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응후
의병장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릉(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조선 후기 화순 출신의 의병.
본관은 이천서씨(利川). 자는 화여(華汝). 장위공(章威公) 서희(徐熙)의 후손이고, 아버지는 서해기(徐海基)이다.
서응후(徐應厚)[?~1593]는 사복시(司僕寺) 첨정(僉正)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충의공(忠毅公) 최경회(崔慶會)의 휘하에서 활동하며 금산(錦山)과 무주(茂朱)에서 왜병을 크게 격파하였다. 그 후 진주성(晉州城)을 수성하였으나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 황진(黃進) 혹은 고종후(高從厚) 등 삼장사(三壯士)와 함께 남강(南江)에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추증되었다.
목차
2차 진주전투
임진왜란 중인 1593년(조선 선조 26) 6월 22일부터 27일까지 경상우도 진주성에서 조선군과 왜군이 벌인 두 번째 전투이다.
진주 창렬사(晋州 彰烈祠)
진주 창렬사(晋州 彰烈祠)는 1593년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히 산화한 순국 선인들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경상도 관찰사 정사호가 건립하여 1607년(선조 40년) 사액을 받은 곳이다.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5호 창열사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창열사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호로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것을 기리기 위해 진주성 내에 건립되어 있다. 제2차 전투에서 많은 진주 성민이 순국한 후 경상도 관찰사 정사호가 건립하였고, 선조 40년에 사액을 받았다. 후에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김시민 장군을 모신 충민사가 철폐되자, 이곳에 모시게 된다.
창열사에는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신위를 맨 윗자리에 모셔두었고, 진주목사 서예원, 창의사 김천일과 충청도 병마사 황진, 경상우도 병마사 최경회 등의 임진왜란 순국 선열 39인의 신위를 모시고, 매년 음력 3월 초정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진주성 비가- 조열태저자
1951년 가을, 밀양성 축조 공사부터 소설이 시작된다. 소설의 주인공은 진주성 2차전 성주 서예원(46세)과 밀양 평촌 마을의 최억술(41세)이다. 전반부 축성과 개전전야를 통해 그 당시 민초들이 전쟁준비로 해서 겪었던 고통이 그려진다. 1952년(임진년)에 전쟁이 터지는 것은 밀양 장날 최억술이 봉화 신호를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최억술이 장에 갔다가 봉화를 본 직후 재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피난 준비를 하게 되고, 이때 김해성에 있던 서예원 역시 봉화를 보고서는 즉각 교전태세에 들어가는데
신징비록(新懲毖錄)71, 제2차 진주성 전투 직전의 상황.. 진주성에 드리운 전운(戰雲)
아들아, 전편에서 제2차 진주성 전투를 앞두고 그 전투를 수행해야 할 주요 인사의 변동과
그중에서도 논란의 중심에 있는 진주목사 서예원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물론..정사(正史)로서 권위가 있는 실록의 내용을 전면 부정하기엔 어려우나, 그럼에도 다른 사서와 충돌하거나 보충하는 내용에서 발견되는 의문점이 있어 실체와 다를 가능성을 제기하며 첫 운을 띄운 것이라 보면 된다.
5800 진주성 결사대 이야기 - 박희봉저자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진주 관군뿐만이 아니라,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에서 온 백성들이 합류했다.
■ 진주 관군은 서예원 목사, 성수경 판관, 박승남 판관, 최기필 판관을 비롯한 3,000명이다.
■ 전라도에서는 창의사 김천일, 복수의병장 고종후, 태인의병장 민여운, 순천 출신 의병장 강희열, 우의병부장 고득뢰, 장성현감 김응건, 종사관 양산숙, 만호 오방한, 군기주부 유한량과 유휘진, 해남의장 임희진, 부장 최억룡, 방의대장 강희보, 의병장 이계련 등 1,000명이 참전했다.
■ 충청도에서는 충청병마사 황진, 황간현감 박몽열, 당진현감 송제, 남포현감 이예수, 보령현감 이의정, 해미현감 정명세, 웅천현감 허일, 태안군수 윤구수 등 700명이 참전했다.
■ 경상도에서는 경상우도병마사 최경회, 사천현감 장윤, 김해부사 이종인, 진해현감 조경형, 거제현령 김준민, 삼가대장 윤탁, 적개의병장 이잠 등 1,100명이 참가했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