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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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wseo21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2년 8월 30일 (화) 10:16 판 (초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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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백제의 제25대 국왕이자 건길지.

생애

출생

손자 위덕왕과 함께 생몰년이 알려진 몇 안 되는 백제 왕이다. 《일본서기》에서 461년에 태어났다고 전하고 있으며, 실제로 무령왕릉 발굴 결과 523년에 사망할 당시 62세라고 기록되어 있어 교차검증까지 확실히 마쳤다. 즉위도 40세에 했으니 늦은 편이었지만 장수했다. 만약 동성왕 대신 바로 즉위했으면 44년을 재위할 수도 있었고 그렇다면 재위 44년의 위덕왕과 맞먹는다.

일본에서 태어났는데 고려충숙왕, 조선현종, 대한민국이명박 대통령과 더불어 외국에서 태어난 몇 안 되는 한국사의 지도자이다. 동성왕이 개로왕의 동생인 부여곤지의 아들이며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다는 통설에 따른다면 동성왕의 출생이 부여곤지의 도왜 이후가 되므로 정황상 동성왕 역시 외국에서 태어났다고 봐야한다. 다만 무령왕은 일본 본토 출생은 아니고 중간에 기착했던 섬에서 태어났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개로왕의 아들이거나 부여곤지의 큰아들이다. 부여곤지가 왜국으로 파견나갈 때 임신한 개로왕의 부인을 데려갔고, 그때 낳은 아이가 사마, 즉 무령왕이었다고 전한다. 한때 거의 무시되었지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출생 연대와 《일본서기》에서 전하는 부여곤지의 왜국 파견 시기가 일치하고, 유사점이 보여 이를 지지하는 입장이 늘어났다. 《일본서기》 유랴쿠 덴노 5년(461년) 조에 따르면 개로왕은 아우인 부여곤지를 왜국에 사신으로 보낼 때 곤지의 간청에 따라 자신의 임신한 부인[* 여기서 부인(夫人)은 삼국시대 당시 왕비를 일컫는 호칭.]을 곤지의 아내로 삼아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가는 도중 개로왕의 부인이자 부여곤지의 새 아내가 산기를 느껴 지금의 사가현 북쪽에 있는 인 카카라노시마에 정박하여 무령왕을 낳았다. 무령왕의 다른 이름 '사마왕(斯麻王)'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461년) 6월 병술삭(1일)에 임신한 부인이 카스리키시(加須利君)의 말처럼 츠쿠시(筑紫)의 카카라노시마(各羅島)[* 현 카카라시마(加唐島).]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래서 아이 이름을 세마키시(嶋君)라 하였다. 이에 코니키시(軍君)가 곧 배에 태워 세마키시를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이가 무령왕(武寧王)이다. 백제 사람들은 이 섬을 니리무세마(主島)라 불렀다. >---- >《일본서기》 권14 [5년]

부여곤지가 일본으로 넘어가던 중 카카라노시마(各羅島)에 정박하여 무령왕을 낳았는데 섬에서 태어난 것 때문에 '사마왕'이라 하기도 한다. 《일본서기》는 무령왕의 이름을 '세마키시(도군, 嶋君)'라고 전하는데 고대 일본어가 아닌 고대 한국어(백제어)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중세 한국어 천자문에서 왕을 가리키는 훈으로 '긔지'라는 말이 있는 걸로 볼 때 현대어로 역하면 '섬기지' 정도가 될 듯 하다.] 무령왕이 태어난 섬의 동굴에는 관련 설화가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덧붙여서 서동요에 나오는 서동으로 추정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사실 무령왕의 출신은 불분명하다. 무령왕이 개로왕의 아들이자 동성왕의 사촌 혹은 부여곤지의 아들이며 동성왕의 이복형이라는 것은 《일본서기》의 기록이고[* 부여곤지의 아들이며 동성왕의 이복형이라는 것은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신찬》의 기록이며 개로왕의 아들이자 동성왕의 사촌이라는 전승은 《일본서기》의 다른 권에 실려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동성왕의 차남으로 기록되어 있다. 백제/왕사 문서에 있는 가계도나 한국사 교과서 등의 왕계표는 《삼국사기》 기록에 따른 것이라 일단 이리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무령왕릉 발굴 결과 무령왕이 동성왕이나 삼근왕보다 나이가 많은 것으로 밝혀져서 현재는 《일본서기》의 기록 쪽을 인정하고 있다. 다만 《일본서기》에서도 2가지 전승에 대해 어느 쪽이 맞는지 우리도 정확히는 모르겠다는 구절이 나오며 동성왕은 문주왕의 아들이라는 가설도 있어서 무령왕과 동성왕의 혈연 관계가 정확히 어떠한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은 무령왕이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윤색이라는 학설이 있으며, 《일본서기》에서 두 가지 설을 언급하는 이유 또한, 무령왕의 생물학적 친부로 추정되는 부여곤지의 후손이 전하는 전승과 무령왕의 아들 순타태자의 후손이 전하는 전승이 상충하기 때문이라는 학설이 있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서씨일가연합회 [[1]]

즉위와 전쟁

선왕이었던 동성왕은 왕권 전제화 정책을 무리하게 시행한 탓에 반기를 든 위사좌평 백가에게 시해당하는 비운을 맞았는데 동성왕의 반대파에 의해 추대된 무령왕은 가림성(加林城)에서 저항하던 백가를 502년 정월에 한솔 해명과 함께 토벌했다. 의문스러운건 백가는 토벌군이 오자 저항도 하지 않고 항복했으며 그대로 처형당했다는 점인데 백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동성왕이 암살당했을 때, 《일본서기》에는 국인들이 그를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백가 혼자만의 소행이 아니라, 어느 정도 모종의 합의나 지원이 있었으나 후에 무령왕 세력들에게 이용당하고 팽당한게 아닌가 싶다.] 때문에 그의 배후에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남래(南來) 귀족 세력 해씨(解氏)[* 한강 유역을 본거지로 하는 귀족 세력이다.]와 연합하여 동성왕을 암살[* 동성왕 시절 《삼국사기》 기록에는 남산의 두 호랑이가 싸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두 호랑이가 동성왕무령왕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는 해석이 있다.]했다는 학설이 있다. 실제로 무령왕 치세기에는 전임인 동성왕 치세기에는 없었던 고구려 원정을 시도하며 한강 유역을 수복하기 위한 정책을 펼쳤다.

