑룡강을 건너 중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한편 독립군과 소련정부(당시 치타정부)간의 협상은 결렬되면서 소련군의 공격이 6월 28일에 시작되었고, 이때 독립군은 사망자 2백72명, 강을 건너 중국 땅으로 탈출하다 물에 빠져 죽은 익사자 31명. 행방불명 2백 5명, 포로 97명 도합 6백명이 넘는 희생자를 내고 나머지 인원이 가까스로 소련을 탈출하였다.자유시사변 뒤 1921년 7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고려혁명군을 이르쿠츠크로 이동시키고 8월말 1개 여단으로 재편하여 러시아 적군 제5군에 예속시켰다. 고려혁명군은 이르추크에서 사관을 양성할 사관학교(교장 지청천)를 개교하고 군사 훈련에 매진하였다.의의와 평가자유시사변은 사할린의용군이 러시아 적군의 포위와 집중공격에 쓰러진 참변이었지만, 그 배경에는 한국독립군의 해체를 요구하는 일본군과 러시아 볼셰비키 공산당 간의 협상의 결과가 있다. 차르 정권이 몰락한 혼란을 틈타 시베리아 연해주를 점령하고 있는 일본군을 협상으로 철수시킬 필요가 있었던 볼셰비키 공산당은 일본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고 대한독립군을 볼셰비키로 흡수하여 일본과 마찰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독립군 내부적으로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 상하이 고려공산당 간의 정치적 대립투쟁까지 겹쳐진 결과로 일어난 복합적인 배경으로 발생한 사건으로 평가된다.운동노선을 둘러싼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대립에서 야기된 이 사건이후 두 공산주의 조직의 분열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악화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청산리대첩 이후 고난의 행군으로 새로운 독립운동 근거지를 찾아 연해주로 들어갔던 만주지역 독립군단은 독립운동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만 하였다. 그러나 만주지역 독립군단들은 경신참변과 자유시사변 등 두 차례에 걸친 참담한 수난에도 불구하고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다시 항일무장투쟁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독립군단들은 남북만주를 연결하는 통신연락의 재개와 독립군단들의 전열정비 등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이는 1920년대 중반 이후 만주지역에서 새로운 독립운동이 전개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서일(徐一)

일제강점기 북로군정서 총재로 김좌진과 청산리전투에 참전한 독립운동가.종교인.개설본관은 이천 서씨(利川). 함경북도 경원 출신.

본명은 서기학(徐夔學), 호는 백포(白圃).

