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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범일은 어머니가 해를 받아드는 태몽을 꾼 뒤 13개월 만에 태어났으며, 날 때부터 머리에는 부처님 머리 모양으로 나발이 있고, 정수리에는 구슬이 있는 특이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고 한다.<ref>김신곤, 김봉규, "본래심(本來心)을 강조한 동방의 보살 - 사굴산문 범일", 『佛脈 한국의 선사들』, 우리출판사, 2004, 221쪽.</ref> | |
− | 신라 때 양가의 딸이 명주(옛 강릉) 굴산에 살고 있었으나 나이가 들도록 시집을 못 갔다.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햇빛이 배를 비추자 돌연히 산기(産氣)가 있었다. 아비가 없는 아들을 낳자 집안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 것 같아서 아기를 얼음 위에다 버리니 새들이 날아와 아기를 덮어 감쌌다. 밤이 되자 하늘에서 상서로운 빛이 비추었다. 아기를 도로 데려다 길렀는데, 이름을 범일이라 하였다. | + | 강릉 지역에서 전승되는 범일의 탄생담은 다음과 같다. |
− | + | {{Blockquote|신라 때 양가의 딸이 명주(옛 강릉) 굴산에 살고 있었으나 나이가 들도록 시집을 못 갔다.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햇빛이 배를 비추자 돌연히 산기(産氣)가 있었다. 아비가 없는 아들을 낳자 집안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 것 같아서 아기를 얼음 위에다 버리니 새들이 날아와 아기를 덮어 감쌌다. 밤이 되자 하늘에서 상서로운 빛이 비추었다. 아기를 도로 데려다 길렀는데, 이름을 범일이라 하였다. | |
− | 명주 학산마을의 양갓집 규수가 우물에 물을 길으러 갔다. 바가지에 물을 뜨니 해가 담겼고, 처녀는 그 물을 마시고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하여 몰래 뒷산 학바위에 버렸으나, 며칠 뒤에 가보니 학이 붉은 구슬을 입에서 내어 먹이면서 아기를 돌보고 있었다. 처녀는 아기가 하늘이 아는 자손이라고 생각하여 다시 집에 데려와 길렀다. | + | |출처=장정룡, "[http://folkency.nfm.go.kr/kr/topic/%EB%8C%80%EA%B4%80%EB%A0%B9%EA%B5%AD%EC%82%AC%EB%8B%B9%EC%8B%A0%ED%99%94/5340 대관령국사당신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속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민속박물관, 작성일: 2016년 11월 28일.}} |
− | + | {{Blockquote|명주 학산마을의 양갓집 규수가 우물에 물을 길으러 갔다. 바가지에 물을 뜨니 해가 담겼고, 처녀는 그 물을 마시고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하여 몰래 뒷산 학바위에 버렸으나, 며칠 뒤에 가보니 학이 붉은 구슬을 입에서 내어 먹이면서 아기를 돌보고 있었다. 처녀는 아기가 하늘이 아는 자손이라고 생각하여 다시 집에 데려와 길렀다. | |
− | + | |출처=황루시, "[http://folkency.nfm.go.kr/kr/topic/%EB%B2%94%EC%9D%BC%EA%B5%AD%EC%82%AC/2167 범일국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속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민속박물관, 작성일: 2016년 10월 2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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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범일의 탄생담은 태양을 숭배하는 신화구조를 보이며, 일광(日光)을 받아들이는 꿈을 꾸었거나, 해가 배를 비추었거나, 햇빛이 비친 물을 마시고 임신이 되었다는 식으로 일관되게 지속되고 있다.<ref>장정룡, "[http://folkency.nfm.go.kr/kr/topic/%EB%8C%80%EA%B4%80%EB%A0%B9%EA%B5%AD%EC%82%AC%EB%8B%B9%EC%8B%A0%ED%99%94/5340 대관령국사당신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속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민속박물관, 작성일: 2016년 11월 28일.</ref> | 이와 같이 범일의 탄생담은 태양을 숭배하는 신화구조를 보이며, 일광(日光)을 받아들이는 꿈을 꾸었거나, 해가 배를 비추었거나, 햇빛이 비친 물을 마시고 임신이 되었다는 식으로 일관되게 지속되고 있다.<ref>장정룡, "[http://folkency.nfm.go.kr/kr/topic/%EB%8C%80%EA%B4%80%EB%A0%B9%EA%B5%AD%EC%82%AC%EB%8B%B9%EC%8B%A0%ED%99%94/5340 대관령국사당신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속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민속박물관, 작성일: 2016년 11월 28일.</ref> | ||
2017년 9월 10일 (일) 16:16 판
범일(梵日) | |
대표명칭 | 범일 |
---|---|
영문명칭 | Beomil |
한자 | 梵日 |
생몰년 | 810(헌덕왕 2)-889(진성여왕 3) |
시호 | 통효대사(通曉大師) |
탑호 | 연휘(延徽) |
이칭 | 품일(品日) |
성씨 | 김씨(金氏) |
출신지 |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 |
승탑 | 강릉 굴산사지 승탑 |
목차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통효대사 범일(通曉大師 梵日)은 810년(헌덕왕 2) 음력 1월 10일에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명주 도독(都督)[1]을 지낸 김술원(金述元)이며, 어머니는 문씨(文氏)이다.[2] 『조당집(祖堂集)』에는 김술원이 범일의 할아버지로 기록되어 있다.[3]
탄생설화
범일은 어머니가 해를 받아드는 태몽을 꾼 뒤 13개월 만에 태어났으며, 날 때부터 머리에는 부처님 머리 모양으로 나발이 있고, 정수리에는 구슬이 있는 특이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고 한다.[4]
강릉 지역에서 전승되는 범일의 탄생담은 다음과 같다.