일각에서는 동성왕 암살의 배후가 무령왕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도 하는데 무령왕이 백가를 사주해 동성왕을 시해하고는 배후임을 감추기 위해 백가를 처단했다는 토사구팽을 주장한 것이나 근거가 빈약하기 때문에 진실은 알 길이 없다. 부여곤지에게는 무령왕동성왕 외에도 3명의 아들이 더 있었고, 이들이 각각 사씨, 백씨, 연씨[* 사씨 백씨 연씨 모두 남래(南來) 귀족 세력 해씨(解氏)등과 대착점에 있는 웅진 일대를 본거지로 두는 신진 귀족들이었다.]와 혼인했다고 가정하면 동성왕이 3남의 외척이었던 사씨의 세력 기반인 사비성으로 천도를 계획해 사실상 3남을 왕태자로 책봉하자 이에 백가가 위기감을 느끼고 부여곤지의 4남을 즉위시키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는게 더 합리적인 것 같다.

503년 고목성에 쳐들어온 위말갈을 격퇴시켰고, 달솔 우영(優永)을 보내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했다. 507년 고구려의 사주를 받은 위말갈이 다시 고목성에 쳐들어오자 남쪽에 2개의 책(柵)을 세우고, 장령성(長嶺城)을 쌓았다. 512년 고구려가 가불성과 원산성을 점거하고 약탈을 일삼자 군사 3,000명을 이끌고 위천(葦川)의 북쪽으로 진출해 크게 무찔렀다. 523년 좌평 인우(因友)와 달솔 사오(沙烏)로 하여금 쌍현성(雙峴城)을 쌓게 했다. 고구려와의 전쟁을 통해 북방에서 세력의 균형을 이룬 무령왕은 전라남도 지방의 침미다례 등 구 마한 세력을 완전히 일소하고, 512년에는 《일본서기》 기록상[* 원문은 '백제가 일본한테 임나국의 상차리(上哆唎)·하차리(下多唎)·사타(娑陀)·모루(牟婁)의 4현을 달라고 청했다'는 것인데 이는 백제가 대가야 영토인 4곳을 빼앗았다고 해석된다. 고고학적으로도 5세기 호남 동부에서는 고령 대가야토기가 출토되고 있어 한동안 가야 세력권이었던 것이 확인되고 있다.] 가야(반파국) 세력하에 있었던 동부로도 진출하여 임실, 남원 방면에서 내륙으로 동진, 섬진강 일대를 확보하고 낙동강 서부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무령왕은 새로 확보한 지역에 군령과 성주를 파견하여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으며, 전라도 동부 지역으로 진출을 시도하던 대가야는 이 시기 백제한테 밀려서 고립당하는 위기에 처했다. 고대에는 교역이 농업 생산력만큼 국가의 명운을 좌지우지하는 사업이었는데 섬진강을 통해서 광양만에 이르던 길을 고스란히 백제에게 빼앗기면서 어려움에 처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는 이후로도 대가야가 이런 섬진강 침입에 매우 강하게 반응하고 방어 태세를 갖추는 모습을 보이지만 체급의 차이로 여의치 않았던 모양이다. 섬진강의 물산과 교통로 확보로 백제가 이후 신라와의 싸움에서 이 길을 이용해서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근간이 되기도 했다.

북쪽으로는 백제군이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까지 다시 진출했다는 설도 설득력 있다. 근거는 무령왕 기록에 보이는 수곡성, 한산, 한수 이북 등의 명칭으로, 당시 백제 영역이 어디까지였는지, 한강 유역에 대한 지배권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학계에서 논의 중에 있다. 고고학적으로 보아서는 이 시기 고구려가 한강 이남 지역을 빠르게 포기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이 때 고구려는 안장왕 치세였는데 안장왕이 등장하는 경기도 고양시 북부 지역의 고봉산 관련 미녀 한씨 설화가 있는 것을 봐서 동성왕 - 무령왕 - 성왕 당시 고양시 일대까지 백제가 수복한 것으로 본다. 《삼국사기》에도 기록된 흥안 태자와 미녀 한씨 설화를 보면 무령왕 시기의 백제가 지금의 강화도인 혈성과 경기도 고양시인 개백현까지 태수를 두고 직접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안장왕이 태자 시절이었던 이 시기는 무령왕의 재위 말년에 해당하는데 이 시기의 백제는 한강 이북까지 탈환하고 지배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안장왕이 한강 유역을 재탈환한 시기는 백제 성왕 재위 초기에 해당하는데 이에 따르면 한강 유역은 이미 성왕 이전에 백제가 일시적으로 되찾은 것이 되고, 안장왕이 다시 빼앗은 것을 백제 성왕이 신라 진흥왕과 힘을 합쳐 재탈환한 것이 된다. 그래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한강 유역을 잃은 동성왕~무령왕 시기, 한강 유역 관련 지명이 자주 나오는 것이다. 부여에서 갑자기 고구려식 온돌과 그릇 등이 출현하더니 곧 백제 영역 전반으로 빠르게 전파되는 양상이 바로 무령왕 시기에 관찰되는데, 무령왕이 일시적으로 수복한 경기도 등지에서 고구려인들 혹은 고구려 문화를 익힌 옛 백제인들을 부여와 부여 인근 지역에 사민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강 유역을 영역화했는지는 아직 논의 중이지만, 적어도 백제군이 일시적으로나마 옛 위례성까지 치고올라갔던 건 거의 기정사실이었던 걸로 보인다. 무령왕 시절의 백제군이 개성을 비롯한 황해도 지역까지 치고 올라간 적 있다는 학설도 제기되고 있다.

이외에도 고고학적으로 백제가 마한 일대를 직할령으로 복속한 시점도 무령왕 대이다. 근초고왕 재위기부터 시작된 이 지리멸렬한 사업을 무령왕이 종결한 것이다.

왕권 강화

무령왕은 즉위 후 동성왕을 시해한 귀족들의 세력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양서》의 <백제전>에 따르면 22개로 운영되던 담로에 부여씨 왕족을 보내 통치하도록 하여 중앙집권적 질서하에서 정치 안정을 이루게 되었다. 부여씨 왕족을 지방 통치에 이용하여 토목공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동원할 수 있게 되었고, 왕족은 경제적인 기반을 확대시켜 나갔다. 최고 관등인 좌평제를 개편하여 신·구 세력을 통제했고, 직책이 없는 좌평이 등장했는데 이는 귀족 세력을 국왕 중심으로 서열화하고 국정을 책임있게 분담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다.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고 제방을 구축하며 농사를 권장하는 등 민생 안정에도 힘썼다. 포학무도하다고 할 정도로 전제 군주적인 모습을 보여온 선왕 동성왕과는 꽤 대조적인 모습이다.

