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룡
서상룡(徐相龍, 1862生~1944)
의병
1896년 류인석과 함께 충북 제천, 충주에서 일군(日軍)과 전투하여 승리, 원주 장산에서 패한후 중국으로 망명 순국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릉(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정의
개항기 화순 출신의 의병.
가계
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사필(士弼), 호는 라은(蘿隱). 서강(徐岡)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서광순(徐光淳)이고, 어머니는 나주 임씨 임태갑의 딸이며 부인은 연안 김씨(延安金氏)와 탐진 최씨(耽津崔氏)이다.
활동 사항
서상룡(徐相龍)[1852~1944]은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에게 학문을 배웠다. 1895년 11월에 안승우(安承禹), 이춘영(李春永) 등이 강원도 원주에서 거의한 후 유인석(柳麟錫)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제천(堤川) 지역에서 진을 재편하였다. 1896년(건양 1)에 유인석(柳麟錫) 의병장이 이끄는 제천 의진(堤川義陣)에 합류하여 활동하였다. 제천 의진은 1896년 2월에 충주성을 점령하기도 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후퇴하게 되었다. 이어 일본군과 여러 차례 교전을 하였으나, 강원도(江原道) 원주(原州), 황해도(黃海道) 장산(長山)에서 패하였다. 그 후 유인석을 수행하여 서간도 지역으로 망명한 후, 중국 북경(北京)에 있던 원세개(袁世凱)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하는 등 계책을 도모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3년 만에 귀국하여 은거하였다.
묘소
묘는 화순군 도곡면 성산사(星山祠) 건너편 산록에 있었으나 국립 현충원으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나은 서공 의적비(蘿隱徐公義蹟碑)가 화순군 도곡면 신성리에 있다. 1968년 1월 상순에 민홍기(閔弘基)가 비문(碑文)을 짓고, 능주의 유림들이 비를 세웠다. 성산사(星山祠) 입구 좌측에는 나은 선생 서공 상용 유적비(蘿隱先生徐公相龍遺蹟碑)가 있다. 1991년에 이진백(李鎭白)이 글을 지었다. 2000년에는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삼산정(三山亭)
신성리 호동마을에 있다. 단층 팔작지붕 골기와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다. 구한말 의병 나은 서상룡(蘿隱 徐相龍)의 듯을 기리기위해 마을 안쪽 그의 묘지 앞 개울가에 세워진 정자다.
그는 우국지사 기우만(奇宇萬)의 제자로서 1896년에 은마 은암 류인석(毅菴 柳麟錫)의 의병대에 가담하여 춘천에서 항일운동을 활동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하여 정자를 짓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이루지 못하였다.
그의 아들 서내준(徐內駿)이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1946년에 지었다가 훼손되고 다시 최근에 재건했다. 정자 앞에는 성산사가 자리하고 있다. 그는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스승인 기우만과 서상룡선생을 기리는 시가 정자내 현판에 거액되어 있다.
三山으로 이름하여 덕봉뒤에 세었으니/ 竹栢이 서로 엉켜 열길이나 높았도다
두곳에 齋와 亭은 함께 義를 지켰고/ 松沙 柳翁 兩先生께 전심을 받았도다. 기특한 飛鳳은 하늘높이 솟구쳤고/ 활발한 寒泉은 머름밖에 깊도다 오랜 사업 이제 모두 이뤘으니/ 어진 소문 맑은 소리 백세토록 전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