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주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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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0월 22일 (일) 19:0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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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대첩(龜州大捷)
김현승 일러스트레이터
대표명칭 귀주대첩
한자표기 龜州大捷
이칭 구주대첩(龜州大捷)
유형 전투
시대 고려
날짜 1018년 12월 ~ 1019년
관련인물 강감찬,소배압
관련장소 귀주(龜州)



정의

고려시대 현종 때 거란 침략군을 귀주에서 물리쳐 승리한 싸움.[1]

내용

일반적으로 귀주대첩이라 하면 1018년 12월 소배압(蕭排押)을 총지휘관으로 한 거란의 제3차 침입 때, 10만의 거란대군을 상원수 강감찬(姜邯贊) 등이 귀주에서 크게 무찔러 거란군의 전의를 완전히 잃게 한 전쟁을 말한다.[2]

배경

귀주청천강 이북에서 압록강 입구까지의 강동지방에 설치된 행정구역인 강동6주의 하나로, 예로부터 전략적 기능이 뛰어난 요충지였다. 993년(성종 12) 10월 거란의 제1차 침입 후 체결된 강화조약에서 서희(徐熙)의 외교적인 수완으로 고려의 점유를 인정받았으나, 1018년 12월 이 지역의 반환을 둘러싸고 거란의 제3차 침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3]

전개

이때 고려는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8천의 대군으로 맞서 싸우게 하였다. 거란군은 흥화진(興化鎭)을 통하여 내려오다가 그곳에서 패배했지만, 자주(慈州)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서경(西京)을 거쳐 개경 부근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병력의 손실이 크자 소배압은 정벌을 포기하고 황해 신은(新恩)에서 회군하여 가다가 청천강 유역의 연주(漣州), 위주(渭州)에서 강감찬의 공격을 받아 대패했으며, 특히 귀주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마판관 김종현(金宗鉉)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였다. 이때 살아남은 병력이 수천 명에 불과하였을 정도로 거란의 패배는 심각하였다.[4]

의의와 평가

고려사』에 “거란의 패함이 아직 이와 같이 심함이 없었다.”라고 전하고 있듯이, 당시 귀주대첩의 성과는 우리나라 전쟁사상 길이 빛나는 것이었다.
귀주대첩이 지닌 가장 큰 의의는 거란의 성종으로 하여금 다시 무력으로 고려를 굴복시키려는 야망을 버리게 한 동시에, 거란이 끈질기게 요구하여 왔던 국왕의 친조(親朝)와 강동6주의 반환을 다시는 요구하지 않게 되었다는 데에 있다.[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이용환-귀주대첩 귀주대첩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A ekc:depicts B
이용환-귀주대첩 귀주 A는 B를 배경으로 한다 A ekc:depicts B
강감찬 소배압 A는 B와 대립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강민첨 소배압 A는 B와 대립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강감찬 귀주대첩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강동6주 귀주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귀주대첩", 『doopedia』online, 두산백과.
  2. 이용범, "귀주대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이용범, "귀주대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귀주대첩", 『doopedia』online, 두산백과.
  5. 이용범, "귀주대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인용 및 참조

  1. 웹자원
    • "귀주대첩", 『doopedia』online, 두산백과.
    • 이용범, "귀주대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유용한 정보

  1. 송기호, "귀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