외교

무령왕은 백제의 문화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무령왕은 512년과 521년에 남조의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외교 관계를 강화했다.[* 이 때 나제동맹 국인 신라 사신을 양나라에 같이 데려갔는데, 신라는 진흥왕 이전까지는 서해안에 항구가 없었으므로 중국 국가들과 직접 교류가 거의 없었고, 사신단에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백제 사신은 신라가 백제의 속국 중 하나라고 양나라 황제에게 거짓말을 했다. 한 마디로 이용해 먹은 것. 그리고 호남 동부 주도권을 두고 백제와 다투던 대가야 반파국까지 백제의 부용국이라고 양나라에 언플을 하기도 했다.]

521년 양무제(梁武帝)로부터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 百濟諸軍事 寧東大將軍)'의 작호를 제수받았다. 이는 으레 나오는 명목상의 책봉 기록이지만 은근히 의미가 큰 기록이기도 한데, 양나라는 앞서 502년에 고구려 문자명왕을 '거기대장군', 무령왕을 '정동대장군'으로 봉했다. 둘 중 고구려 쪽이 더 위계가 높았다. 그런데 520년 양나라는 고구려 안장왕을 '영동장군'에 책봉한 반면 이번에는 백제 무령왕을 그보다 더 높은 '영동대장군'으로 책봉했다. 양나라가 백제의 위계를 고구려보다 높게 잡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름뿐인 관작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젠 바다 건너 제3자인 양나라가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한때 위기에 몰렸던 백제가 무령왕 때쯤부터는 역전에 성공해 고구려의 위상을 뛰어넘고 있다고 본 것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무령왕보다 낮은 작호를 제수받은 안장왕이 백제의 우위를 뒤엎고 고구려의 전성기를 유지시킨 명군이라는 것. 무령왕의 아들인 성왕이 치세 초기에는 안장왕의 공격적인 대 백제 방면 확장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심지어 학계에서는 동성왕 ~ 무령왕 때 백제가 회복한 한강 유역을 다시 안장왕이 빼앗아갔다는 주장도 꽤 신빙성있게 보고 있다.]

즉위 6년, 왜에 이미 보내진 마나군이 왕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아군[* 순타태자와 동일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의 후손인 타카노노 니이가사가 헤이안 시대를 개막시킨 간무 덴노의 모후였다.]과 교체를 하여 부여씨 왕족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여 정치를 안정시켰다. 또한 선대왕인 아신왕처럼 유교를 가르치는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513)와 고안무(高安茂)를 일본에 보내(516) 백제의 선진 문화를 왜에 전해주기도 했다. 민생의 안정에도 힘써 제방을 수축하고 유랑민들을 구제해 농사를 짓게 했다.

이렇게 양나라와 왜 등 동아시아 국가들과 외교관계가 활발했다는 걸 보여주는 게 무령왕릉 & 《양직공도》이다. 동아시아사와 한국사에 잘 나온다.

사망

웅진을 수도로 자리한 군주들 중 유일하게 천수를 누린 왕이다. 웅진 시대의 백제 왕들은 22대 문주왕(암살), 23대 삼근왕(암살 유력), 24대 동성왕(암살), 그리고 25대 무령왕[* 전임 왕의 암살자를 색출하는 데에 최초로 손쉽게 성공했다!]과 26대 성왕[* 성왕은 재위 중반에 웅진성에서 사비성으로 천도했으며, 신라와의 전쟁터에서 전사하고 말았다.]이 있다.

사실 그 앞으로도 21대 개로왕(전사), 20대 비유왕(암살, 전사 유력), 19대 구이신왕(암살 유력) 등... 천수를 누린 백제 왕으로는 아주 오랜만이었다.

무령왕릉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왕이었던 무령왕이 지금과 같이 유명해진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무령왕의 능 때문이다. 무령왕릉은 백제 무덤 중 유일하게 주인이 확인된 왕릉이며, 도굴되지 않고 고스란히 출토된 금제 관장식 등의 호화로운 유물 덕에 급속히 유명해졌다. [* 1971년 다른 무덤에선 오랜 세월 이어진 도굴을 전혀 안 당하고 발굴되었다! 무덤이 통째로 묻혔다가 배수로 공사 중에 발굴된 게 이유인 듯. 다만 졸속 발굴이라는 오명이 붙기도 했다.]

무령왕릉에서 무령왕의 부인 역시 합장되어 발견되었다. 무령왕의 사망 3년 뒤인 526년 12월 사망했다고 한다. 무령왕릉 지석에서 '백제국왕대비(百濟國王大妃)'로 표현했는데 아쉽게도 성과 이름이 적혀있지 않아 알 수 없다.

무덤 양식은 양나라, 관은 왜의 금송으로 제작되었다. (한국사, 동아시아사에 《양직공도》랑 같이 잘 나오는 유적이다.)

논란

기록이 상대적으로 많이 남았지만 재위 초기의 기록과 수명에 부정합이 존재한다.

생년

무령왕의 사망에 대해서는 묘지석, 《일본서기》, 《삼국사기》가 모두 서기 523년 5월로 일치한다. 묘지석에 따르면 62세로 죽었고, 《일본서기》에 따르면 461년 6월 1일에 태어났다. 즉 461년에 태어나 523년에 62세로 죽었으므로, 이 나이는 연 나이로 계산된 것이 된다.

옛날 사람이니 당연히 세는나이를 썼을 것이리라고 생각하는 측에서는, 생년을 461년이 아니라 462년(=523 - (62 - 1))으로 설정하고, 더 나아가 63세 생일이 되기 전에 죽었으므로 62세로 처리했다고 보기도 한다.

