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국장도감의궤
순조국장도감의궤 (純祖國葬都監儀軌) |
|
대표명칭 | 순조국장도감의궤 |
---|---|
한자표기 | 純祖國葬都監儀軌 |
주제 | 흉례(凶禮) |
작성주체 | 국장도감(國葬都監) |
의례담당자 | 홍석주(洪奭周) |
작성지역 | 한성부 |
작성시기 | 1835년(헌종 1년) |
소장처(원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어람용) 규장각한국학연구원(춘추관) |
판본 | 필사본 |
표기문자 | 한자, 이두 |
수량 | 어람용: 총 2책 212장(제2책 212장, 제3책 172장) 춘추관: 총 4책 708장(제1책 195장, 제2책 211장, 제3책 172장, 제4책 130장) |
크기 | 어람용: 46.2×33.8 춘추관: 45.9×32 |
도설 | 85면(채색) |
반차도 | 64면(제2책)(채색) 총 길이: 약 2,176㎝ |
목차
정의
1834년 11월부터 1835년 4월까지 치러진 순조(純祖)의 장례를 치르는 국장(國葬)[1]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내용
정조의 후궁인 박준원(朴準源)의 딸 수빈 박씨(綏嬪 朴氏)를 어머니로 하여 정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맏아들인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일찍 죽어 1800년(정조 24) 왕세자에 책봉되고 그 해 6월에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즉위와 함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실시되어 김관주(金觀柱)와 심환지(沈煥之) 등의 벽파가 정치를 주도하였으나, 1803년(순조 3) 말에 친정을 시작한 후 몇 단계에 걸쳐 그들을 축출하였다. 19세가 되던 1808년(순조 8) 이후로 정승 김재찬(金載瓚)의 보필을 받아 국정을 파악하고 왕의 권한을 강화하려 하였으나, 소수 명문 가문이 주도하는 정치질서를 개편하지 못하고, 이후 1809년(순조 9)의 유례없는 기근과 1811년(순조 11)의 홍경래의 난에 부딪히면서 좌절하게 되었다.[2] 순조의 병은 표면상으로는 종기였고,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했으며 두통이 약간 있고, 대소변이 고르지 못한 병이었다. 순조는 승하하던 날 정약용(丁若鏞)과 박제안(朴齊顔) 등을 불러 약원 대신들과 함께 참여하도록 해 환부에 바르는 약과 먹는 약으로 처방을 했지만 효험이 없자 대보를 왕세손에게 전하라고 했다. 관례에 따라 전국의 산천에 마지막 기도를 올리고 궁성 호위를 명했다.[3]
1834년 11월 13일 해시(亥時)에 경희궁 회상전에서 승하하자 내시가 복을 행하였다. 다음 날은 11월 14일에 목욕과 습을 거행했다. 11월 15일에 소렴을 거행하고, 11월 16일에 경희궁 장락전에 빈전을 차렸으며, 11월 17일에 대렴을 하고, 18일에 성복을 했다. 11월 19일에 빈청회의(賓廳會議)를 통해 묘호가 '순종(純宗'), 시호가' 문안무정헌경성효(文安武靖憲敬成孝)', 전호(殿號)가 '효성(孝成)', 능호(陵號)가' 인릉(仁陵)'[4]으로 정하였다. 1835년 4월 17일 발인을 행하여, 다음날 능소에 도착하였고, 4월 19일 찬궁(欑宮)을 열고, 현궁(玄宮)을 내리는 일을 거행하고, 반우(返虞)하여 창덕궁 선정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5]
목록
제1책: 도청의궤(都廳儀軌)
제2책: 일방의궤(一房儀軌), 이방의궤(二房儀軌)
제3책: 삼방의궤(三房儀軌)
제4책: 우주소의궤(虞主所儀軌), 표석소의궤(表石所儀軌), 지석소의궤(誌石所儀軌), 별공작의궤(別工作儀軌), 분장흥고의궤(分長興庫儀軌), 분전설사의궤(分典設司儀軌)
해제
김혁, "순조국장도감의궤 2책", 의궤 검색,
김혁, "순조국장도감의궤 3책", 의궤 검색,
나종현, "순조국장도감의궤", 의궤 검색,
판본
국립중앙박물관: 어람용(2632), (2631)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춘추관본(奎 13669), 오대산본(奎 13668), 예조본(奎 13670), 정족산성본(奎 1367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순조)국휼등록((純祖)國恤謄錄)』 (K2-2972), (K2-2973)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순조국장도감의궤 | 순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순조국장도감의궤 | 헌종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순조국장도감의궤 | 곤룡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순조국장도감의궤 | 왕의 대례복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순조국장도감의궤 | 상례 | A는 B를 기록하였다 | A ekc:documents B |
순조국장도감의궤 | 복 | A는 B를 기록하였다 | A ekc:documents B |
순조국장도감의궤 | 습 | A는 B를 기록하였다 | A ekc:documents B |
순조국장도감의궤 | 목욕 | A는 B를 기록하였다 | A ekc:documents B |
순조국장도감의궤 | 소렴 | A는 B를 기록하였다 | A ekc:documents B |
순조국장도감의궤 | 대렴 | A는 B를 기록하였다 | A ekc:documents B |
순조국장도감의궤 | 성복 | A는 B를 기록하였다 | A ekc:documents B |
순조국장도감의궤 | 발인 | A는 B를 기록하였다 | A ekc:documents B |
순조국장도감의궤 | 국립중앙박물관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순조국장도감의궤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순조국장도감의궤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
1834년 11월 13일 | 순조가 경희궁 회상전에서 승하하였다 |
1834년 11월 14일 | 순조의 시신을 목욕시켰다 |
1834년 11월 15일 | 순조의 시신을 소렴했다 |
1834년 11월 17일 | 순조의 시신을 대렴했다 |
1834년 11월 17일 | 순조의 시신을 성빈했다 |
1834년 11월 18일 | 종친과 백관들이 성복했다 |
1835년 4월 17일 | 순조의 시신을 발인했다 |
1838년 | 『순조국장도감의궤』가 편찬되었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7.4655982 | 127.0795955 | 사적 제194호인 인릉(仁陵)은 순조와 순원왕후의 무덤이다 |
시각자료
가상현실
주석
- ↑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장례는 국장(國葬)이라하며, 세자와 세자빈 이하는 예장(禮葬)이라 한다.
- ↑ 김혁, "순조국장도감의궤 2책", 의궤 검색,
『외규장각의궤』online , 국립중앙박물관. - ↑ 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 546쪽.
- ↑ "서울 헌릉과 인릉",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 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 545~547쪽.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김문식, 신병주 저, 『조선 왕실기록문화의 꽃 의궤』, 돌베개, 2005.
- 서울대학교 규장각, 『규장각소장 분류별의궤해설집』,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5.
- 서울대학교 규장각, 『규장각소장 의궤 해제집(3)』,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5.
- 신명호, 『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 돌베개, 2002.
- 이현진, 『왕의 죽음, 정조의 국장』, 글항아리, 2015.
- 이현진, 『조선 왕실의 상장례』, 신구문화사, 2017.
- 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