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초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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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근초고왕은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다. 체격과 외모가 남달리 뛰어났고, 넓은 식견이 있었다. >近肖古王 比流王第二子也 體貌奇偉 有遠識 >----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조- 첫 문장. 백제의 제13대 국왕이자 어라하.

태어난 해는 미상이고 346년에 즉위해 375년에 사망했다.

백제의 최전성기를 이끈 정복군주로 평가받는다.

삼국사기》에는 재위 2년부터 21년 사이의 기록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가 그동안 나라를 어떻게 다스렸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오히려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에 남아있는 왜곡된 기록을 이주갑인상과 주체 교체론[* 간단히 말하면 《일본서기》 해당 기록에서 '일본이 했다'는 부분을 '백제가 했다'로 주체를 교체하면 아귀가 맞는 내용이 많다는 것이다.] 등으로 재구성하는 방법으로 그의 업적이 드러난다. 백제의 기록이 얼마나 부실한지 알 수 있는 사례.[* 꼭 백제만의 문제가 아니라 삼국 모두 상당수 왕들의 기록이 많이 빈다....] 백제전성기를 이끈 명군임에도 재위 기간의 2/3에 가까운 시기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백제 멸망 이후 수백 년 이후인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의 한계를 볼 수 있다.

명칭

|| 명칭 || 한자 || 출처 || 국가 || 시기 || 비고 || || 근초고왕 || 近肖古王 || 《삼국사기》 || 고려 || 1145년 || 오늘날 가장 널리 쓰이는 명칭 || || 여구 || 餘句 || 《진서》 || 당 || 644년 || 중국 사서에 최초로 등장하는 백제왕(372년) || || 조고왕 || 照古王 || 《고사기》 || 일본 || 712년 || 일본 사서에 최초로 등장하는 백제왕(396년?) || || 초고왕 || 肖古王 || 《일본서기》 || 일본 || 720년 || " || || 속고왕 || 速古王 || 《신찬성씨록》 || 일본 || 815년 || " ||

동성왕 이전까지 백제의 왕 대다수가 이름을 왕호로 사용한 점으로 미루어 이름은 초고 - 조고 - 속고로 추정된다. 셋은 의미상 동일한 단어의 다른 표기인데, 고대 한국어에서 같은 파찰음인 ㅊ - ㅈ - ㅅ음의 상호 호환성은 옆나라 신라의 김흠순(純)과 김흠춘(春), 용수(樹)와 용춘(春), 관창(昌)과 관장(壯)과 같은 이표기 사례들을 참고하면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백제 왕실의 국성이 부여씨(扶餘氏)라는 점으로 미루어, 《진서》의 기록에 따라 성을 (부)여, 이름을 로 추정하기도 한다. 일설에 의하면 구는 (초)고의 이표기라고 한다. 물론 가능성은 있지만 '담덕'을 '안'이라 표기한 중국의 이표기를 볼 때 그렇다.

||대수||왕호||한자||대수||왕호||한자|| ||4대||개루왕||蓋婁王||21대||근개루왕||近蓋婁王|| ||5대||초고왕||肖古王||13대||근초고왕||近肖古王|| ||6대||구수왕||仇首王||14대||근구수왕||近仇首王||

백제의 왕계를 살펴보면 위와 같은 대응이 이루어지므로, '근초고왕'의 가까울 근(近)이 이전의 왕과 구분짓기 위해 부기된, 서양의 '2세'와 비슷한 의미의 글자로 추정되기도 하고 한국어 '큰'을 나타낸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후자쪽이 더 설득력이 있다.

고구려에서도 과 이를 따서 위궁이 있었다.

이러한 점에 착안한 다른 일설에는 고이왕계인 계왕을 물리치고 초고왕계 왕통을 복구해서 왕명이 근초고왕이 된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근개루왕의 용례와 무엇보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았을 때, 단순한 동명이인이라는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이 있어 함부로 결론짓기는 애매한 상황이다.

생애

내치의 안정

>이로써 백제의 왕권은 점차 전제화되고 부자 상속에 의한 왕위 계승이 시작되었다. >---- >고등학교 과정 국사 교과서

* 이 문단에서는 그의 내정을 다룬다.

근초고왕이 즉위하기 전 백제는 북쪽으로 완충 지대 역할을 하던 한사군(낙랑군대방군)이 314년까지 전부 미천왕의 고구려에 의해 축출되면서 고구려와 처음으로 국경선이 맞닿았고, 고구려의 위협이 눈 앞의 현실로 다가온 중차대한 위기 상황이었다. 게다가 백제는 분서왕 때 기록을 봐선 대방군과 친해서 혼인동맹도 맺고, 반면 고구려와는 별로 좋은 사이가 아니었는데 이렇게 고구려가 백제 북쪽을 전부 차지하게 되면서 상황이 난처해졌고 결국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정도 어지럽게 흘러가고 있었는데 바로 백제의 왕통이 초고왕에서 이어지는 초고왕계고이왕에서 이어지는 고이왕계 둘로 분열되어 매우 불안정한 구도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서로 계통이 다른 것으로 보이는 고이왕비류왕의 경우 기록에서 주장하는 그대로 나이를 추산하면 100살이 훌쩍 넘는 엄청난 수명을 자랑한다.

||재위 기간||초고왕계||고이왕계|| ||166년 ~ 214년||초고왕[br]개루왕의 아들|| ||214년 ~ 234년||구수왕[br]선왕의 첫째 아들|| ||234년||사반왕[br]선왕의 첫째 아들|| ||234년 ~ 286년||-||고이왕[br]개루왕의 둘째 아들.[* 아버지 개루왕이 죽은 지 68년 뒤에 고이왕이 즉위하였고, 그 뒤로도 52년을 더 살았다. 극단적으로 고이왕이 개루왕의 유복자라고 가정해도, 기록대로라면 120살을 살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모순 때문에, 고이왕이 초고왕의 동생이 아니라 방계 왕족 혹은 시조를 달리하는 전혀 다른 지파로서 초고왕계와 다투다가 왕통을 빼앗아 왔다는 시각이 유력하다.]|| ||286년 ~ 298년||-||책계왕[br]선왕의 아들. 전투 중 사망|| ||298년 ~ 304년||-||분서왕[br]선왕의 첫째 아들. 암살당함|| ||304년 ~ 344년||비류왕[br]구수왕의 둘째 아들.[* 고이왕과 동일한 모순이 있다. 아버지 구수왕이 죽은 지 70년 뒤에 비류왕이 즉위하였고, 그 뒤로도 40년을 더 살았다. 비류왕이 구수왕의 유복자라 하더라도 기록대로라면 110살을 살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기에 학계에서는 비류왕이 구수왕의 차남이라는 기록은 믿지 않고 대신 초고왕계에 속하는 방계 왕족이라고 본다.[[1]]] 민간인||-|| ||344년 ~ 346년||-||계왕[br]분서왕의 장자|| ||346년 ~ 375년||근초고왕[br]비류왕의 둘째 아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둘째 아들(二子)'로 기록된 왕들[* 고이왕, 비류왕, 근초고왕]은 정변 등 비정상적인 과정으로 왕이 되었음을 시사하며, 같은 왕계의 선대 왕의 둘째 아들로 조작하느라 수명이 비정상적이 된 것으로 본다.[[2]]

어찌 되었든 근초고왕 바로 이전의 계왕이 고작 2년 동안 즉위하다가 왕위를 넘겨줬을 정도로, 당시 백제의 왕통이 제대로 개판이었다는 점을 명심하자.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근초고왕 이후에는 근구수왕 - 침류왕 - (진사왕) - 아신왕 - 전지왕 - 구이신왕 - 비유왕 - 개로왕근초고왕의 직계 후손으로 선명히 가닥이 잡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일개 민간인에 불과하던 선대의 비류왕이 근 40년의 기나긴 치세 동안 안정적인 선정과 반란 진압으로 기반을 튼실히 닦은 영향도 무시할 수 없지만, 근초고왕이 재위 중반에 이르기까지 근 20년 동안의 세월을 자신의 왕권과 정치적 영향력을 공고히 하는 데 치중했다고 파악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이때 근초고왕 이하 초고왕계 부여씨 왕실의 정치적 파트너는 진씨(眞氏) 가문이었는데, 이 진씨 가문은 비류왕 때 진의(眞義)가 내신좌평이 된 이래 근초고왕 때 진정(眞淨)이 왕후의 친척으로 조정 좌평이 되었으며, 근구수왕 때는 진고도(眞高道)가 왕의 장인으로 내신 좌평이 되는 과정을 거쳐서, 공히 백제 최고의 외척이자 엘리트 귀족 가문이 되었다. >진정(眞淨)을 조정좌평(朝廷佐平)으로 삼았다. 정(淨)은 왕후의 친척으로서 성품이 사납고 어질지 못하였으며, 일에 대해서는 가혹하고 까다로웠다. 권세를 믿고 제 마음대로 하니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였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2년