초기 기록

《삼국사기》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동성왕이 501년 12월 피습으로 인해 승하하고, 502년 1월에 무령왕이 백가를 죽이는 상황이 나온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 <연표>에서는 501년 동성왕이 사망하고 무령왕이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501년 12월 동성왕이 세상을 떠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냥터에서 백가가 보낸 자객에게 습격당했던 시기보다 좀 지나서인데 아무래도 중태에 빠졌다가 얼마 뒤 승하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가 유월 칭원법[* 한 왕이 죽으면 그 다음 달부터 차기 왕의 치세로 세는 방식. 예컨대 선왕이 11월에 죽으면 그해 12월부터 원년이고, 선왕이 12월에 죽으면 이듬해 1월부터 원년이다.]을 따른다고는 하나 이는 고구려에만 해당한다. 장수왕은 491년 12월에 승하했기 때문에 문자명왕 기록의 시작(원년)은 492년 1월이다. 그러나 백제 구이신왕은 427년 12월에 죽었는데 차기 왕인 비유왕의 원년이 427년이다. 신라의 경우도 다르지 않으며, 태종 무열왕이 661년 6월에 죽었으나 다음 왕인 문무왕의 기록은 661년 6월부터 원년으로 하여 시작한다. 동성왕이 501년 12월에 죽었기 때문에 《삼국사기》에 무령왕의 원년이 501년으로 기록된 것이다. 다만 비유왕은 원년의 기록이 없고, 2년(428년)부터 기록이 시작되는 반면, 무령왕은 분명 원년이 501년 12월인데도 불구하고 501년 1월부터 시작되는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백가의 처형은 무령왕 2년(502)의 사건인데, 모종의 원인으로 인해 기록에서 연도가 빠졌고, 후대에 이것이 2년이 아닌 원년으로 잘못 기록된 셈이다. 원년이 501년인 것은 변함이 없다.

《삼국사기》의 무령왕 기록은 (기록된) 순서대로 원년 1월, 원년 11월, 2년 봄(1~3월), 2년 11월, 3년 9월, 3년 겨울(10~12월)이다. 백가의 처형이 원래 2년 1월인데 이것이 1년 1월로 잘못 기록되었음을 밝혔다. 그러니 앞서 적은 4개의 기사를 1년씩 미루어서 무령왕 2, 3, 4년에 일어났다고 보면 참 편할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결정적인 오류를 발생시키니, 바로 대(對)고구려 전쟁 기록의 연도 문제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무령왕 원년 11월에 달솔 우영(優永)과 군사 5,000명을 보내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을 습격했다고 되어 있다. <고구려본기>에도 이 사건이 똑같이 나오는데, 그 시기가 문자명왕 12년(503년!)이다. 또 무령왕 2년 11월에 고구려를 침공하는데, <고구려본기>에는 동일한 사건이 문자명왕 11년(502년!)조에 기록되어 있다. 무령왕 초기의 기록을 1년씩 뒤로 미룬다면, 동일한 두 기사가 서로 엇갈리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 오류를 해결하는 방법은 대단히 간단하며 단순하다. 우선, 무령왕 원년이 501년이며 백가의 토벌이 무령왕 2년에 있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이제 무령왕 원년 11월로 기록된 수곡성 침공을 무령왕 3년 11월로 수정해 보자. 놀랍게도 어떠한 모순도 발생하지 않는다. 《삼국사기》에 기사들이 기록된 순서를 기준으로 서술하면, 수곡성 침공 기사의 순서__만__ 변경하면 6개 기사들의 순서를 올바르게 정립할 수 있다. 원본의 "무령왕이 즉위했다. 정월에 (···). 11월에 (···). 2년 봄에 (···). 11월에 (···). 3년 9월에 (···). 겨울에 (···)."라는 순서가, "무령왕이 즉위했다. 2년 정월에 (···). --11월에 (···).-- (--2년--) 봄에 (···). 11월에 (···). 3년 9월에 (···). 11월에 (···). 겨울에 (···)."로 정정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논한 내용을 정리하면 아래 표와 같다. 괄호 안의 숫자는 사건이 발생한 달에 해당한다.


서기 || 《삼국사기》 <백제본기>(원본) || 《삼국사기》 <백제본기>(수정본)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501 ||동성왕 시해(12){{{#blue 무령왕 즉위 원년}}}[br]백가 토벌(1)[br]{{{#red 수곡성 침공(11)}}}||동성왕 시해(12)[br]{{{#blue 무령왕 즉위 원년}}} || || || 502 ||기근(봄){{{#orange 고구려 변경 침공(11)}}}||백가 토벌(1)기근(봄)[br]{{{#orange 고구려 변경 침공(11)}}}||{{{#orange 백제 변경 내침(11)}}}|| || 503 ||말갈 마수책 침공(9)[br]물이 얼지 않음(겨울)||말갈 마수책 침공(9)[br]{{{#red 수곡성 침공(11)}}}물이 얼지 않음(겨울)||{{{#red 수곡성 내침(11)}}}||

한편 《일본서기》에는 부레츠 덴노 4년(502)에 말다왕(동성왕)이 시해되고, 무령왕이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해에 백제의 말다왕이 무도하여 백성에게 포악한 짓을 하였다. 국인(國人)이 드디어 제거하고, 도왕(嶋王)을 세웠다. 이를 무령왕이라고 한다."] 501년 12월에 일어난 일을 전해 듣는 과정에서 착오가 발생한 것으로 보이나, 확실하지는 않다.

스다하치만신사 인물화상경?

>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男弟王在意柴沙加宮時斯麻念長寿遣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等取白上同二百旱作此竟 >계미년(443년? 503년?) 8월 10일(日十)(?) 대왕년(大王年)(?), 남제왕(男弟王)이 오시사카궁(意柴沙加宮)에 있을 때 사마(斯麻)가 장수를 염원하여 카와치노아타이(開中費直)와 예인(穢人) 금주리(今州利) 2명 등을 보내어 백상동(白上同→銅, 양질의 구리) 200한(旱)을 가지고 이 거울(竟→鏡)을 만들었다.

현전하는 일본 금석문 중 와카야마현 하시모토시 스다하치만 신사(隅田八幡神社) 소재의 인물화상경(人物画像鏡)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가 무령왕일 가능성이 있다는 설이 제기된 바 있다. 이걸 가지고 아예 '사실 무령왕의 남동생이 케이타이 덴노였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고대 한국어를 표기하는데 쓰인 향찰이나 고대 일본어를 표기하는데 쓰인 만요가나의 경우, 훈을 나타내는 한자와 음을 나타내는 한자는 분명히 구분되어 하나가 둘을 동시에 나타내는 경우는 없다. 따라서 '남제왕'(男弟王)이라는 표기는 일반적인 관습상 당연히 훈이나 음(앞서 기술한 이유로 훈을 취했을 가능성이 높음) 중 하나만 취한 것인데도 대책없이 난 둘 돠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남제왕'이 '무령왕의 남동생'이라고 하게 되면 케이타이 덴노일리가 없고 케이타이 덴노라고 하게 되면 무령왕의 남동생일리가 없다.