1898년까지 고향에서 한학(漢學)을 배우다가 경성함일사범학교(鏡城咸一師範學校)에 입학하여 1902년에 졸업하고 교육구국사업에 종사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탄압이 심화되자 국내에서 항일투쟁의 어려움을 느끼고 만주로 건너갔다.1911년 두만강을 넘어오는 의병의 잔류병력을 규합하여 중광단(重匡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무력에 의한 투쟁보다는 청년동지들에 대한 민족정신과 한학을 가르쳐 정신교육에 치중하는 한편, 교육에도 뜻을 두어 간도지방에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1912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교리의 연구와 포교활동에 주력하였으며, 1916년 총본사(總本司) 전강(典講)이 되어 활동한 결과, 나철(羅喆)의 교통(敎統) 계승자의 물망에 올라 사교(司敎)로 초승(超陞)되고 영선(靈選)에까지 올랐다.1917년 대종교 총본사를 만주 화룡현(和龍縣)으로 옮겨 만주와 노령(露領)의 동포에게까지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여준(呂準)·유동열(柳東說)·김동삼(金東三)·김좌진(金佐鎭) 등과 무오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을 발표함으로써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이듬해 중광단을 토대로 군사적 행동을 위해 계화(桂和) 등과 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하였다.1919년 대종교 2세교주인 무원종사(茂園宗師) 김헌(金獻)이 그에게 교통을 전수하려고 하였으나 독립군 양성과 일제에 대한 무력항쟁에 힘을 기울이기 위해 교통의 인수를 5년 뒤로 미루었다.같은 해 8월현천묵(玄天默)·김좌진·계화 등과 함께 정의단을 개편하여 군정부(軍政府)로 만들고, 12월에는 다시 한 민족에게 두 개의 정부가 있을 수 없다 하여, 이것을 토대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하면서 총재에 취임하였다.또한 틈틈이 대종교의 교리를 연구하며 수도에 힘써 교리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저술에도 힘을 기울이며 포교활동도 하였다.군정서는 각처에 정보연락망을 구축하고 대종교 신도들의 헌금과 함경도민이 마련해준 군자금을 바탕으로 하여 정규병력 1,500명으로 지방치안을 유지하고 신병모집과 무기수입을 담당하였다.또한 왕청현 십리평(十里坪)에 사관양성소(士官養成所)를 세워 중견사관을 길러내고, 각지에 야간강습소와 소학교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1920년김좌진과 함께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 일본 정규군을 크게 무찔렀고 병력을 북만(北滿) 밀산현(密山縣)으로 이동시켰다. 이듬해 일본군의 만주 출병으로 인해 밀산현으로 들어온 안무(安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 최진동(崔振東)의 도독부군(都督府軍) 및 의군부(義軍府), 광복단(光復團) 등 여러 독립군단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다.1921년 6월 27일 자유시 수비대 29연대, 2군단 기병대대, 라키친 저격연대가 동원되어 사할린 부대에 대한 무장해제에 들어갔다.그러나 러시아 군인과 항일무장독립군 부대원 사이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고 러시아 군인은 사할린 부대를 구분할 수 없었다. 동원된 러시아 부대는 무장을 한 항일무장독립군에 대하여 무차별적 공격을 감행하였다. 청년장병 다수가 희생당하는 흑하사변(黑河事變)이 일어나게 되었다.이에 같은해 8월 27일 “나라 땅은 유리쪽으로 부서지고 티끌모래는 바람비에 날렸도다. 날이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뇨.”라는 글귀를 남기고 대종교 수양법의 하나인 조식법(調息法)으로 자결하였다.독립운동가로서 그의 활동과 지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또한 대종교에서는 그를 철학적 논리와 과학적 증명으로 종교의 교리를 체계화한 대철(大哲)로 성인(聖人)이라고 추앙하고 있다.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저서에 『오대종지강연(五大宗旨講演)』·『삼일신고강의(三一神誥講義)』, 그리고 계시를 받고 지었다는 『회삼경(會三經)』 등이 있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릉(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1세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阿干大夫). 부총리)의 후손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令). 종 1품. 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 종 1품. 국무총리)

4세 서유위(徐惟偉 장야서령(掌冶署令).정 3품.장관)

5세 서면(徐冕 주부(注簿).정 4품.차관보)

6세 서린(徐嶙 판대부사(判大府事).정 2품.부총리)

7세 서찬(徐瓚 장령(掌令). 정 4품. 차관보)

8세 서인(徐諲 교수(敎授).도승지(都承旨).정 3품.장관.대학자)

9세 서욱(徐勖 도승지(都承旨).정 3품. 장관)

10세 서효손(徐孝孫 판사재사(判司宰事).종 2품.부총리)

11세 서유(徐愈 예조판서(禮曹判書).이성군(利城君). 정2품. 장관.양경공파(良敬公派))

12세 서경흥(徐敬興. 목사(牧使). 정3품.당상관.차관)

13세 서미수(徐眉壽.사직(司直). 정5품.국장)

14세 서석손(徐碩孫. 모의당공(慕義堂公)

15세 서세호(徐世豪. 연순교위(衛尉)

16세 서희안(徐希顔. 사용공(司勇公)

17세 서득천(徐得天. 의병장(義兵將).부사용(副司勇) · 창의순절(副司勇 · 倡義殉節)

