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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고궁박물관, 『영친왕일가복식』, 국립고궁박물관, 2013. | * 국립고궁박물관, 『영친왕일가복식』, 국립고궁박물관, 2013. | ||
*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2. | *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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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송옥, 『조선왕조 궁중의궤 복식』, 수학사, 1991. | * 유송옥, 『조선왕조 궁중의궤 복식』, 수학사, 1991. | ||
* 韓國精神文化硏究院, 『傳統的 生活樣式의 硏究(中)』,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2. | * 韓國精神文化硏究院, 『傳統的 生活樣式의 硏究(中)』,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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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9일 (일) 12:31 판
당의 (唐衣) |
|
대표명칭 | 당의 |
---|---|
한자표기 | 唐衣 |
이칭별칭 | 당고의(唐古衣), 당저고리(唐赤古里), 당한삼 |
구분 | 의복 |
착용신분 | 왕비, 왕세자비, 내명부, 외명부, 일반 백성 |
착용성별 | 여성 |
정의
조선시대 여성들이 저고리 위에 입는 대표적인 의례용 복식이다.
내용
왕비, 왕세자빈, 내명부, 외명부는 각종 궁중 의례와 명절, 평상시에도 착용하였고, 일반 백성은 혼례복이자 상례의 염습의로 착용하였다. 당저고리, 당적삼, 당한삼이라고도 한다. 조선후기 학자들의 기록에서는 당의의 기원을 중국으로 보고 있으나,[1] 현재는 대체로 조선 전기의 옆트임장저고리에서 변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2]저고리와 달리 길이가 길고, 겨드랑이 아래의 긴 트임이 있으며, 앞뒤자락과 도련이 둥근 곡선 형태이다. 또한 저고리로 불릴 만큼 같은 구성을 이루고 있다. 깃과 고름‧섶이 있고, 소매의 형태 또한 다른 예복과는 다르게 저고리 소매처럼 좁다. 예복 소매에 달리는 한삼과 같이 당의의 소매 끝에는 흰색 거들지가 달리고 가슴에는 보를 달았다. 저고리의 깃이 둥근 깃으로 변화하는 조선 말기에도 당의의 깃은 당코깃을 고수 하였다.
조선전기의 옆트임 장저고리는 길이가 70~82cm 정도이다. 길의 반 정도를 금선단으로 장식한 당저고리, 거들지형 끝동이 부착된 장저고리, 민저고리 형태의 장저고리 등의 형태이다. 민저고리 형태의 장저고리는 명주나 무명의 소박한 소재를 사용하고 깃‧고름‧끝동에 어떠한 장식도 보이지 않아 의례용이라기 보다는 일상복으로 추정된다. 17세기에서 18세기는 전 시대의 장저고리에 비해 화장이 짧아지고 품이 좁아지고, 당의 소매 끝에 넓은 거들지나 [한삼]]을 부착한다. 고름은 모두 자주색으로 앞 시기에 비해 길어졌으나 넓지 않은 편이다.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는 품‧진동‧배래가 더욱 좁아지고 곡선화 되었다. 앞과 뒤의 도련은 진동선에서 직선으로 내려와 아래쪽에서 양끝이 버선코처럼 곡선을 이룬다. 20세기는 19세기와 비슷해 진동이 넉넉하고 소매배래는 진동에서 소매길이의 중간지점까지 수평을 이루다가, 수구 쪽에서 급격한 곡선을 이루며 줄어들었다.[3]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황후 | 당의 | A는 B를 착용하였다 | A ekc:wears B |
황태자비 | 당의 | A는 B를 착용하였다 | A ekc:wears B |
왕비 | 당의 | A는 B를 착용하였다 | A ekc:wears B |
왕세자빈 | 당의 | A는 B를 착용하였다 | A ekc:wears B |
내명부 | 당의 | A는 B를 착용하였다 | A ekc:wears B |
외명부 | 당의 | A는 B를 착용하였다 | A ekc:wears B |
일반 백성 | 당의 | A는 B를 착용하였다 | A ekc:wears B |
당의 | 족두리 | A는 B와 같이 착용하였다 | A ekc:goesWith B |
시간정보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덕혜옹주 문항라 부금 당의.[4]
청주한씨(16세기 중반 추정)묘 출토 직금 당의[5]
광해군비(17세기 전기) 당의[6]
해평윤씨(1660~1701)묘 출토 당의[7]
영왕비(1901~1989) 당의[8]
영왕비(1901~1989) 당의 소매 부분 '소례복 당고의' 표시[9]
청연군주(1754~1814) 묘 출토 당의[10]
덕온공주(1822~1844) 녹색 당의[11]
영왕비(1901~1989) 당의 착용 사진.[12]
덕혜옹주(1912~1989)[13]
주석
- ↑ 그 예로는 송문흠(宋文欽)의 『한정당집(閒靜堂集)』, 정약용(丁若鏞)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박규수(朴珪壽)의 『거가잡복고(居家雜服考)』』 등이 있다.