또한 더 중요한 것은 '사마'(斯麻)의 표기 방식이다. 이 거울의 제작 연대인 '계미년'(癸未年)은 60으로 나누어 23이 남는 해이고, 유물의 특징을 고려하면 이는 443년 또는 503년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무령왕은 462년생이므로 '사마'(斯麻)가 무령왕이라고 보려면 503년에 이 거울이 제작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명문에서는 제작 경위와 관련된 인물로 '대왕'(大王), '남제왕'(男弟王), '사마'(斯麻)가 등장하는데 전근대 기준에서 일국의 국왕에게 아무런 존칭없이 이름만 부르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으며 이 금석문을 새겼을 인물은 당연히 왕족보다 지위가 낮았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만약 김운회 식으로 일본 열도의 정권이 백제의 분가였느니 하는 식으로 해석하려면 당연히 '대왕'이 무령왕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앞서 등장한 '대왕'을 존칭없이 이름으로 재차 적었다는 것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다. 아예 처음부터 '사마대왕'(斯麻大王)이라고 썼다면 모를까.] 대표적으로 무령왕릉 지석에서도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고 하여 중국으로부터 받은 책봉호와 '왕'이라는 칭호를 붙여 쓰고 있다. 쉽게 말해 원래는 '문하심'이라고 써야 하는 것을 격식 다 치우고 쓴 격이다. 만약 이것이 성립하려면 '사마'가 '대왕'과는 다른 인물이고, '대왕' 또는 '남제왕'보다 하위 인물이거나 아예 무령왕을 '사마'라고 기록한 인물이 백제의 국왕 칭호를 신경쓰지 않는 외부 인물이어야만 자연스럽다. 당연히 백제가 일본 열도를 정복했느니 하면서 양자가 정치적으로 분가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김운회 식의 논지를 따르면 정작 백제가 케이타이 덴노의 하위 인사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진짜 무령왕의 친동생이 케이타이 덴노가 맞다면 사사로이 사여한 물건이기 때문에 대왕의 칭호를 누락시키고 격식을 버렸다고 해도 별로 문제는 없으며 칠지도 후면의 문면에서 볼수 있듯이 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 ‘왜왕 진(旨)을 위해 만들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걸로 봐서는 인물화상경의 문면이 특수한 경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에서 기록되어 있는 ‘男大迹王'(남대적왕)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남제왕'(孚弟王)이라고 거론하며 ‘弟’로 다소 무례하게 기록했느냐에 대해서 문면 그대로 판독하면 외교 관례나 칭호에 대한 이의 제기는 완전히 무효하다라고 반론할 수 있다. 덧붙여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청동 거울만 봐도 ‘사마’라는 칭호는 누구를 지칭했는지는 따져볼 건덕지도 없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거울의 제작시기는 503년이므로 케이타이 덴노의 즉위 년도인 506년과 맞지 않는다는 주장도 별로 설득력을 지니지 못한다. 애초에 《일본서기》의 년도 짜집기는 괴랄하고 악명높기 때문이다. 또한 케이타이 덴노는 즉위년에 있어 3년 정도의 오차가 있다는게 중론이다.

유사역사학자로 악명높은 김운회의 해석을 인용해 말도 안되는 주장이다라고 곡필하는 일방적인 경향이 있지만 강단학자이자 일본사 연구자 김현구 또한 비슷한 추론을 했다는 점에서 인물화상경에서의 '사마'는 무령왕이라는 추론은 재고할만한 가치가 있다. 즉, 김운희 같은 유사학자의 발언을 들어 무령왕이 하사한 물건이 아니며 케이타이 덴노로 비정되는 왜왕이 무령왕의 동생이 아니라고 확언하는 것은 대단히 무리인 주장이라는 것이다.

>《일본서기》에는 부레츠 덴노가 죽고 후사가 없어서 적당한 사람을 찾다가 아버지가 16대 오진 덴노의 5대손이고, 어머니가 11대 스이닌 덴노의 7대손인 케이타이를 옹립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케이타이 덴노의 아버지의 5대조로 되어 있는 16대 오진 덴노는 제2왕조의 대왕('오오키미')이었고, 어머니의 7대조로 되어 있는 11대 스이닌 덴노는 제1왕조의 대왕이었다. 따라서 일부 학계에서는 케이타이 덴노의 출신이 불분명하므로 그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부모를 이전 두 왕조 대왕들의 자손으로 하는 계보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냈다고 보고 있다. 게다가 케이타이 덴노의 ‘케이타이’라는 말 자체가 새로이 왕조를 계승했다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무령왕이 ‘남동생 왕’이라고 칭한 일본 천황이 케이타이 덴노가 틀림없다면 케이타이 덴노야말로 행방을 알 수 없는 곤지의 세 아들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p.190~191

