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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육조(六曹)의 하나로 [[남궁|남궁(南宮)]]ㆍ[[춘관|춘관(春官)]]ㆍ[[의조|의조(儀曹)]]라고도 한다. [[예조]]는 1392년 [[태조]] 원년에 설치되었으며,<ref>『增補文獻備考』 卷218, 「職官考」, <六官>, “禮曹”</ref>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갑오경장(甲午更張)]] 때 관제개편으로 폐지되었다.<ref> | + | 육조(六曹)의 하나로 [[남궁|남궁(南宮)]]ㆍ[[춘관|춘관(春官)]]ㆍ[[의조|의조(儀曹)]]라고도 한다. [[예조]]는 1392년 [[태조]] 원년에 설치되었으며,<ref>『增補文獻備考』 卷218, 「職官考」, <六官>, “禮曹”</ref>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갑오경장(甲午更張)]] 때 관제개편으로 폐지되었다.<ref>『高宗實錄』 31년(1894) 6월 28일:「軍國機務處啓」.</ref> 1392년(태조 1) 제향ㆍ빈객ㆍ조회ㆍ과거ㆍ진헌 등의 업무를 보도록 규정하였고,<ref>『太祖實錄』 1년(1392) 7월 28일:「定文武百官之制」.</ref> 1405년(태종 5) 예악ㆍ제사ㆍ연향ㆍ과거ㆍ복축(伏祝) 등을 맡도록 규정하였다.<ref>『太宗實錄』 5년(1405) 3월 1일: 「禮曹詳定六曹分職及所屬以聞」.</ref> 이후 『[[경국대전|경국대전(經國大典)]]』에 예악ㆍ제사ㆍ연향ㆍ조빙ㆍ학교ㆍ과거 등을 담당하도록 규정되었으나 왕권이나 여타 관서와의 역학관계에 따라 업무가 변동되었다. [[예조]]의 위상은 [[태종]] 때까지 [[이조]]ㆍ[[병조]]ㆍ[[호조]]에 이어 4번째였다가 [[세종]] 즉위 후에는 [[이조]]ㆍ[[호조]]에 이어 3번째가 되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57687&cid=46622&categoryId=46622 예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네이버.</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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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7일 (토) 18:11 판
예조(禮曹) | |
대표명칭 | 예조 |
---|---|
한자표기 | 禮曹 |
이칭 | 남궁(南宮), 춘관(春官), 의조(儀曹) |
창립시대 | 조선 |
창립일 | 1392년 |
해체일 | 1894년 |
주요업무 | 예악, 제사, 연향, 외교, 학교, 과거 등 |
담당업무 | 길례, 흉례, 군례, 빈례, 가례의 모든 의례 |
목차
정의
조선시대 예악, 제사, 연향, 외교, 학교, 과거 등을 관장하던 관서이다.[1]
내용
업무
육조(六曹)의 하나로 남궁(南宮)ㆍ춘관(春官)ㆍ의조(儀曹)라고도 한다. 예조는 1392년 태조 원년에 설치되었으며,[2]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甲午更張) 때 관제개편으로 폐지되었다.[3] 1392년(태조 1) 제향ㆍ빈객ㆍ조회ㆍ과거ㆍ진헌 등의 업무를 보도록 규정하였고,[4] 1405년(태종 5) 예악ㆍ제사ㆍ연향ㆍ과거ㆍ복축(伏祝) 등을 맡도록 규정하였다.[5] 이후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예악ㆍ제사ㆍ연향ㆍ조빙ㆍ학교ㆍ과거 등을 담당하도록 규정되었으나 왕권이나 여타 관서와의 역학관계에 따라 업무가 변동되었다. 예조의 위상은 태종 때까지 이조ㆍ병조ㆍ호조에 이어 4번째였다가 세종 즉위 후에는 이조ㆍ호조에 이어 3번째가 되었다.[6]
구성