18세 서사도(徐思道. 의병장(義兵將).율곡 이이(栗谷 李珥) 문인.임진란 순절(壬辰亂殉節 )

서사근(徐思近 통정대부 판결사(通政大夫判決事)·.의병장(義兵將))

서사원(徐思遠 조선 중기 의병장(義兵將))

서사적(徐思迪) 조선 중기 의병장(義兵將))

19세 서일원(徐一元 .용기위사정(龍驥衛司正).학자(學者)

서종언(徐從彦 이흥군(利興君).오위부총관(五衛副摠官). 종 2품.차관)

서일회(徐一會)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


대종교(大倧敎)

1909년 나철(羅喆)이 조직한 종교.

대종교 삼종사 묘역(大倧敎)

삼종사 묘역은 들 가운데 있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和龍市) 용성향(龍城鄕) 청호촌(淸湖村) 청호종산의 작은 구릉. 옛 주소는 화룡현 청파호이다. 삼종사란 대종교(大倧敎)의 홍암(鴻巖) 나철(羅喆, 1863~1916) 대종사, 무원 김교헌(金敎獻, 1867~1923) 종사, 백포(白圃) 서일(徐一, 1881~1921) 종사를 말한다.

중광단(重光團)

1911년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로, 서일(徐一) 등이 국외로 탈출하는 의병들을 규합해서 조직하였다. 단장은 서일이 맡았고, 본부는 지린성[吉林省] 왕칭현[汪淸縣]에 있었다. 둥베이 지방 무장독립운동의 효시가 된 단체로, 무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 군사활동보다는 청년 지사들의 항일 민족의식 고취와 애국운동 함양 등 정신교육에 치중하였다.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3·1운동 직후 서일(徐一)·계화(桂和)·채오(蔡五) 등이 중광단(重光團)의 토대 위에 적극적인 항일무력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동북만주의 대종교도(大倧敎徒)를 규합하여 조직하였다.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북로군정서 사령부 터 지린성 옌지시 이란구(吉林省 延吉市 依蘭區) 북로군정서 사령부 터.

1919년 만주에서 결성되었던 독립군 단체. 북간도에서 서일(徐一) 등의 대종교인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중광단(重光團)이 3·1운동 이후 정의단(正義團)으로 확대·개편되면서 무장독립운동을 수행하기 위해 대한군정회(大韓軍政署, 약칭 군정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 약칭 군정부)로 확대 개편하였으며 임시정부로부터 대한군정서로 인준받았다.

청산리대첩

1920년 10월 21∼26일, 서일(徐一)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가 만주 허룽현(和龍縣) 청산리 백운평(白雲坪), 천수평(泉水坪), 완루구(完樓溝) 등지의 10여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싸움이다.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서일(徐一)이 1920년 만주에서 조직한 독립군 연합부대.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1921년 러시아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서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한 사건으로 흑하(黑河)사변이라고도 한다.자유시는 러시아 제야 강(Zeya river)변에 위치한 ‘알렉세예브스크(Alekseyevsk)’ 마을이며, 현재는 ‘스바보드니(Svobodny)’라는 지명으로 불린다. 러시아어로 ‘스바보다(Svoboda)’가 ‘자유’를 뜻하기 때문에 ‘자유시’라고 불렸다. 그리고 제야 강이 흘러 흑룡강(黑龍江)과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중국의 국경도시 헤이허[黑河]의 지명을 따서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도 한다.

서일총재항일투쟁기념비(徐一总裁抗日斗争纪念碑)

흑룡강성 계서시 118현도 영성촌(黑龙江省 鸡西市 一一八县道 永胜村)

서일(徐一)의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순국지 부근에 세운 기념비

백포 서일(徐一) 선생의 시어록비(독립기념관 어록비공원)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동 삼방로 95 (남화리) 독립기념관

"조국 광복을 위하여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