결국 이를 무령왕과 관련지으려면 이 유물이 백제와 정치적으로 완전히 구분된 일본 열도 내 정권의 유물임을 인정해야 하며 이것이 고고학적으로나 문헌상으로나 보이는 국제 정세와도 들어맞는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명문에 의문점이 남지 않게 되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오호도노 오키미'(男弟王, 남제왕)가 오시사카궁(意柴沙加宮)에 있었다고 해석하면 또 기록과 모순이 생기는데 《일본서기》에 따르면 케이타이 덴노는 부레츠 덴노가 폭정을 일삼던 키나이 지역이 아닌 에치젠에 머물고 있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일본서기》의 기년 오차를 들어 503년에 이미 케이타이 덴노가 즉위했을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통치자로 보이는 대왕과 케이타이 덴노여야 할 '오호도노 오키미'가 일단 다르게 표기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기년 조정을 하더라도 《일본서기》의 기술과 완전히 어긋난다고 볼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오시사카노오나카츠히메'(忍坂大中姫)라는 황후가 있었던 인교 덴노 시기를 《송서》 <왜국전>에 맞추어 443년 전후로 가정하여 443년에 이 거울이 제작되었고, 사마의 혈통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완전히 일본의 신료라고 보는 의견도 있으며[* 예를 들어 악명 높은 <진구 황후기>에서도 '시마 노 스쿠네'(斯麻宿禰)가 등장하는데 '스쿠네'는 '카바네'(姓, 성)이므로 '시마'가 이름이다.] 이것이 503년설에 못지 않게 유력하다.[* 물론 503년설을 취하더라도 사마를 일본의 신료로 보는데는 모순이 없다.] 게다가 아무리 외국인이라고 해도 적성국도 아니고 동맹국의 왕을 존칭도 없이 그냥 쓰는건 이상하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에서도 백제 부여씨 왕족이나 귀족들은 거의 꼬박꼬박 관등이나 존칭을 붙여준다. 한국에서는 무령왕과 어떻게든 관련짓는 것이 잘 팔리기 때문에 503년설만 TV신문에 나오지만 443년설을 취할 경우 무령왕은 태어나기도 전이므로 당연히 이 명문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나 왜의 신료가 왜의 왕자인 오진 덴노의 손자를 위해 바친 물건이라는 설을 택해도 백제에서 건너간 물건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할 때 논거로 사용한 칭호나 관례가 깡그리 누락되었다는 점을 똑같이 적용해서 반박해버리면 이 쪽도 말이 안되는건 피차일반이다. 예를 들어 '弟'[* 남동생 즉, 손아래의 남자 형제를 부르는 호칭이다.]는 다소 무례한 칭호가 될 수 있는데 왜국의 '사마'라고 불리는 신료가 443년에 당대에 통용되던 호칭을 놔두고 구태여 '弟'라고 부르며 왜국의 왕자에게 헌상했다고 납득할 수 있을까? 그것보다 오진 덴노가 실존 인물이었다는 점부터 밝혀야 할 것 같다. 게다가 이 명문에서 '남제왕'(男弟王)의 정확한 판독이 사실 '부제왕'(孚弟王)이라는 설, 일반적으로는 '10일'로 판독하는 '일십'(日十)과 '대왕'(大王)을 이어붙여 '일십대왕'(日十大王)으로 봐서 특정한 덴노의 이름과 맞추는 설, '일'(日)을 '왈'(曰)로 판독해 앞의 경우처럼 '왈십대왕'(曰十大王)으로 봐서 특정한 덴노의 이름과 맞추는 설이나 '일하'(日下)를 '초'(草)의 간자로 보아 5세기 중반의 인물인 '오쿠사카 황자'(大草香 皇子)에 대응시키는 설 등 이설이 많아 아직 이 명문에 대해서는 일관된 의견이 없는 상태이다.

무슨 말인지 복잡해서 모르겠다 싶으면 그냥 다 생략하고 무령왕의 대일 외교와 관계가 있을 수도 있지만 없을 수도 있다는 것. 이 사료가 있건 없건 무령왕이 일본과의 동맹 관계를 이용해서 충분히 단물을 뽑아먹었던 기민한 인물이었음이 《일본서기》를 통해 분명히 확인되므로 만약 503년 무령왕설을 취한다면 이를 설명할 때 쓸 수 있는 자료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진짜 왜의 신료가 제조한 청동 거울이라면 일본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금석문 중 일본이 자체적으로 만든 제일 오래된 유물 중 하나이다. 구마모토사이타마에서 발견된 철검명에 금석문이 있으며 이것들은 5세기 중반에 제작되었다.

왜왕 무(武)와의 유사성

왜5왕중 한 명인 무(武)와의 유사성으로 재야학계에서 같은 인물이 아닌가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무령왕의 부왕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中

>“제가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으나, 이리와 승냥이 같은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으니, 비록 대대로 중국의 교화를 받았으나 번병(藩屛) 신하의 도리를 다할 수 없었습니다. (중략) “저와 고구려는 조상이 모두 부여 출신이므로 선조 시대에는 고구려가 옛 정을 굳건히 존중하였는데, 그의 조상 쇠(釗, 고국원왕)가 경솔하게 우호 관계를 깨뜨리고 직접 군사를 거느려 우리 국경을 침범하여 왔습니다. 우리 조상 수(須, 근구수왕)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 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공격하니 잠시 싸우다가 쇠의 머리를 베어 효시하였습니다. 이로부터 감히 남쪽을 돌아보지 못하다가 풍씨(馮氏, 북연 황실) 의 운수가 다하여, 남은 사람들이 고구려로 도망해 온 이후로 추악한 무리가 차츰 세력을 쌓아 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우리를 무시하고 침략하게 되었습니다. 원한을 맺고 전화(戰禍)가 이어진지 30여 년이 되었으니, 재정은 탕진되고 힘은 고갈되어 나라가 점점 쇠약해졌습니다. 만일 폐하의 인자한 생각이 먼 곳까지 빠짐없이 미친다면, 속히 장수를 보내 우리 나라를 구해 주소서. 그렇게 해준다면 저의 딸을 보내 후궁을 청소하게 하고, 자식과 아우를 보내 외양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겠으며, 한 치의 땅, 한 명의 백성이라도 감히 저의 소유로 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연(璉, 장수왕)은 죄를 지어 나라가 스스로 남에게 잡아 먹히게 되었고, 대신과 호족들을 살육하기를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죄악은 넘쳐나서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멸망할 시기로서 폐하의 힘을 빌릴 때입니다. 또한 풍족(馮族)의 군사와 군마는 집에서 키우는 새나 가축이 주인을 따르는 것 같은 심정을 가지고 있고, 낙랑의 여러 군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황제의 위엄이 한 번 움직여 토벌을 행한다면 전투가 벌어질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비록 명민하지는 않으나 힘을 다하여 우리 군사를 거느리고 위풍을 받들어 호응할 것입니다. 또한 고구려는 의롭지 못하여 반역하고 간계를 꾸미는 일이 많으니, 겉으로는 외효(隈囂, 신-후한 교체기의 참칭자)가 스스로 자신을 변방의 나라라고 낮추어 쓰던 말버릇을 본받으면서도, 속으로는 흉악한 화란과 행동을 꿈꾸면서, 남쪽으로는 유씨(劉氏, 남조의 유송)와 내통하기도 하고, 북쪽으로는 연연(蠕蠕, 유연)과 맹약을 맺어 강하게 결탁하기도 함으로써 폐하의 정책을 배반하려 하고 있습니다. 옛날 요 임금은 지극한 성인이었으나 단수(丹水)에서 전투를 하여 묘만(苗蠻)에 벌을 주었으며, 맹상군(孟嘗君)은 어질다고 소문이 났었으나 길가에서 남을 꾸짖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작게 흐르는 물도 일찍 막아야 하는 것이니, 지금 만약 고구려를 치지 않는다면 앞으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경진년 후에 우리 나라 서쪽 경계의 소석산 북쪽 바다에서 10여 구의 시체를 보았고, 동시에 의복, 기물, 안장, 굴레 등을 얻었는데, 이를 살펴보니 고구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들으니 이는 바로 황제의 사신이 우리 나라로 오다가 고구려가 길을 막았기에 바다에 빠진 것이라 합니다. 비록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매우 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무령왕의 부친인 개로왕은 고구려가 무도하며, 실제로는 남조•북조와 동시에 통교하며 북조를 능멸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도림에게 얻어들은 --헛소리--를 떠들며 고구려의 백성들이 핍박받고 있다고 떠들었다. 그런데 7년 후에 왜왕 무(武)에 의해 비슷한 서신이 남조에 보내진다.