이처럼 근초고왕과 혼인으로 연결된 진씨 가문은 비류왕 계열의 근초고왕이 고이왕 계열의 계왕에게서 왕위를 넘겨받을 데에도 크게 공헌한 것으로 추정되나, 이러한 진씨 가문의 독주는 곧 정도를 넘어서기 시작한 듯하고, 이후 《일본서기》 등 근초고왕의 재위 후반부 활동에는 진씨를 대신해 사씨(沙氏)와 목씨(木氏)가 대대적으로 등장하여 왕의 대외 활동에 공헌하게 된다.

근초고왕 때 박사 고흥을 얻어 비로소 《서기》(書記)를 가지게 되었다고 하는데, 대체로 이 《서기》를 역사책으로 생각하지만 고유명사가 아니라 한자를 그대로 해석해 단순히 명령과 문서의 성문화를 뜻하는 것으로 볼 때도 있다. 역사서로 보는 쪽의 주요 연구가는 이기백이병도, 신형식 그리고 김두진이고, 그 외에 공식적인 문자 기록의 제도화(천관우)나 문자 기록의 시초(고병익) 등으로 보기도 한다. 물론 아직까지는 역사서라는 견해가 주류고, 교과서에도 정설로 기재되고 있다. 백제는 개국 이래 문자로 사실을 기록한 적이 없다가, 이 《서기》에서 처음으로 기록을 시작했다고 한다. 근초고왕 이전의 백제사 기록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이라 본다면 위에서 적은 것처럼 초기 왕실 계보가 부정확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마한 정복 - 온조왕의 모델?

마한 정복은 근초고왕의 업적 중 가장 불분명한 부분이다. 《일본서기》 등의 기록에 따라 근초고왕이 마한을 친 것 자체는 사실로 보고 있지만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는 불분명하다. 10여년 전까지 학계의 정설은 근초고왕이 마한을 완전히 정복하여 백제가 지금의 전라남도 해안까지 진출했다는 것이었다. 문헌적 근거가 희박함에도 불구하고 이병도, 노중국과 같은 한국사학계의 기라성과 같은 거장들이 그렇게 주장했기에 별다른 반론 제기도 없이 수용되었으며, 교과서에도 오랫동안 실려 있었다. 하지만 최근 20년간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활발한 고고학적 성과에 의해 기존의 설은 부정되고 최근 학계의 정설은 근초고왕대의 남방 한계선은 잘해야 군산, 익산, 전주, 부안, 김제, 정읍 정도까지며[* 《일본서기》 기록에 근초고왕 시기 지금의 정읍시 고부면 (고사산-백제 고사부리성)과 김제시 성산면 (피지산-백제 피성) 일대가 백제국의 영내(영토 내부)였다고 적고 있으며, 2017년 이후 전라북도 만경강 이남 지역도 5세기 후반까지 마한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들 역시 근초고왕의 마한 정벌 이후에도 백제 영토가 아니었다는 견해가 있으나 이는 나주 일대 소국 세력과 정읍-광주 축선의 전남 중동부 내륙 세력, 남해안 일대 세력은 각기 계통과 세력권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고고학적 발굴 결과를 두고 전남 전체와 전북 일대에 마치 독자적이고 단일한 마한 세력이 백제와는 별도로 존재한 걸로 오해하는 의견이 있는데, 문헌사학은 물론이고 고고학적으로도 지지받을 수 없다. 일단 《백제삼서》에 노령산맥 이북은 백제의 지배력이 미치는 지역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전라남도 지역인 영산강 유역 세력은 직접 지배 세력으론 넣지 못하고 다만 그 중심 소국을 완전 타멸하여 더 이상의 성장은 못하게 억제했다는 설이다.[* 단, 고고학적 변화가 정치적 복속 시점보다 다소 늦을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고구려만 보더라도 옥저나 한사군 지역에 대한 사서상의 복속 시점보다 실제 그 일대의 고고학적 변화 양상이 분명히 늦게 나타난다. 하지만 사학계에서는 고구려의 옥저, 한사군 병합 시점이 왜곡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따라서 백제 정치체에 의한 직접 복속 시점은 마한 전범위에서 백제계 양상이 드러나는 동성왕~무령왕 대보다도 분명히 앞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흔히 전남은 백제 멸망 직전 혹은 그 시점까지 백제의 영역이 아니었다거나 반독립 지역이었다는 인터넷발 낭설은 말그대로 궤변이다. 물론 고고학적 결과를 정치체의 변화로 보는 가장 보수적인 설에 따라도 이미 무령왕 이후 140~150년 이상 백제의 직접 지배 범위였기에 아무리 보수적으로 보려 해도 무슨 의자왕 시기까지 전남 지역의 마한 세력이 중앙 조정을 안 도와서 망했다거나 그 일대는 백제와 무관했다는 주장이 개소리인건 마찬가지이다.]

>가을 7월에 왕이 말하였다. "마한은 점점 쇠약해지고 윗 사람과 아랫 사람의 마음이 갈리어 그 형세가 오래 갈 수 없을 것 같다. 만일 남에게 병합된다면 순망치한의 격이 될 것이니 후회하더라도 이미 늦을 것이다. 차라리 남보다 먼저 (마한을) 손에 넣어 훗날의 어려움을 면함만 같지 못할 것이다."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고 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국읍을 병합하였다. 다만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의 두 성만은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 >《삼국사기》 <온조왕 본기>

마한 정복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으며, 위에서 보듯 원문은 근초고왕이 아니라 <온조왕 본기>에 있다. 우선 사학자들의 의심하는 것은 온조왕 대의 강역 문제다.

>가을 7월에 한산(漢山)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들을 옮겼다. 8월에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긴 것을 알리고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는데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웅천(熊川)을 경계로 하였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 >《삼국사기》 <온조왕 본기> 13년

'패하', '웅천', '큰 바다', '주양'이라는 영역은 대개 예성강, 금강(공주), 서해, 춘천 혹은 철원으로 비정된다. 문제는 경기도~충청도 영역을 완전히 장악할 정도나 되어서야 가능한 이 영역과 달리, 《삼국지》 <위지> -동이전-으로 증명되는 3세기까지만 해도 한반도 남서부는 54개의 마한 소국이 꽉 들어찬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더불어 기록이 아닌 고고학적으로도 백제가 광범위한 영역 국가를 온조왕 대에 이미 만들었다고 보기가 영 힘들다. 지명을 다른 곳에 비정해서 저 영역 해석을 다르게 해보려 해도 뚜렷한 경계가 되는 강 이름이 패하, 대하, 한수, 웅천 등 몇 개씩이나 등장하기 때문에 옮길 수 있는 위치는 한정되어 있다.

