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6주
강동6주 (江東六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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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강동6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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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江東六州 |
유형 | 지명 |
목차
정의
994년(고려 성종 13) 평안북도 지역에 설치했던 행정구역이다.
내용
서희의 담판
993년(성종 12) 10월 소손녕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거란군이 침입하였다. 고려는 박양유(朴良柔)·서희(徐熙) 등을 보내 이를 막았으나 봉산군(蓬山郡)을 빼앗기는 등 전세가 불리해졌다. 고려는 청화사(請和使)를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마침 소손녕이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다 실패하여 화친의 분위기가 형성되어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이 이루어졌다.
고려와 거란은 고려왕의 입조와 거란 연호를 사용하는 조건으로 청천강 북쪽에 있는 압록강 동쪽 여진의 거주지역 280리를 고려가 점유한다는 화약을 맺고 군대를 철수하였다.
성보 구축
이듬해 고려는 새로이 점거하게 된 강동지역에 장흥(長興 : 평안북도 태천 동북)·귀화(歸化 : 위치 미상)·곽주(郭州 : 평안북도 곽산)·구주(龜州 : 평안북도 구성)·안의(安義 : 지금의 평안남도 안주)·흥화(興化 : 평안북도 의주 동쪽)·선주(宣州 : 평안북도 선천) 등에 성보를 구축하고, 서북면의 군사·교통상의 거점인 흥화·구주·곽주·용주(龍州 : 평안북도 용천)·통주(通州 : 평안북도 선천 서북)·철주(鐵州 : 평안북도 철산)등 강동6주의 행정구역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우리 민족의 생활권을 압록강 연안까지 넓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귀주대첩
그뒤 거란은 고려가 국왕 입조 등의 강화조건을 이행하지 않자 1010년(현종 1) 2차 침입, 1018년 3차 침입을 감행하여 강동6주는 격전의 중심지가 되었다. 거란의 3차 침입 때는 강동6주에 구축된 성진(城鎭)의 전략적 기능에 힘입어 강감찬이 귀주(龜州)에서 크게 승리함으로써[1]으로 거란군의 고려침략을 격퇴시켰다.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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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 | 소손녕 | A는 B와 대립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강동6주 | 고려 | A는 B가 설치하였다 | A ekc:founder B |
강동6주 | 흥화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강동6주 | 용주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강동6주 | 통주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강동6주 | 철주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강동6주 | 귀주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강동6주 | 곽주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시간정보
공간정보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 ↑ "고려사 세가 제권4 현종10년 2월",
『한국사데이타베이스』, online ,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