이른바 장배자(長背子)라는 것은 긴소매와 양쪽 옷자락이 서로 덮이고 양쪽 겨드랑이를 꿰매지 않아 지금 장부의 긴저고리와 대략 같으니 조금 짧으면 단배자(短背子)가 되는 것이니 지금의 당의이다.(“其所謂長背子, 引爲長袖, 兩裾相掩, 兩腋不縫者, 與今丈夫長襦略同, 稍短之則當爲短背子, 卽今之唐衣也.") 출처: 『閒靜堂集』, 卷7, 「雜著, 婦人服飾攷」.
- ↑ 그 예로는 복식학자인 석주선, 이경자, 유송옥 등이 있다.
당의는 본래 당나라 유제(遺制)로서 기본형은 그대로이면서 소매가 넓어지고 짧아졌다는 정도로서 근세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아직 우리들 귀에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당의‧당혜‧저고리 깃과 섶에서 볼 수 있는 당코 등은 그 예가 되겠다.” 출처: 석주선, 『한국복식사』, 보진재, 1971, 122쪽.
당의는 역대 가례도감의궤의 행렬도나 회화 자료의 분석을 통해 왕조 초의 장유(長襦)가 변형된 국속옷이라고 해야 옳다.” 출처: 이경자, 「우리 의생활의 전통양식」, 『傳統的 生活樣式의 硏究(中)』, 1982, 165쪽.
유송옥: 중요민속자료 제 3호인 광해군비 중궁 유씨의 양 옆이 트인 긴 저고리 유물을 근거 - ↑ 김은희, 「朝鮮時代 唐衣 變遷에 관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65~94쪽.
- ↑ 국립고궁박물관(http://www.gogung.go.kr/) 소장.
- ↑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名選 下』, 단국대학교 출판부, 2005, 126쪽.
- ↑ 문화재청, 『문화재대관2-복식, 자수편』, 문화재청, 2006, 105쪽.
- ↑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名選 下』, 단국대학교 출판부, 2005, 127쪽.
- ↑ 국립고궁박물관, 『영친왕일가복식』, 국립고궁박물관, 2013, 64쪽.
- ↑ 김은희, 「朝鮮時代 唐衣 變遷에 관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42쪽.
- ↑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名選 下』, 단국대학교 출판부, 2005, 128쪽.
- ↑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名選 下』, 단국대학교 출판부, 2005, 132쪽.
- ↑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2, 134쪽.
- ↑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2, 201쪽.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국립고궁박물관, 『영친왕일가복식』, 국립고궁박물관, 2013.
-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2.
- 권혜진, 「당의에 관한 연구-궁중발기와 유물을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 김아람, 「복식 고증을 통한 복온공주 혼례 친영반차도 구현」,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
- 김은희, 「朝鮮時代 唐衣 變遷에 관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 백숙자, 「朝鮮時代 唐衣 構成에 對한 硏究」,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 석주선, 『한국복식사』, 보진재, 1971.
- 申順子, 「嘉禮都監儀軌에 나타난 唐衣에 대한 고찰」, 세종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9.
- 유송옥, 『조선왕조 궁중의궤 복식』, 수학사, 1991.
- 韓國精神文化硏究院, 『傳統的 生活樣式의 硏究(中)』,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