백제의 이 영역을 인정하고, 마한의 소국을 비정할 경우 배치할 곳도 마땅치 않을 뿐더러, 먼 훗날 고려시대에 옛기록을 모아서 쓴 《삼국사기》와 다르게 3세기 시점에서 가장 가까운 시기에 작성한 중국 사서상에는 이렇게 넓은 영역을 차지한 국가가 왜 등장하지 않는지도 해명하기 힘들다. 다만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기년에 의문을 가지는 학자들도 마한 정복이 이루어진 시기가 기리영 전투가 이루어진 3세기 중엽의 고이왕 대라는 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일단 《진서》에서 3세기 후반 등장하는 '마한'은 현재로서는 백제로 보는 학설이 우세하다. 여기서 자주 오해되는 게 백제와 마한이 국가 대 국가로서 대결하면서 마한이 영토를 차례차례 잃어간다는 이상한 관념인데, 그런 일은 벌어진 바 없다. 마한이란 연합체 안에서 본래는 그 수장국에게 영역과 세력 모두 미치지 못하는 군소 세력이었던 백제국이 갑자기 3세기 중반경부터 부쩍부쩍 힘을 키워, 불과 반세기도 안 되는 사이에 오늘날의 경기도 전체를 아우르는 세력으로 성장하는데 그 시기는 다름아닌 고이왕-책계왕 때이다. 바로 그 시기에 맞춰 목지국의 쇠락이 시작하는 건 상당한 인과 관계가 있다고 여겨진다. 물론 3세기 후반경 목지국을 쓰러뜨린 후부터 백제국이 마한의 새로운 수장국이 되었다는 얘긴, 적어도 그 시점까진 백제국만의 일방적 주장에 불과했다.

바로 그랬기에 그 시점까진 백제국과 함께 목지국을 명목상 상전으로 받들던 침미다례가 서진한테는 마한 신미란 이름으로 따로 조공사를 보냈던 것이었고, 이것을 백제국에 대한 견제 시도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한편 백제가 중국에게 '마한'이란 이름으로 조공사를 보냈던 것은 물론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목지국도 '마한'이란 이름으로 잘도 수백년 동안 조공했었기 때문. 한편 고고학적으로 보면, 목지국으로 비정되는 천안 청당동 일대의 독자적 문화가 극적으로 크게 쇠락하는 것은 이미 3세기 후반경이며, 쇠락 자체의 시작은 3세기 중반까지로도 거슬러 올라가는 판국이다.

목지국으로 해석되는 천안 청당동 세력이 완전히 의미가 없다 싶을 정도로 해체되어 힘을 잃는 건 근초고왕이 재위하기도 전인 비류왕 재위기인 4세기 중반이므로, 근초고왕의 목지국 정복설은 적어도 현재로선 다수설이 아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백제국의 마한 영도국 자격에 이의를 제기하는 침미다례는 백제가 어떤 식으로든 손봐줘야 했으며, 이 과업은 근초고왕이 달성하여 그후로는 마한 연합의 영역 내에서 감히 백제의 영도국 자격에 이의를 제기하는 세력은 없어지게 된다. 그렇게 본다면 근초고왕이 마한 영역을 정복했다는 언급도 그닥 틀린 얘기는 아니게 된다. 애초에 고대 국가의 특성상 행정망과 통제 정도가 우리가 생각하는 조선 왕조에 비해 극도로 느슨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중앙 조정에 의해 강력하게 관철되고 통제되는 직접 지배가 아니었을 뿐.

이렇게 근초고왕의 목지국 정복설 자체가 의문시되는 현재 상황에선, 목지국에 처음으로 유의미한 타격을 주어 수장국으로서의 위신을 박탈한 때가 근초고왕이란 학설은 거의 완전히 설득력을 잃은 상황이다. 온조왕 때의 일로 소급된 해당 사건은 실제로는 고이왕-책계왕 당시 벌어진 일로 비정되고 있기, 때문. 그러니, 여하튼 백제국의 목지국에 대한 대놓고 하는 하극상 사건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연대보다 상당히 후대라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박순발의 《한성백제의 탄생》에 따르면 원삼국시대 유적인 하남 미사리 방형환호는 그 규모로 보아 수장층의 주거지가 일반민과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며, 마찬가지로 풍납동의 3중환호도 유적이 일부분만 확인되어 구체적인 규모는 알 수 없지만 환호내부에서 출토된 토기들로 보아 하남 미사리 유적의 환호와 동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것도 참조가능한 상황. 이러한 고고학적 증거들로 유추해보면, 서기 2세기 말까지는 각 소국들이 서로간에 뚜렷한 우열을 보이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백제가 서기 1세기에 마한을 타멸시키거나 복속시켰다는 주장은 아귀가 맞지 않다.

남방의 평정 - 신공황후의 모델?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발·남가라·녹국·안라·다라·탁순·가라 7국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몰아 서쪽으로 돌아서 고해진에 이르러 남만 침미다례를 도륙하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 왕 초고와 왕자 귀수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때 비리·벽중·포미·지반·고사의 읍,,【혹은 비리·벽중·포미지·반고의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俱集于卓淳 擊新羅而破之 因以 平定比自㶱南加羅㖨國安羅多羅卓淳加羅 七國 仍移兵 西廻至古奚津 屠南蠻忱彌多禮 以賜百濟 於是 其王肖古及王子貴須 亦領軍來會 時比利辟中布彌支半古 四邑 自然降服 >---- >《일본서기》 <진구황후> 49년 3월

>(전략) 성명왕(聖明王)이 말하길: 옛 나의 선조(先祖) 속고왕(速古王)[* 근초고왕의 다른 이름.], 귀수왕(貴首王)[* 근구수왕의 다른 이름.]의 치세에 안라국(安羅), 가라(加羅), 탁순 한기(卓淳 旱岐)[* 탁순은 국가명이다. 한기는 임금의 칭호이니 "탁순국의 임금"이란 뜻.] 등에게 처음 사신을 보내 통하였다. 두텁게 연결되어 친목을 다지니 (그들이) 자제(子弟)[* 백제가 아버지이자 형님, 가야 제국이 아들이자 아우.]가 되어 서로 융성하길 바랬다...(후략) >聖明王曰, 昔我 先祖 速古王, 貴首王之世, 安羅加羅卓淳旱岐等 初遣使相通. 厚結親好 以爲子弟, 冀可恆隆. >---- >《일본서기》 흠명 2년 4월 기록. 근초고왕의 남방 정책을 언급하고 있다.

* 이 목차에서는 그의 외정 중 남방 경략을 다룬다.

이 부분은 사실 《일본서기》에서 진구황후(신공황후)의 업적으로 쓰여 있는 것으로, 특히 '5읍(내지는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는 기록은 그동안 줄곧 임나일본부설의 주요 근거가 되어왔다. 그런데 근래 천관우를 시작으로 이도학, 이희진, 김현구 등 한국 측 사학자의 분석에 의해 이 정벌의 주도권자를 근초고왕으로 보는 '주체교체론'이 크게 대두되어 신빙성을 얻었다. 즉 근초고왕의 업적이 진구황후의 업적으로 바꿔치기되었다는 것. 예를 들면 야마토보다 북쪽에 있는 침미다례가 '남만', 즉 남쪽의 오랑캐라고 적혀 있다.

364년, 갑자년에 근초고왕은 구저, 미주류, 막고 세 사람을 가야 지방의 작은 나라 탁순국에 보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여기서 탁순국 왕에게 일본으로 가는 길을 물어보았다가 완곡하게 거절당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정보를 수집하여 한반도 남부의 정세를 파악하고 가야 지방의 각 소국과 교섭을 시도하는 등 사전 정지 작업을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

366년, 시마 - 노 - 스쿠네[* 노 이하는 존칭이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이 이렇게 존칭을 마구잡이로 써놓아서 조금 난감.]라는 야마토[* 이 대상이 구체적으로 야마토가 확실한지는 해석의 여지가 좀 있다. 《일본서기》가 이주갑인상 등 연대 인상을 진행하면서 중간 연대의 역사가 모조리 소급당하거나 사라져, 실질적으로 3세기 중후반의 중국 조공과 366년 백제 - 일본 관계 기록 사이의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왜인 침략 기사밖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 그러나 고고학적 성과에 따르면 이 즈음 야마토가 일본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측 인사가 탁순국 왕과 만나 이상과 같은 백제의 움직임을 접하게 되었다. 시마는 내친김에 종자 이하이와 탁순 사람 과고 두 사람을 백제로 보냈는데, 근초고왕은 이들을 후하게 대접하며 오색 비단과 각궁 화살 및 철정 40매를 이하이에게 주었다. 또 보물 창고를 열어서 여러 진기한 것들을 보여주었다.