>順帝昇明二年, 遣使上表曰: 「封國偏遠, 作藩于 外, 自昔祖禰, 躬擐 甲冑, 跋涉山川, 不遑寧處. 東征毛人五十五國, 西服衆夷六十六國, 渡平海北九十五國, 王道融泰, 廓土遐畿, 累葉朝宗, 不愆于歲. 臣雖下愚, 忝胤先緒, 驅率所統, 歸崇天極, 道逕百濟, 裝治船舫, 而句驪無道, 圖欲見吞, 掠抄邊隸, 虔劉不已, 每致稽滯, 以失良風. 雖曰進路, 或通或不. 臣亡考濟實忿寇讎, 壅塞天路, 控弦百萬, 義聲感激, 方欲大擧, 奄喪父兄, 使垂成之功, 不獲一簣. 居在諒闇, 不動兵甲, 是以偃息未捷. 至今欲練甲治兵, 申父兄之志, 義士虎賁, 文武效功, 白刃交前, 亦所不顧. 若以帝德覆載, 摧此强敵, 克靖方難, 無替前功. 竊自假開府儀同三司, 其餘咸各假授, 以勸忠節.」 詔除武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 >순제 승명 2년(478)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기를, “봉해진 나라가 먼 곳에 치우쳐 있으며, 바깥에 번국을 이루고 있는데, 과거의 조상(祖禰)[* 혹은 조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통칭하는 명칭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노중국 교수의 견해이다. 노중국 교수는 《춘추좌씨전》의 용례를 들어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지칭하는 단어라 했고 실제로 '조미'라는 단어를 구글에서 중국어로 검색해보면, 고대에 사용된 돌아가신 부친을 뜻하는 말이라고 정의되어 있다]으로부터 스스로 갑옷과 투구를 걸치고 산천을 누비느라 편안히 거처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동으로는 모인(毛人) 55국을 정벌하였고, 서로는 (衆夷) 66국을 복종시켰으며, 바다 건너 해북(海北) 95국을 평정하니,왕도는 화락하고 편안하며, 땅을 넓히고 왕기를 아득히 크게 하였으며, 여러 대에 걸쳐 조종(朝宗)하여, 해마다 어긋나는 일이 없었습니다. 신이 비록 아주 어리석으나 조상의 뒤를 이어 다스리는 곳을 이끌고 중국의 조정을 존중하고자 하였습니다. 가는 길이 백제를 거쳐야 하므로 큰 배를 준비하였는데, 구려(句驪)가 무도하여 (우리를) 집어삼키려 하고, 변방[* 정황상 백제로 의미가 통한다. 백제를 자신의 변방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백제사 전공 노중국 교수는 같은 상표문에서 백제를 백제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이것은 백제가 아닌 왜의 지방를 뜻한다고 해석했다]의 속한 곳을 노략질하며 살육을 그치지 않으니, 매번 지체되어 좋은 바람을 놓치게 됩니다. 비록 길을 나서지만 혹은 통하고 혹은 통하지 못합니다. 신의 돌아가신 아버지 제(濟)가 실로 원수가 천로(天路)를 막는 것에 분노하니, 활을 쏘는 병사 100만이 의로운 소리에 감격하여 바야흐로 크게 일어나고자 하였으나, 갑자기 아버지와 형을 잃으니[* 《일본서기》가 인용한 기사 중 비슷한 내용이 있지만 이 사건은 케이타이 덴노 치세인 531년 일어났다. '이주갑인상'은 실제 사건을 더 이른 시기로 당기는 것이지 더 뒤로 밀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둘은 다른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 묘하게도 상표문이 보내진 년도인 478년은 개로왕과 그의 왕자들이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죽은 년도의 3년째이다.--삼년상?--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의하면 개로왕은 475년에 사망했다. 만24~27개월의 3년상 기간 중에 국서가 보내진 것이다.], 수성(垂成)의 공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마지막 한 삼태기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상중에 있어 병사를 움직이지 못하고 쉬고 있었으므로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고구려의 정복을 꾀했으나 실패했다는 뜻이다.] 지금에 이르러 갑옷과 무기를 잘 갖추어 부형의 뜻을 펼치고자 하니, 의롭고 용맹스러운 병사들이 문무로 공을 이루어, 번쩍이는 칼날이 눈앞에 닥쳐도 또한 눈을 딴 곳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만약 황제의 세상을 뒤덮는 덕으로써 이 강적을 무찔러 온갖 어려움을 극복한다면, 이전의 공을 바꾸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삼가 스스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가수(假授)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모두 각각 (적당한 관작을) 가수하여, 충절을 권유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조하여 무를 사지절, 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 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에 제수하였다.