판서 1인, 참판 1인, 참의 1인, 정랑 3인, 좌랑 3인이 있었다.[7] 돌발적인 업무와 중대한 업무는 판서ㆍ참판ㆍ참의가 하급관리들을 지휘하여 처리하였으며, 일상사는 정랑과 좌랑을 중심으로 처리하였다. 판서는 승문원 제조와 비변사 제조를 겸하였고,[8] 참판은 봉상시와 예빈시 제조를 겸하여 사무에 참여하였다. 1405년(태종 5) 소속관서로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ㆍ경연(經筵)ㆍ서연(書筵)ㆍ성균관(成均館)ㆍ통례문(通禮門)ㆍ봉상시(奉常寺)ㆍ예빈시(禮賓寺)ㆍ전의감(典醫監)ㆍ사역원(司譯院)ㆍ서운관(書雲觀)ㆍ교서관(校書館)ㆍ문서응봉사(文書應奉司)ㆍ종묘서(宗廟署)ㆍ사온서(司醞署)ㆍ제생원(濟生院)ㆍ혜민국(惠民局)ㆍ아악서(雅樂署)ㆍ전악서(典樂署)ㆍ사련소(司攣所)ㆍ선관서(膳官署)ㆍ도류방(道流房)ㆍ복흥고(福興庫)ㆍ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ㆍ빙고(氷庫)ㆍ종약색(種藥色)ㆍ대청관(大淸觀)ㆍ소격전(昭格殿)ㆍ도화원(圖畵院)ㆍ가각고(架閣庫)ㆍ전구서(典廐署)ㆍ사직단(社稷壇)ㆍ관습도감(慣習都監)ㆍ승록사(僧錄司)가 있으며 각 도의 학교와 의학도 예조에 속했다.[9] 이들 관서는 『경국대전』에 홍문관(弘文館)ㆍ예문관ㆍ춘추관ㆍ성균관ㆍ승문원(承文院)ㆍ통례원(通禮院)ㆍ봉상시ㆍ예빈시ㆍ전의감ㆍ사역원ㆍ관상감(觀象監)ㆍ교서관ㆍ내의원(內醫院)ㆍ장악원(掌樂院)ㆍ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ㆍ종학(宗學)ㆍ종묘서ㆍ소격서ㆍ사직서ㆍ빙고ㆍ전생서(典牲署)ㆍ사축서(司畜署)ㆍ혜민서ㆍ도화서ㆍ활인서(活人署)ㆍ귀후서(歸厚署)ㆍ사학(四學)ㆍ각전(各殿)ㆍ각릉(各陵)으로 성문화되었다.[10] 예조에 소속된 관서들은 대부분 자율적으로 업무를 처리하였으나, 기능이 중시된 홍문관ㆍ예문관ㆍ성균관ㆍ춘추관ㆍ승문원ㆍ봉상시 등은 겸관 및 예조와 협의하여 업무를 처리하였다. 갑오경장 이후에는 업무의 대부분을 학무아문(學務衙門)이 담당하였고, 일부는 궁내부(宮內府)가 맡았다.[11]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예조 | 제례 | A는 B를 담당하였다 | A ekc:administrates B |
예조 | 책례 | A는 B를 담당하였다 | A ekc:administrates B |
예조 | 혼례 | A는 B를 담당하였다 | A ekc:administrates B |
예조 | 관례 | A는 B를 담당하였다 | A ekc:administrates B |
예조 | 연향례 | A는 B를 담당하였다 | A ekc:administrates B |
예조 | 등극례 | A는 B를 담당하였다 | A ekc:administrates B |
예조 | 대사례 | A는 B를 담당하였다 | A ekc:administrates B |
예조 | 상례 | A는 B를 담당하였다 | A ekc:administrates B |
예조 | 영접례 | A는 B를 담당하였다 | A ekc:administrates B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
1392년 | 예조가 설치되었다 |
1894년 | 예조가 폐지되었다 |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 ↑ 『經國大典』 卷1, 「吏典」, <京官職>, “正二品衙門”, ‘六曹’
- ↑ 『增補文獻備考』 卷218, 「職官考」, <六官>, “禮曹”
- ↑ 『高宗實錄』 31년(1894) 6월 28일:「軍國機務處啓」.
- ↑ 『太祖實錄』 1년(1392) 7월 28일:「定文武百官之制」.
- ↑ 『太宗實錄』 5년(1405) 3월 1일: 「禮曹詳定六曹分職及所屬以聞」.
- ↑ "예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네이버. - ↑ 『經國大典』 卷1, 「吏典」, <京官職>, “正二品衙門”, ‘六曹’
- ↑ 『大典會通』 卷1, 「吏典」, <京官職>, “正一品衙門”, ‘備邊司’
- ↑ 『太宗實錄』 5년(1405) 3월 1일: 「禮曹詳定六曹分職及所屬以聞」.
- ↑ 『經國大典』 卷1, 「吏典」
- ↑ 『高宗實錄』 31년(1894) 6월 28일:「軍國機務處啓」.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태조실록』
- 『태종실록』
- 『세조실록』
- 『고종실록』
- 『경국대전』
- 『증보문헌비고』
- 『대전회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