367년, 이번에는 근초고왕이 보낸 구저, 미주류, 막고가 신라의 사신과 함께 야마토에 도착했다. 이 자리에서 구저가 야마토로 오는 길에 있었던 신라의 횡포를 까발리는데, 간단히 말해 신라가 구저 일행에게서 을 뜯었다는 것.

>우리들이 길을 잃어서 사비 신라[* 경남 양산시라는 주장이 있지만, 정확한 위치는 아직 연구 중. 일단 신라 영역인 건 확실하다.]에 이르렀는데 신라인들이 우리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석 달이 지난 후 죽이고자 하였는데, 이때 구저 등이 하늘을 향하여 저주하였더니 신라인들이 그 저주를 두려워하여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공물을 빼앗아 자기 나라의 공물로 하고 신라의 천한 물건을 우리 나라의 공물로 바꾸었습니다. 또 우리들에게 '만약 이 일을 말하면 돌아가는 날 너희들을 죽이겠다'고 하였습니다. >---- >《일본서기》 <진구황후> 47년

당시 신라는 가야와 야마토 사이에서 교역하며 이익을 취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한반도나 중국에서 물자와 문물의 수입이 절실하던 일본 세력은 걸핏하면 신라로 쳐들어가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런 마당에 신라에서 야마토로 가는 백제의 사신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진귀한 물건을 가만히 놔두었을 리 만무, 이런 상황이 된 것이다.

이상에서 말한 것처럼 안 그래도 신라에 시달리고 있던 야마토는 이 사건을 통해 제대로 플래그가 서게 되었고, 진구 황후는 함께 온 신라의 사신을 책망하는 데 이어서 '다케우치 - 노 - 스쿠네와 의논하고 지쿠마 - 노 - 나가히코[* 백제 기록에 직마 - 나 - 나가비궤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를 사자로 보내라'는 신탁을 받는다.

369년, 근초고왕은 드디어 행동에 나선다. 사백·개로가 백제 측 대표가 되어 탁순국에 이르고, 여기에 장군 목라근자·사사노궤가 군사를 이끌고 따라갔다. 《일본서기》의 과장된 표현에 따르면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신라와 더불어 가야 지방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7개국을 모아 실질적으로 백제 중심의 패권을 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만들어진 중국의 《양직공도》에도 가야의 소국들이 백제의 부용국이라는 기록이 있다.[[3]] 훗날 성왕은 이를 두고 '안라, 가라, 탁순의 한기들과 부형자제(父兄子弟)의 관계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때 일본 측 대표로는 아라타 - 노 - 와케와 가가 - 노 - 와케가 참석했다고 한다.

이어서 서쪽(전라도)으로 군대를 돌려 고해진에 이르러서 남만 침미다례를 격파하고, 지금의 전북 평야 지대에 해당하는 비리·벽중·포미·지반·고사(혹은 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 4읍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의 항복을 받았다. 과거 고해진을 강진, 침미다례를 해남으로 보고 이때 백제의 세력이 전남 땅끝까지 이르렀다고 보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었지만, 유물에 따른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 성과에 따르면 이후에도 전남에는 독자적인 세력이 셋 있었고 직접 지배 형태로의 전환은 나중에 이뤄졌을 가능성이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 있다. 나아가 고사산과 벽지산에서 일본 측 대표로 온 지쿠마 - 노 - 나가히코와 연이어 국교를 맹세한다.

침미다례는 흔히 《진서》 <장화전>의 '신미제국(新彌諸國)', 즉 20여 개국과 함께 나타난 '신미국'과 동일시되는데, 혹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의 '분신리아불례'(濆臣離兒不例)로 보기도 한다.[* 다만 이것은 같은 기록의 '신분첨국'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설도 만만치 않다.] 이 지역은 3세기 기리영 전투로 인한 목지국의 쇠락 이후 독자적으로 성장해 서진에 조공한 바 있는데, 아마도 전남 중에서도 서부, 즉 황해와 남해가 만나는 지점으로서 항로가 꺾이는 지역이기 때문에 중간에서 교역의 이익을 누린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침미다례에 대해서는 제주도설도 존재하지만, '탐라'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일본서기》에 모두 별도의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에 설의 확장은 어려워 보인다.

침미다례의 문제는 특히 이 원정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데, 유난히 침미다례에 대해서만 '남만'이라고 하여 경멸적인 표현을 쓰고 있고 침미다례를 '도륙, 도살(屠)'했다고 해 아예 갈아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주변의 5읍(내지는 4읍)이 항복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즉 근초고왕은 막 성장하던 영산강 유역 세력을 완전히 박살내버렸고, 백제국의 수장 자격 찬탈 이후 백제의 마한 대표성을 여전히 의문시하던 세력에게 백제의 힘과 마한 계승성을 확인시켜준 것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자주 등장하는 오해가 자꾸 침미다례 자체를 전남과 동일시하는 건데, 이는 틀린 관념이다. 그 당시 전남에는 세 별도의 고고학적 세력이 있었다. 광주를 중심으로 하는 전남 내륙 중동부, 훗날 가야에게 잠깐 포섭되기도 하는 전남 동쪽 해안 일대, 그리고 위에서 침미다례로 비정되는 영산강 유역 세력. 이 중에서 영산강 유역 세력이 그나마 세력이 커서 백제국에게 대놓고 게겨보다가 근초고왕 때 참교육당했던 거라고 보면 된다.[* 즉 마한 연합 내부에서 백제국이 이미 고이-책계왕 시절에 종주권은 진작에 잡았지만,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다소 비협조적이었던 세력이 침미다례였던 것이다.] 침미다례는 이후에도 한성백제가 개로왕 피살이란 초유의 환란을 당했을 때 또 다시 독자 행보를 걸으려 하지만, 근초고왕 시절보다 훨씬 어려운 시절의 백제가 굳이 무력을 동원할 것 없이 회유만으로 일단락했던 것을 보면 근초고왕이 이 당시 침미다례에게 얼마나 큰 타격을 주고 체계적으로 관리에 들어갔는지 알 수 있다.

다만, 남방 전쟁과 대(對) 고구려 전쟁은 같은 해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현실성에 다소 논란이 있다. 또한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목라근자목만치의 연대 문제도 이 시기에 얽혀 있으며, 후술하지만 고고학적으로 일본에 백제계 문화가 전혀 침투하지 못한 것이 확인되는 상황이다. 이러한 문제로 기록의 연대를 2갑자 차이(이주갑인상)에서 한 갑자 더 낮춰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고구려와의 전쟁

>왕이 태자와 더불어 정병 30,000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로 쳐들어가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왕 사유가 힘을 다해 맞서 싸웠으나 누가 쏘았는지 모르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26년조[* 백제본기에는 몇 월에 있던 사건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고구려본기>에서는 10월에 있었던 사건이라 명기하고 있다.] ||width=100%|| || 치양평양성의 위치. [[4]] ||

* 이 문단에서는 그의 외정 중 북방 경략을 다룬다.

