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연후
의병장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릉(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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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장
서연후(徐延厚)-조선 중기 의병장 .이천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파(兵部尙書公派)
서재원
2012. 11. 10.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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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의병장.
벼슬은 별좌임란 창의순절(壬亂倡義殉節)
이천서씨 시조 1세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阿干大夫). 부총리) 후손.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令). 종 1품. 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 종 1품. 국무총리)
4세 서유걸(徐維傑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
5세 서정(徐靖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참지정사(參知政事).판삼사사(判三司事). 종 1품. 국무총리)
6세 서균(徐鈞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
7세 서원(徐元 성불도감판관(成佛都監判官). 종5품.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정2 품 부총리)
8세 실전
9세 실전
10세 실전
11세 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종 1품. 국무총리- 병부상서공(兵部尙書公)파)
12세 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부총리)
13세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정 3품. 고려충신. 장관)
14세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都承旨).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
15세 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
16세 서효당(徐孝堂 전생서승(典牲署丞 종육품아문(從六品衙門)으로 옥(獄) 에 수감된 죄수(罪囚)를 관장).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조선 충신). 정2품.장관)
17세 서지(徐祉 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안행부 장관)
18세 서혼(徐渾 군자감위정(軍資監正 종 3품) .차관)
19세 서적(徐勣 종묘서령(宗廟署令.정 4품). 차관보)
20세 서몽린(徐應麟) 선무랑(宣務郞.정 6품). 차관보)
김천일이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의 집에는 송제민(宋齊民) 이광주(李光宙) 서연후(徐延厚)등이 모여 있었다. 저는 나이도 젊고 벼슬도 없습니다. 건제(健齊:金千鎰의 아호) 선생을 맹주로 추대할 향병(鄕兵)을 모집함이 어떻겠습니까? 양산숙의 제의에 모두가 찬동을 했다. 각각 흩어져 고을 마다에 격문(檄文)을 뿌리고 장정(壯丁)과 군량(軍糧)을 모으니 10여일만에 장정 수백명과 많은 양의 군량을 모을수가 있었다.
5월 25일 상주(尙州)에서 이일(李鎰)이 이끄는 관군(官軍)이 패하고 4월 28일 충주 탄금대(忠州 彈琴坮)에서 신립(申砬)이 전사하자 선조는 황망히 서울을 버리고 평양으로 피신을 했다. 이 소식에 접한 양산숙은 크게 분개하여 모인 의병을 근왕병(勤王兵)이라 칭하고 맹훈련을 실시했다. 때마침 전라감사 이광(李洸)이 7만군사를 거느리고 금강(錦江)부근까지 나아갔다가 이미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군대를 해산 시켜버려 이들은 뿔뿔이 헤어져 오다 의병군(義兵軍)에 합세를 했다. 고경명(高敬命)도 두아들과 함께 담양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대대적인 의병활동을 개시했다. 임진년 5월 16일 김천일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출전하면서 양산숙은 동생 산축(山軸)에게 너는 남아 늙으신 어머님을 잘 모시도록 하여라 하고 뒷일을당부하였다.
그해 7월 10일 첫번째 금산(錦山) 싸움에서 고경명(高敬命) 부자등 수많은 의병이 순절 했으며 8월 18일에는 두 번째 금산성싸움에서 호서의병장 조헌군(湖西義兵將趙憲軍) 700여명이 모조리 전몰하는 참화를 입었다. 호남으로 밀고 내려오려는 왜병을 소탕하며 그해 7월 경기도 수원(水原) 부근까지 올라간 김천일군은 독성산성(禿城山城)에 진을 치고 싸웠다. 대장 김천일은 거기에서도 승리를 거두자 그대로 적의 패전병을 추격하자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양산숙은 다음과 같이 반대 했다. 그 보다도 우리 호남의병(湖南義兵)들을 모아 진주(晋州)쪽에 요새를 만들어 호남을 지킵시다. 지금 잔적(殘敵)을 추격해 보았자 서울은 이미 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별 성과가 없을 것입니다. 대장 김천일도 그 주장에 동의 했다.
임진년 12월에 들어서자 한성(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왜의 병력은 6만에 이르렀다. 김천일군은 경기도 금령(金嶺)의 적을 무찌르고 많은 무기를 노획한 다음 상소문을 지어 양산숙에게 주어 임금이 있는 행재소 (行在所)로 보냈다. 적병이 우글거리는 천리길을 뚫고 임금이 있는 의주(義州)까지 간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양산숙은 장사꾼으로 변장을 하고 6월초에 길을 떴다. 적에게 들키지 않기위해 낮에는 산속에서 자고 주로 밤길을 걸었다.가지고 간 식량은 바닥이 나고 솔잎과 머루, 다래등을 따 먹으며 허기진 배를 채웠다. 비가오면 동굴이나 큰 나무밑에서 의지를 했다. 여름철이라 춥지는 않았지만 극성스러운 모기떼와 싸워야 했다. 그는 꼬박 달포나 걸려 천신만고 끝에 7월 중순 의주에 당도했다.