노중국 교수는 개로왕이 보낸 서신과 왜왕 무(武)가 보낸 서신을 작성한 식자층이 같은 집단으로, 개로왕이 장수왕에게 전사하고 망명간 이들에 의해 비슷한 내용의 서신이 써졌을거라고 추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서신의 내용은 수많은 중국의 고전을 인용하고 있어서, 당대 일본에서 수용되고 있는 유교의 수준으로는 구현하기 어려운 문장이라고 말했다. 여담으로 백제 8성 중 목씨가 이 시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한다. 목씨는 개로왕이 아차산에 끌려가 참수당할 때 문주왕을 피신시키고 도왜하여 지원군을 요청한 집단으로 추정한다 [* 실제로 비근한 예로 신라를 보면 6세기 초까지 제대로 된 문장을 한자로 기록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한자를 쓰긴 썼는데, 어순을 고대 신라어 그대로 사용했다고..그런데 신라는 왜국보다 훨씬 오래전에 한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5~6세기에 한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5세기의 일본의 문서행정이나 문장력이라..안봐도 뻔하다. ]

묘하게도 왜왕 무(武)와 백제의 무령왕은 행보가 비슷하다. 그래서 재야학계에서는 무령왕과 왜왕 무(武)는 동일인물이 아닐까하는 추정도 있으며, 바로 앞서 선술했듯이 무령왕의 부왕인 개로왕이 작성한 국서는 왜왕 무(武)가 작성한 상표문과 너무 흡사한 점이 많다. 백제가 아닌 왜국이 고구려에게 저렇게 큰 적개심을 드러내는 이유가 무엇일까하는 점에서도 일견 납득시킬 수 있으며, 무령왕은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일본 사가현에서 태어났다. 《일본서기》 유랴쿠 덴노 20년(475년) 기록에는, 개로왕때 고구려가 공격해와 국왕, 대후, 왕자가 죽었다고 했으니, 왜왕 무(武)가 언급한 부형이 한꺼번에 죽어 상 중이다라는 기록과 일치한다. 무령왕 본인도 죽어서 3년상을 치뤄진 것으로 볼때, 무령왕 = 무(武)가 맞다면, 그도 부형을 위해서 3년상을 치뤘을 것이다. 이름이 비슷한 것도 덤이다.

사마(斯麻)= さま 유래?

무령왕의 휘인 사마(斯麻)가 일본어의 존칭 '사마'(さま)의 유래라는 설이 있으나 근거는 빈약한 편이다. 이 주장을 반박하는 쪽에서는 일국의 왕의 휘호인 사마(斯麻)을 현대에 와서는 비교적 가벼운 존칭 접미사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기도 하는데,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극존칭의 단어가 비칭화(卑稱化)된 경우는 많다. 예를 들면 영어에서 '님' '귀하'등을 뜻하는 Sir은 '전하' '폐하'을 뜻하는 Sire에서 비칭화(化)된 것이다. 멀리 안가도, 임금을 뜻하는 군(君)이 현재에는 남성의 존칭 접미사로 비칭화(卑稱化)된 경우로도 알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서기》의 무령왕에 대한 기록에는 무령왕이 태어난 곳을 主嶋(주도, 니리무세마)라고 했다. 그러므로 현대 한국어의 존칭 접미사이자, 일본어에 ‘사마’에 대응하는 ‘님’은 백제어에서 생긴 것이다. 양국의 대표적인 존칭 접미사 님과 사마는 공교롭게도 무령왕과 관련이 깊다.

평가

백제중흥기를 이끈 명군이자 성군으로 평가받는다.

고구려에게 위례성을 잃고 쇠락해가다가 동성왕에 의해 제법 회복된 백제를 무령왕이 크게 중흥시켰다.

여담

* 한국사 관련 시험에서 악랄하게 출제된다면, '무열왕(통일신라 김춘추)'와 이름이 비슷하다는 사유로 혼선을 준다든지(ex. 무왕릉), 그의 업적 중 하나인 '22담로 설치'를 두고 '(고려 성종 때) 최승로의 시무 28조'와 엮어 '최승로의 22담로'로 말장난을 하기도 한다. 고전적으로 변별력을 뒀던 부분이라 이제 수험생들도 잘 낚이지 않는 편.
* 《삼국사기》에 따르면 키가 8척이고 눈매가 그림과 같았으며 인망이 두터웠다고 한다.[* 무령왕의 선왕인 동성왕폭군 짓을 벌이다 피살되어 무령왕이 옹립된 것을 감안하면 동성왕이 가진 악역 이미지와 대조되도록 집어넣은 띄워주기식 수사일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키가 8척이면 한척(漢尺)으로도 190cm라는 뜻인데, 무령왕릉에서는 무령왕의 유해로 추정되는 뼛조각만이 몇 개 출토되어서 사실 확인은 불가능하다.

대중매체에서

* 2013년작 MBC 드라마 <제왕의 딸 수백향>에서는 배우 이재룡[* 2004년작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류성룡 역.]이 연기했다. 주인공 수백향의 아버지로 등장했는데 일본 황녀를 무령왕의 딸이라고 어림짐작한 역사 왜곡에 문제가 있었지만 드라마 자체는 재미가 있고 배우가 예상 외로 카리스마있는 연기를 잘 해내서 호평을 받았다.

<삼국사기> 기록

[include(틀:삼국사기)] [무령왕 본기] 一年冬十一月 무령왕이 즉위하다 一年[* 바로 위 문단에 있듯, 실제로는 2년(502)의 일이다.]春一月 백가가 가림성에서 반란을 일으키다 一年[* 바로 위 문단에 있듯, 실제로는 3년(503)의 일이다.]冬十一月 달솔 우영을 보내 고구려의 수곡성을 공격하다 二年 백성들이 굶주리고 전염병이 일어나다 二年冬十一月 고구려의 변경을 공격하다 三年秋九月 말갈이 침입하여 마수책을 소각하다 三年 겨울에 물이 얼지 않다 六年 봄에 전염병이 유행하다 六年三月 봄에 비가 내리지 않아 백성이 굶주려 구제에 나서다 六年秋七月 말갈이 침입하여 고목성 함락하다 七年夏五月 장령성을 축조하여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다 七年冬十月 고구려와 말갈이 연대하여 침입하다 十年春一月 제방을 튼튼히 하고 농사를 짓도록 권장하다 十二年夏四月 양나라에 조공하다 十二年秋九月 고구려가 가불성을 습격하여 함락시키다 十六年春三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二十一年夏五月 홍수가 일어나다 二十一年秋八月 누리 떼가 곡식을 해쳐 백성들이 굶주리다 二十一年冬十一月 양에 사절을 파견하여 조공하다 二十一年冬十二月 양 고조가 조서를 보내 책명하다 二十二年秋九月 호산 벌판에서 사냥하다 二十二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二十三年春二月 한수 이북의 백성을 징발하여 쌍현성을 쌓다 二十三年春三月 한성에서 돌아오다 二十三年夏五月 무령왕이 죽다

백제 후기의 왕답게 초기 왕들에 비하면 기록이 많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