근초고왕이 남방 경략의 위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있을 즈음인 369년 9월,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갑작스레 2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남으로 진군해 치양에 주둔하며 민가를 약탈해[* 이는 고구려 쪽으로 잠깐 시선을 돌려보면 요동의 모용선비족이 세운 전연이 너무 강해져 고구려는 서쪽 공략을 포기해야 했고, 그 대신 한반도 중남부의 패자로 성장하는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서, 더불어 근초고왕이 남방 경략에 매진하는 사이 혹은 남방 경략을 완수한 직후 북방에 생긴 군사적 맹점을 노린 것으로 추정된다.] 근초고왕이 태자인 부여수를 시켜 이를 격퇴했다. <근구수왕 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죄를 짓고 도망간 사기라는 인물이 백제로 돌아와 '정예군은 고국원왕 근처의 군대 뿐이므로 그들만 박살내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밀고한 것을 따라 공격해 승기를 잡았다고 한다. 이후 부여수는 수곡성 서북까지 진군했으나 막고해가 도가의 말을 인용해, 너무 깊게 들어왔으니 그만둘 것을 주청했고 이에 정벌을 마쳤다고 한다.(치양 전투)

369년 11월, 근초고왕이 한강 남쪽에서 군대를 사열하며 황색 깃발을 사용했는데, 황색은 중앙을 뜻해 중국에서는 황제의 색으로 사용했으니, 이는 고구려에게 승리한 백제가 황제국임을 과시한 것이다.[[5]]

이후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분쟁은 격화되어, 2년 뒤에는 재차 치고 내려오는 고구려 군대를 패수 위에서 역관광보낸 뒤 북진해 평양성을 포위하여 고구려 왕인 고국원왕전사시킨다.(평양성 전투)

이 일로 고구려백제의 관계는 훗날 신라진흥왕대 성장해서 고구려와 싸울 일이 없어지기 전까지는 수백 년 동안 말 그대로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버렸다.[* 이 둘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가 장수왕 대에 세운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백제를 경멸하는 단어인 백잔 즉 백제 떨거지라는 단어를 쓸 정도였다. 그리고 동시대에 백제의 왕이였던 개로왕은 외교서신에 고구려를 이리와 승냥이라고 비유할정도로 사이가 매우 안좋아진다. 그나마 관계를 회복했을때는 두나라의 국운이 기울어져가던 때이고 이마저도 나제동맹, 나당동맹과 같은 동맹수준이라기보단 같은 목표를 가진 국가 정도의 관계였다.]

진서》에 따르면 고국원왕을 죽인 이듬해인 372년에 근초고왕이 동진으로부터 '진동장군영낙랑태수(鎭東將軍領樂浪太守)'라는 작호를 받아 낙랑(평양 일대)의 지배를 확인받았다. 이는 백제왕이 중국 사서에 최초로 등장한 기록이다.

일본 규슈 진출설

||<tablealign=center> width=100% || || 칠지도 ||

야마토를 용병으로 써서 남방을 평정한 이후 백제에서는 구저를, 야마토에서는 지쿠마 - 노 - 나가히코를 보내 양국 사이에 사신 왕래가 이어지다가 372년에 이르러서는 칠지도와 '칠자경'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고사기》에 따르면 이 시기에 아직기왕인이 야마토로 건너와 천자문논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서기》에서는 아직기와 왕인의 도일을 이보다 한참 뒤인 404년이라 하여 기록이 서로 다르다.]

《일본서기》에서는 자국중심주의 기록 특성상 이 당시 백제가 왜를 섬긴 것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외국에서 사신이 오면 무조건 인질이라고 쓰는 식이다.] 근대에 발견된 칠지도에 적힌 문장을 보면 반대로 백제왕이 천황을 아랫 사람 취급하고 있다. 때문에 가상 인물 진구 황후가 근초고왕 업적을 낚아챈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 것처럼, 실제로는 《일본서기》 내용과 반대로 근초고왕이 야마토에 우위를 과시한 것 아니냐는 학설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칠지도 문서 참조.

그렇지만 1990년대부터 근초고왕의 남방 원정 기사가 6세기의 정치 질서를 정당화시키는 수단으로서 후대에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제시되었고(연민수 등), 2009년 홍성화와 2010년 조경철 등에 의해 칠지도의 연대가 408년이라는 설이 제시되는 등 《일본서기>》 신공 49년조와 그 전후 기사들의 신뢰도가 많이 의심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입지가 많이 줄어든 설이다. 다만, 4세기 후반에 백제계 호(壺)가 출토되는 등 북부 규슈의 일부 호족과 백제가 교섭한 흔적은 있다고 한다.[[6]] 물론 이런 토기의 출토만을 가지고 백제가 규슈에 진출했다느니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런 식의 확대 해석을 한다면 중국식 벽돌무덤인 무령왕릉이 지어진 송산리 고분군은 빼도 박도 못하는 중국의 식민지가 된다. 말 그대로 물자가 오고 간 교류의 흔적이라고 보는 정도가 적당하며, 사실 그러한 외교적 경로를 만들어낸 것 또한 절대 적지 않은 업적이다.

백제가 규슈에 진출했던 것 아니냐는 장팔현 박사의 주장도 있다. >《삼국지》<위지> -왜인전-에 보면, 왜국의 규슈 지역에 '이백지국(已百支國)'이란 소국이 보이는바, 아무래도 왜국에 세워진 백제 이주민 계열의 나라가 아닐까 한다. 이백지국의 ‘이(已)’는 ‘예전’이라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이백지국이란 예전에 백지국(백제국) 출신들이 만든 나라라는 뜻이 아닐까 한다. 결론적으로 제(濟)도 지(支)로 고대에는 통하는 자였다.

그러나 고대 한국어에서 지(支)는 간지(干支)-한기(旱岐)가 서로 통하는 데서 알 수 있듯 'ki'로 읽혔으며, 제(濟)와는 음이 통하는 사례가 없다. 한자의 해석에 대해서도 이(已)는 뜻으로,[* 이(已)는 '이미'라는 뜻으로 자주 쓰이는 글자이며, 기본적인 품사가 어조사로 '예전'이라는 명사형의 뜻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구(舊), 고(古), 전(前) 등의 글자를 놓아두고 이 글자를 과거의 것이라는 뜻으로 쓸 이유가 없다.] 백지(百支)는 음으로 풀이하는 등 일관성이 없다.[* 일본어에서는 일관적으로 음으로 읽어 '이하키(いはき)'로 읽을 수 있으며, 이는 '이와(いわ, 石/磐)', '키(き, 木/城)' 등 일본의 흔한 일본 명사와도 통한다.] 또한 이백지국은 <위지> -왜인전-에 등장하는 여왕국 북쪽에서 사마국(斯馬國) 다음에 있는 국가로 등장하는데, 여기서 등장하는 여왕국=야마타이국 자체가 규슈에 있다고 하는 설이 1970년대 이후로는 거의 퇴조하여 1980년대 이후에는 긴키 지방에 야마타이국이 있다는 설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1980년대 이후, 일본 열도의 전방후원분에 대한 발굴 조사 자료가 축적되고 위계 구조에 대한 해석이 정립되면서 '전방후원분 체제'를 주창한 츠데 히로시 등에 의해 3세기 중반에 이미 긴키 지방에 일본 열도의 정치적 중심지가 있다는 설이 주류가 되었다. 국내에도 많이 늦었지만 2010년대에는 그나마 관련 번역서가 조금씩 나오고 있다.] 그러한 입장에서 사마국(斯馬國)은 현재의 긴키 남부, 와카야마 현에 있던 시마국(志摩國)에 비정되며, 그보다 더 북쪽에 있다는 이백지국은 규슈에 있을 수가 없다. 다시 말해, 현재로서는 저런 주장의 입론 자체가 잘못되었다.

게다가 이 시기 일본에서 발굴되는 한국계 유물은 백제보단 가야 계통의 것이며, 야마토 정권의 수도가 위치한 긴키 지역에서 백제 계통의 문물은 5세기가 되어서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근초고왕은 일본에 실질적으로 문물을 전파한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유혈 사태로 남한에서 백제의 정치적 영향력과 일원적인 패권을 확립하고, 이로서 국제적인 외교 분쟁이 해결되어 왜에 가야의 문물이 안정적으로 유입된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대한민국 국사 교과서에 기술되었던 백제의 규슈 지방 진출은 한국 사학계 일부에서 칠지도 명문과 《일본서기》의 내용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에 근거한 학설로, 지금도 국내외적으로 확정된 학설이 아니다. 요즘 교과서에서는 규슈 진출이 아니라 규슈와의 교류로 수정되었다.

중국 산동 진출설

근초고왕의 산둥 진출설은 근초고왕의 업적 중 가장 근거가 부족한 학설로, 한때 국정 교과서 시절에는 교과서에 실려 있었던 내용이었으나, 현재는 많은 교과서에서 해당 내용이 삭제되고 있는 추세다.[* 최태성은 근초고왕의 산둥 진출에 관해 과거 한때 교과서에 실린 내용이지만 요즘 교과서에는 실리지 않는 내용이니 주의하라고 설명하고 있다.]