임금앞에 엎드린 양산숙은 감격에 겨워 울면서 아뢰었다. 김천일이 의병을 일으켜 전라병사 최원(崔遠)과 같이 군사를 합하여 경기도 수원에 진격하였사오며 고경명과 조헌도 기병하였사옵고 경상도에서 김호(金浩) 정인홍(鄭仁弘)박성(朴惺) 곽재우(郭再祐)등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무찌르고 있사옵나니다. 과인이 부덕한 소치로 백성을 괴롭히고 그대들에게 이 고생을 시켰으니.... 선조임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양산숙은 다시 아뢰었다. 김천일의 군에는 충용(忠勇)한 사람이 많사오나 그 대부분은 글 읽는 유생 이옵니다. 다만 충의심에서 일어섰사오며 일의 성패는 천명(天命)에 맡길 뿐이옵니다. 옆에 엎드린 곽현(郭賢)도 한마디 아뢰었다. 신은 본래 조헌(趙憲)과 깊이 사귀고 있사온데 신이 거사한 뒤에 이르러 조헌이 말하기를 근자에 천문(天文)을 보아도 우리나라는 멸망의 비운이 없으니 적이 곧 물러나리라 하였나이다. 이 말을 들은 선조(宣祖)는 몹시 기뻐하며 김천일(金千鎰)을 판결사(判決事)로 올려 창의사(倡義使)라 부르게 하고 고경명(高敬命)을 초토사(招討使)로 칭하게 하여 각각 교서(敎書)를 내렸다.
이때 양산숙은 흥부(興復)라는 국토수북 계획서(國土收復 計劃書)를 올렸는데 선조임금은 이를 보고 매우 기뻐하며 즉석에서 그에게 공조좌랑(工曹佐郞(정5품))벼슬을 내리고 이르기를 돌아가서 너의 장수에게 전하기를 마음과 힘을 다해 빨리 서울을 수복하여 나로 하여금 삼각산과 한강물을 볼 수 있도록 하라- 하였다.
양산숙이 다시 사지(死地)를 헤치고 돌아와 그같은 임금의 뜻과 소식을 전해주자 장병들의 사기도 한결 높아졌으며 사방으로 흘러졌던 백성들도 그말을 전해듣고 속속 서울로 돌아왔다. 왜군들도 본국의 명령이 있어 이 해 4월 중순부터 한성을 철수하기 시작했다.
서울을 빠져나간 적은 경상도 방면으로 집합하여 마지막 대회전(大會戰)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진주성(晋州成)에 대한 두번째 공격으로 나타났다. 첫번째 공격에서 김시민(金時敏)에게 패한 분풀이도 겸 곡창(穀倉)인 호남에의 진출의 발판을 굳혀 놓자는 속셈이었다. 조정으로 부터 적을 추격해도 좋다는 명이 내리자 김천일은 "이제 내가 죽을 곳을 얻었도다"하고 뛰듯이 진주(晋州)에 입성했다. 최경회(崔慶會) 고종후(高從厚) 심우신(沈友信) 장윤(張潤) 강희보(姜希輔) 황진(黃進)들이 모여들었다. 왜적도 10만명에 이르는 대병력이었다. 당시 명(明)나라 장수들은 대구 상주(尙州) 정주(定州) 남원 등지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 진주성 싸움에는 단 한사람의 병원(兵員)도 지원되지 않았다.
감천일의 병력지원(兵力支援)을 요청하는 글을 가지고 양산숙은 6월20일 대구에 있는 명나라의 총병(總兵사령관)을 찾아갔으나 냉담하게 거절을 당했다. 허탈에 빠진 양산숙은 빈손으로 진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동행했던 홍함(洪涵)은 좪진주에 돌아가봐야 명색없이 죽는다.좫며 도망해 버렸다.
양산숙이 돌아온 다음날부터 전투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도와주는 사람없는 외로운성에서 군사들은 오직 사수(死守)만을 외치며 성을 포위한 왜의 10만 대군과 밤낮없는 9일동안의 피 비린내 나는 격전을 치뤘다. 마침내 6월 29일 피붓는 장대빗속에 동문석벽(東門石壁)이 무너지고 적은 물밀듯 쳐들어왔다. 김천일등 우리편 장수들을 남쪽 촉석루(矗石樓)로 몰렸다. 최후의 시각이 임박해오자 대장 김천일은 아들 상건(象乾)을 품에 안고 남강(南江) 깊은 물에 뛰어들었다. 그에앞서 김천일은 양산숙에게 말했다. 좪그대는 수영에 능하여 마지막 처지를 면할수 있을것이니 이자리를 피했다가 다시 거사를 도모하여 이 원수를 갚아주면 하네좫하고 그러나 양산숙은 단호히 고개를 내져었다. 그리고 김천일과 같이 물속에 뛰어들어 장렬하게 순절(殉節)했으니 32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뒤에 나라에서 좌승지(左承旨)를 증하였고 정려(旌閭)를 명하였으며 진주 창렬사(彰烈祠)와 나주 정렬사(旌烈祠)에 배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