백제의 산둥 진출 주장은 신채호정인보의 주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인보와 신채호는 민족주의적 사관을 갖고 역사 연구에 임했으나, 중국 기록의 단장취의와 잘못된 확대 해석 등으로 수많은 사서에 기록된 한사군의 존재를 부정하는 등 현대에는 설득력이 없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정인보는 후술할 백제의 요서경략설을 긍정하면서 백제가 요서에 진출하기엔 지리적으로 너무 멀기 때문에, 백제가 먼저 산동에 진출한 뒤 요서로 세력을 확장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산둥 진출에 대한 근거로 먼저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에 강병이 100만으로 남으로는 오·월을 침범하고, 북으로는 유·연·제·노를 어지럽혀 중국의 커다란 좀이 되었습니다.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蠹 >---- >《삼국사기》 46권 < 최치원 열전>

제·노 지방은 중국의 산둥 반도 지역을 뜻한다. 유·연 지방은 요서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는 '중국의 커다란 좀이 되었다'를 수식하기 위한 과장된 문식으로 사실로 보기 어렵다. 한창 환빠가 기승을 부리던 때에는 저 기록만 보고 '고구려와 백제가 100만 병사를 부렸다 → 고구려와 백제는 한반도에 없었다'는 주장까지 나왔으나 현재에는 비웃음거리 이상이 되지 않는다.

또한 원나라 때 간행된 산둥 지방의 지리서 《제승》(齊乘)에서 "황현(黃縣)의 서남 25리 고자성(古嵫城)에 ‘백지래왕(百支萊王)’을 제사지내는 사당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규슈 진출 부분에도 나와있듯이 고대에 제(濟)와 지(支)는 통하는 글자였다. 정인보는 이에 근거하여 '백지래왕'을 '백제래왕'으로 해석했다. 고작 사당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백제가 산동 지방을 정복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서기 2년부터 자료가 수집된 한서》 <지리지>에 백지래왕사(百支萊王祠)가 진작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정인보의 주장은 틀렸다.

신채호도 정인보처럼 저서 《조선상고사》에서 백제가 산둥 지방에 진출했다고 적어놓았다. 판보싱(潘博星) 박사는 《남제서》의 백제 동성왕이 산동의 성양태수를 제수한 기록과 《북제서》의 중국이 백제 위덕왕을 '동청주(산동)자사'로 봉한 기록을 백제의 산동 진출 근거로 들었다.[[7]]

요서경략설

근초고왕 말년에 중국 요서 지방을 점령했다는 설로, 현 국사 교과서에서도 지도상에 백제의 진출 경로 중 하나로 그리고 있지만 백제의 요서경략설이 진실인지 오류인지도 불분명하고 그 시기도 확실하지 않다. 대표적으로 중국 남조에는 요서 경략 기록이 있는데, 정작 그 요서와 붙어있는 중국 북조에는 그 기록이 없다. 따라서 백제의 영토였다는 주장부터 영토가 아니라 백제 이주민 집단 등의 영향력이 미치던 지역이었다거나 아예 허구라는 이야기까지 여러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다. 더 자세하게 알고 싶으면 요서경략설 항목을 참고할 것.

김상기, 김철준 등의 역사학자들은 백제의 요서 경략을 근초고왕 말년의 일로 추측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중국 문헌들에는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가 요서를 차지했다고 적혀있다. (즉 고구려의 요동 점령 → 백제의 요서 점령) 한편 고구려가 미천왕 시대에 요동을 침공한 일이 있는데, '고구려의 요동 점령'을 미천왕 이야기로 보면, 미천왕에 이어서 근초고왕이 요서를 차지했다는 것이니 순서가 맞고 시기도 비슷하다.[* 광개토대왕 시대에도 고구려가 요동 점령을 했는데 그때는 백제가 하도 고구려에게 얻어터져서 힘을 못 쓸 터라 해외 진출을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광개토대왕 시대를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 중국 문헌들에서 백제의 요서 점유가 진나라 시대(晋代) / 진나라 말기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근초고왕 말년 시기는 중국 동진 시대 말년이니 시기가 맞다.
* 당시 중국 화북은 팔왕의 난에서 오호십육국시대으로 이어지는 혼란한 상황이었다. 반면 백제는 근초고왕 시대에 세력이 강성했으며 해외와 교류하면서 해상 활동이 왕성했다. 이렇게 유리한 상황이었다면 백제가 요서를 점령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근거로 내세우는 중국의 사서 역시 남조(유송, 남제, 등) 역사서에만 나오고 정작 남북조시대에 요서, 산동 지방을 지배했던 북조(북위, 동위, 서위, 북주, 북제 등)의 사서에는 백제의 요서 경략 관련 기사가 나오지 않아 교차검증이 어려워 더더욱 알 수 없는 상황.

당시 백제의 일식 관측 기록이 요서 지방에서 관측했어야 나오는 수치로 된 것도 있다는데, 사실 오차도 많아 무조건 믿기는 곤란하고, 상술했듯 신라방 비스무리한 백제 이주민 세력이 진출해서 일정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일 수도 있다.

워낙 국내학계에서도 논쟁이 뜨거운 설인지라 국사교과서에서도 중립적으로 이런설이 있다 정도나 진출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애매하게 설명해놓는 경우가 많다. 학설이 갈리는 등 애매한 것들은 시험에 출제하지 않는 역사과목시험[* 대표적으로 수능이나 공무원시험 등등] 특성상 시험에 나오지도 않고, 이 논란을 잠재울만한 기록과 고고학 유적이 나오지 않는 이상 나오지도 않을 예정이다.

당연한 소리지만 요서경략설을 긍정할 경우에도, 환빠들을 비롯한 일부 유사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대륙백제가 있었다는 건 아니다. 《환단고기》나 대륙설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근초고왕의 백제가 당시 지구권 인류 전체를 통틀어 최강이었다는 식의 주장은 헛소리.

말년의 기록

근초고왕의 말년은 좋지만은 않았다.[* 백제 왕 치고 말년이 좋은 왕이 거의 없다. 대표적으로 개로왕은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고, 성왕관산성 전투에서 진흥왕과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또한 삼국시대의 유명한 정복군주 중에선 근초고왕만 말년이 안좋다. 물론 광개토대왕의 경우 30대, 진흥왕도 40대에 나름 단명해 근초고왕만큼 장수하진 못했지만.] 고구려에 힘쓰는 사이 신라가 서서히 강성해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기 때문.

>백제 독산성(禿山城) 성주가 300명을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으므로 왕이 그들을 받아들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니, 백제 왕이 글을 보내 말하였다. "두 나라가 화친을 맺어 형제가 되기를 약속했었는데, 지금 대왕께서 우리의 도망한 백성을 받아들이니 화친한 뜻에 크게 어긋납니다. 이는 대왕이 바라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바라건대 그들을 돌려 보내십시오." >(왕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백성은 일정한 마음이 없다. 그러므로 생각나면 오고 싫어지면 가버리는 것은 진실로 그렇기 때문이다. 대왕께서는 백성이 편치 않음은 걱정하지 않고 도리어 과인을 나무라는 것이 어찌 이렇게 심한가?" 백제에서 그 말을 듣고 다시는 말하지 않았다. >---- >《삼국사기》 <내물 마립간 본기> 18년

신라에게 굴욕을 당한 사례로 373년 신라 <내물 마립간 본기>의 독산성 관련 기록이 있다. 당시 백제의 독산성 성주가 300여 명을 이끌고 신라에 투항했는데, 이에 근초고왕이 돌려주기를 요청했으나 내물 마립간에게 까이고 아무 말도 못했다. 독산성 성주가 신라에 망명한 이유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반란을 모의하다 발각되었거나[* 이전 아달라 이사금 시절에는 신라의 길선이란 자가 같은 이유로 백제에 망명한 적도 있었다.]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문책이 두려워 제3국 신라로 망명한 것으로 보는 설이 있다.

>三十年 秋七月 高句麗來攻北鄙水谷城。 陷之 王遣將拒之 不克。 王又將大擧兵報之 以年荒不果。 >30년 가을 7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임금이 장수를 보내 방어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임금이 다시 병사를 크게 동원하여 보복하려 했으나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30년 375년에는 고구려에게 수곡성을 빼앗겼지만, 흉년이 들어 보복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 근초고왕은 승하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근초고왕이 승하하기 1년 전 374년에 고구려에서는 희대의 정복군주가 될 광개토대왕이 태어났다.

평가

백제의 최전성기를 이끈 백제사 최고의 명군이자 삼국시대의 정복 군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사실 오늘날 근초고왕이 대한민국에서 평가받는 모습은 한국 고대사가 평가받는 것처럼 때로는 과장, 때로는 축소로 얼룩져 있다. 처음부터 근초고왕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고 있다는 것. 가장 큰 문제는 사료의 부족이겠지만 대한민국 사회가 색안경을 끼고 본 탓도 크다. 흔히 알려진 업적은 고구려와 싸워서 평양성까지 치고 올라갔고 싸우던 와중에 고구려 고국원왕이 백제군의 화살을 맞아 사망한 정도인데 그의 치적은 그것 뿐만이 아니다. 바로 그 직전까지 무수한 정복 활동을 진행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러나 상당 부분에서 신뢰도 문제가 있다.] 중국에 기록상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국가로서 인정받고 일본과도 외교 관계를 최초로 여는 등 외교적으로도 백제라는 이름을 각인시켜 백제를 고구려와 맞서는 한 축으로 당당히 성장시켰다.

백제의 전성기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신라의 진흥왕과 비견될 만하지만 광개토대왕은 18세에 즉위하자마자 백제 10성을 점령하는 등 치세를 전쟁과 정복으로 보낸 진정한 정복 군주이며 진흥왕도 10대 후반~20대의 나이 때 영토를 즉위 시점의 2배~3배로 확장시켰다. 하지만 근초고왕은 약 20년 동안이나 을 축적하고 이를 바탕으로 재위 후반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복에 나섰다는 점이 다르다. 광개토대왕과 진흥왕이 젊은 패기와 뛰어난 군사적 식견으로 전장을 휩쓰는 패왕 유형의 군주였다면 근초고왕은 약 20년 동안이나 힘을 비축하며 가만히 기다리다가 치밀한 국제 정세의 분석과 조정을 통해 최소한의 전력 소모로 단번에 패권을 휘어잡는 것을 보면 대단히 치밀하고 경제적인 성격의 군주가 아니었을까 한다.[* 《삼국사기》에서도 근초고왕의 성격을 원대한 식견이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를 보면 근초고왕은 신라, 가야, 일본과 부형자제(父兄子弟)의 관계를 맺으면서 한반도 중남부의 독자적인 패권을 구축했다. 이것은 이후 광개토대왕의 간접적인 복속 정책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정되며 지역적 연맹 국가에서 국제적 패권 국가로 다시 통일적 영토 국가로 발전하는 시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삼국통일로 나아가는 포문을 열었다.

하지만 근초고왕은 말년에 백제 중심의 한반도 남부 질서가 이미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죽었다는 점은 불행이다. 373년에 독산성 성주가 주민들과 함께 신라에 투항했을 때 대응하지 못했고 375년에는 수곡성을 고구려 소수림왕의 침공으로 빼앗겼음에도 보복하지 못했다.

근초고왕 사후 아들인 근구수왕이 어떻게든 백제의 전성기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약화되던 백제 중심의 국제 질서는 382년 왜국 장군 카츠라기노 소츠히코팀킬과 396년 광개토대왕, 이후 장수왕의 추가 남정으로 거의 완전히 붕괴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는 딱히 근초고왕의 실책이라거나 백제 자체의 국력 쇠퇴에서 기인한 문제라고만은 볼 수 없다. 백제 자체가 옛 마한 거수국들을 차례차례 공납-간접 지배-직접 지배로 전환하는 큰 흐름은 이 시기에도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 백제는 근초고왕 이후에도 무령왕 시기까지 마한 지역을 직접 지배 방식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지속했기에 백제의 절대적인 국력 자체는 이후에도 차근차근 성장해나가고 있었다고 봄이 옳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생긴 것은 애초에 고구려 자체의 국력이 이미 고국원왕의 선왕들인 미천왕 시절부터 백제를 압도하고 있었던데다 정치 체계 발전도 앞서 있었고 하필 근초고왕이 재위하던 시기에 신라 또한 진한 일대에서의 패권을 움켜쥐며 이전에 비해 비약적으로 강해진데 있다. 백제가 약해졌다기보다는 고구려가 전연에게 당한 패배로 일시 상실한 원래의 잠재력을 회복한데다 신라 역시 비약적으로 강해져 백제를 따라잡기 시작했다는 말. 백제가 경기도 일대를 어떻게든 지켜내면서도 충청도전라도 일대를 모두 직접 지배지로 편성했다면 얘기는 달라졌을 수도 있었겠지만 475년 개로왕 사망과 위례성 함락 사건 이래로 그런 일은 끝내 일어나지 않게 된다.

기타

* 이도학이 주장한 '만주의 백제가 남하하여 한강 유역의 백제를 정복했다는 설'이 사실이라면 만주 한가운데 있었던 백제 세력이 남하하여 한강 유역의 백제국을 정복한 다음 마한가야를 평정하는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백제 건국 시조 중 1명은 부여위구태왕이다. 한성백제의 도성 풍납토성건축 시점이 아무리 빨라야 제8대 왕인 고이왕 때부터인 점도 의아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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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특별시석촌동 고분군은 백제의 유적인데 이 중 가장 큰 석촌동 제3호분은 4세기 ~ 5세기 백제 왕릉으로 보이며 학계에서는 근초고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물론 그냥 추정이고 확실한 것은 아무도 모른다.

대중매체에서

소설

가히 환빠들의 놀이터. 근초고왕 대 백제가 요서로 진출했다는 주장은 그나마 애교다. 크고 아름다운 백제의 중원 대륙 영토에 심지어 일본까지 정복한 경우도 있다.[* 다만 일본의 경우 몇몇 뇌피셜에 쓰일만한 정황 근거는 있다보니 대륙설보다야 그나마 들을만한데 여기서도 주장이 엇갈려 "당시 일본은 사실상 백제의 속국이었다." VS "백제가 일본 일부 지역을 정복하다 중단했다." VS "백제가 뭔 초강대국이라고 왜곡 과장 그만해라."까지 주장이 얽히고 설켜 난전을 벌인다. 문제는 명확한 자료가 나오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그닥 해결될 기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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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쥬신제국사》
 * 만악의 근원. 일약 한국에서 환빠의 지평을 넓힌 큰 별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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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내용상 교양서라고 해야겠지만 내용이 내용인지라...]
 * 만악의 근원 2. 《대쥬신제국사》에서 시작된 대륙 백제를 본격적으로 널리 알린 장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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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인》
 * 송은일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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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초고대왕》
 * 지도만 봐도 알겠지만, 이미 만악의 근원 수준을 초월창조적인 작품. 핑클도 아는 국군의 주적의 스토리 작가가 쓴 소설. 《천부경》을 목차 제목으로 쓴데다가 근초고왕이 야마토타케루노미코토(日本武尊)라는 패드립을 저질렀다. 4권 설명에는 "일본 국명의 비밀이 환(桓)에서 풀렸다." 이쯤 되면 임나일본부설이랑 비슷해서 자뻑이라 생각하기에도 무시무시하다.
* 《근초고왕》
 * 대륙 백제는 여기도.
* 《백제엔 근초고왕이 있다》
 * 여기도 대륙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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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륙의 한》
 * 이문열이 쓴 소설. 그래도 위 판타지급 소설들보다는 상대적으로 고증에 충실해서 전체적인 스토리는 근초고왕에게 밀려난 계왕의 왕자가 선대의 원한을 풀고 요서로 이주해 중원의 광풍 속에서 백제인들의 영역을 마련한다는 내용으로 어찌어찌 끼워맞추면 역사상으로도 그럴듯하게 전개된다. 드라마 근초고왕의 원작이라고는 하지만 역시 내용에서는 드라마랑 비할 바 못된다. 작가도 드라마는 불평이 있는지 드라마 방영 이후 새로 낸 재간본의 서문에는 드라마의 원작 변형에 대한 불만이 실려있기도 했다. 물론 이 책 역시 요서 경략이 근초고왕 때라는 점을 비롯해 몇 가지 오류가 있기는 하지만 소설임을 감안하면 그나마 봐줄만한 수준으로 백제사에 대한 역사 지식을 각권 부록으로 소개해놓기도 했다.
* 《고구려(소설)》
 * 김진명이 쓴 소설에서는 근초고왕의 본명인 부여구로 나오고 병사들을 위해 솔직하게 항복을 구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첫 등장. 고구부가 찾아 다녔던 천하의 영웅 중 1명이나 높은 평가는 받지 못했다. 후에 고구려로 도망간 백제의 죄인을 돌려달라는 구실로 고구려에 전쟁을 일으켰고 휘하 병사들이 고국원왕을 죽이나 고구부의 협박에 의해 군사를 물리게 된다.

드라마 근초고왕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근초고왕(근초고왕))]

교양서

* 《전쟁의 발견》
 * 이희진의 교양서. 위 문서의 상당 부분이 여기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만 봐도 역시 전공자이니만큼 이상의 창조적인 작품들과는 격이 다르다. 1부에서는 근초고왕과 광개토대왕을 위시한 삼국시대 중요 전쟁사가 나열되고, 2부에서는 고대 전쟁을 스타크래프트에 비유하여 굉장히 쉽고 혁신적으로 고대 전쟁의 기초 개념을 설명한다.
* 《근초고왕을 고백하다》
 * 이희진의 교양서. 상당히 전작을 우려먹은 티가 나지만 그래도 드라마의 역사 왜곡을 비판하는 측면이 간간이 발견되어 그 의의를 둔다. 다만 1부의 근초고왕에 비해 2부의 성왕은 거들 뿐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 여기서 이희진은 근초고왕의 중요한 업적으로 백제와 고구려가 양축을 형성하고 있었던 당시 한반도 국제 정세에서 백제를 한 축의 중심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점을 꼽았다.

만화

* 웹툰 삼국전투기에서는 근고왕이라서인지 그냥 거목으로 등장한다. 비류 전투 편 막바지에 고구려의 행보를 언급할 때 잠깐 등장했고, 연에게 수도를 털리고 화풀이로 백제를 공격한 고구려의 왕을 전사시켰다고 언급된다.

게임

* <천년의 신화>에서 백제군의 영웅으로 나오는데 게임상 칠지도를 휘두르며 늙은 왕처럼 나온다.

파일:The Legend of Cao Cao Buyeo Gu.png

* <삼국지조조전 Online>에서는 결사계백의 패라는 계보의 미등장 데이터로 남았다. 장수 이름은 본명인 부여구로 나온다. 병과는 군주. 능력치는 무력 78, 지력 83, 통솔 96, 민첩 78, 행운 86. 본래 플레이어블로 등장할 예정이었다가 제작진이 능력치 논란을 우려해 일부러 등장시키지 않았다. 데이터상의 장수 특성은 반격강화/본대기합으로 좋지 않지만 극초창기에 이득규가 임의로 부여한 것이고 만약 정식 등장했다면 항우 때 그랬던 것처럼[* 항우는 정식출시 이전 원래 데이터에서는 기마공격 강화 무시, 일기당천이었다.] 좋은 전용 특성으로 바뀌어 나왔을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

[include(틀:삼국사기)] [근초고왕 본기] 一年 근초고왕이 즉위하다. 二年一月 천지신명에 제사지내다. [* 재위 2년부터 21년 사이의 기록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二十一年春三月 신라에 사신을 보내다. 二十三年春三月 일식이 일어나다 二十三年 신라에 사신을 보내다. 二十四年秋九月 치양에서 고구려군을 무찌르다. 二十四年冬十一月 한수 남쪽에서 군사를 사열하다. 二十六年 패하에서 고구려군을 무찌르다. 二十六年冬十月 평양성에서 고국원왕을 죽이다. 二十六年 수도를 한산으로 옮기다. 二十八年春二月 진에 사신을 보내다. 二十八年秋七月 청목령에 성을 쌓다. 二十八年 독산성의 성주가 신라로 도망치다. 三十年秋七月 고구려가 침입해 수곡성을 빼앗다. 三十年冬十一月 근초고왕이 죽다.

고구려와 관련된 것을 빼면 반도 안 남는다.

일본서기》 기록

일본 중심으로 쓰인 사서이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 봐서 해석하면 몹시 곤란하다.

||<tablewidth=100%><width=15%> 진구 황후 46년[br](246년, 366년)[* 뒤에 붙인 연도는 이주갑인상으로 왜곡된 연도를 다시 고친 것이다.] ||3월에 시마(시마노 스쿠네, 斯摩宿禰/志摩宿禰)를 탁순국에 보내니, 탁순국 왕이 지난 갑자년(364) 7월에 백제 사람 구저, 미주류, 막고[* 당시 백제의 장수 막고해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세 사람이 우리 나라에 와서 백제 왕이 동방에 일본이라는 귀한 나라가 있음을 듣고 그 나라에 조공하게 했으니, 길을 안내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거절하였다고 말하다. 이에 시마가 종자 이하이와 탁순 사람 과고를 백제에 보내니, 초고왕이 후하게 대접하고 각종 보물을 과시하며 오색 비단과 각궁 화살과 철정을 이하이에게 주다.|| || 진구 황후 47년[br](247년, 367년) ||4월에 백제 왕이 보낸 구저, 미주류, 막고와 함께 신라의 사신이 와서 조공하다. 태후와 태자가 기뻐하면서 선왕이 바라던 나라 사람들이 왔는데 선왕이 보지 못하는 것이 슬프다고 말하자 신하들이 눈물을 흘리다. 구저 등이 중간에 신라에서 공물을 빼앗아 강제로 바꾸었다고 말하다. 이에 신라 사신을 책망하고 치쿠마(치쿠마노 나가히코, 千熊長彦)[* 백제기에는 직마나나가비궤(職麻那那加比跪)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를 신라와 백제에 보내어 조사하다.|| || 진구 황후 49년[br](249년, 369년) ||3월에 아라타(아라타노 와케, 荒田別)와 카가(카가노 와케, 鹿兒別)를 장군으로 삼아 구저와 함께 탁순국으로 보내어 신라를 치려고 하다. 원군을 청하자 목라근자, 사사노궤, 사백, 개로가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화,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7국을 평정하다. 서쪽으로 돌아서 고해진에 이르러 남만 심미다례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다. 백제 왕 초고와 왕자 귀수가 군대를 이끌고 의류촌으로 와서 아라타와 목라근자 등을 만나자 비리, 벽중, 포미, 지반, 고사의 읍이 항복하다. 백제 왕과 치쿠마가 벽지산과 고사산에 올라 번국의 맹세를 하고, 치쿠마를 도읍으로 데려가 후대한 뒤 구저와 함께 보내다.[* 이 대목에 주의가 필요한데, 대부분 학자들은 연대를 120년 뒤로 늦추고 정벌의 주체를 진구 황후가 아닌 근초고왕으로 바꾸어서 근초고왕의 정복으로 해석한다. 백제계 도래인들이 가져간 백제의 사료들을 《일본서기》 편찬에서 여러 변조를 거쳐 이용했다고 보는 것.]|| ||<|2> 진구 황후 50년[br](250년, 370년) ||2월에 아라타 등이 돌아오다.|| ||5월에 치쿠마가 구저와 함께 돌아오다. 다사성을 백제에게 주어 오가는 역으로 삼게 하다.|| ||<|2> 진구 황후 51년[br](251년, 371년) ||3월에 구저가 다시 조공하러 오다. 태후가 태자에게 백제와 친할 것을 당부하다.|| ||구저를 치쿠마와 함께 보내다. 백제 왕 부자와 번국의 맹세를 하다.|| || 진구 황후 52년[br](252년, 372년) ||9월에 치쿠마가 구저와 함께 돌아오다. 구저가 칠지도칠자경 등 여러 보물을 바치다. 백제 왕이 손자 침류왕에게 일본과 친할 것을 당부하다.|| || 진구 황후 55년[br](255년, 375년) ||백제 초고왕이 죽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