신라 때 양가의 딸이 명주(옛 강릉) 굴산에 살고 있었으나 나이가 들도록 시집을 못 갔다.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햇빛이 배를 비추자 돌연히 산기(産氣)가 있었다. 아비가 없는 아들을 낳자 집안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 것 같아서 아기를 얼음 위에다 버리니 새들이 날아와 아기를 덮어 감쌌다. 밤이 되자 하늘에서 상서로운 빛이 비추었다. 아기를 도로 데려다 길렀는데, 이름을 범일이라 하였다. | ||
출처: 장정룡, "대관령국사당신화", |
명주 학산마을의 양갓집 규수가 우물에 물을 길으러 갔다. 바가지에 물을 뜨니 해가 담겼고, 처녀는 그 물을 마시고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하여 몰래 뒷산 학바위에 버렸으나, 며칠 뒤에 가보니 학이 붉은 구슬을 입에서 내어 먹이면서 아기를 돌보고 있었다. 처녀는 아기가 하늘이 아는 자손이라고 생각하여 다시 집에 데려와 길렀다. | ||
출처: 황루시, "범일국사", |
이와 같이 범일의 탄생담은 태양을 숭배하는 신화구조를 보이며, 일광(日光)을 받아들이는 꿈을 꾸었거나, 해가 배를 비추었거나, 햇빛이 비친 물을 마시고 임신이 되었다는 식으로 일관되게 지속되고 있다.[5]
출가수행
범일은 824년(헌덕왕 16) 15세가 되던 해에 출가하고자 부모께 의논하였다. 양친은 "속세 인연이 선과(善果)[6]이니 가히 그 뜻을 꺾지 못하겠다"하고 허락하였다. 이에 머리를 깎고 산에 들어가 수도하다가 20세가 되던 829년(흥덕왕 4) 경주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7]
구법유학
범일은 831년(흥덕왕 6) 왕자 김의종(金義宗)과 함께 당나라로 갔다. 중국의 여러 고승들을 찾아 공부하였는데, 그 가운데 특히 제안(齊安)을 만나 득도의 계기를 얻었다. 제안의 문하에서 6년 동안 머물다가 유엄(惟儼)을 찾아가 선문답(禪問答)을 나누고 크게 인가를 받았다.[8]
그러던 중 범일은 844년 당(唐)나라 무종(武宗)의 회창폐불(會昌廢佛)[9]을 겪게 된다. 범일은 반년간 은거하면서 선정을 닦는 등 고난의 시기를 보내다가, 남종선(南宗禪)의 조사(祖師)인 혜능(慧能)의 영탑에 참배하기도 하였다.[10]
귀국 및 활동
범일은 847년(문성왕 9)에 귀국하여 대략 3년여를 경주에서 머물렀다. 그러던 중 851년(문성왕 13) 명주도독 김공(金公)의 청으로 굴산사(崛山寺)로 옮겨 40여 년 동안 후학들을 교화하였다.[11][12]
이 때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이 차례로 범일을 국사(國師)로 받들어 계림으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13]
범일의 문하에는 십성제자(十聖弟子)가 있었다고 하는데 정확히 알 수 없고, 행적(行寂), 개청(開淸)이 선문을 빛내어 구산선문으로 계승되었다.[14]
입적
범일은 889년(진성여왕 3) 문인들을 불러놓고, "내 이제 영결하고자 하니 세속의 부질없는 정분으로 어지러이 상심하지 말 것이며, 모름지기 스스로의 마음을 지켜 큰 뜻을 깨뜨리지 말라"고 당부한 뒤 입적(入寂)하였다. 시호는 통효대사(通曉大師)이며, 탑호는 연휘(延徽)이다.[15]
범일이 입적하던 당시의 모습은 제자인 개청의 탑비인 낭원대사 오진탑비의 비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문덕(文德) 2년[16] 여름에 통효대사가 입적하니, 대중들은 모두 검은색 두건(頭巾)[17]을 썼으며, 절학(絶學)의 슬픔[18]이 배나 더하였고, 스승을 잃어버린 아쉬움 또한 더욱 간절하였다. 그러므로 정성을 다하여 보탑(寶塔)을 수축하고, 급히 비석을 세워 항상 송문(松門)을 수호하였으며, 여러 차례 초구(草宼)들의 동구(洞口) 차단을 크게 힐책하였다. | ||
출처: 이지관, "강릉 지장선원 낭원대사 오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4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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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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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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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0년 | 범일이 태어남. |
824년 | 범일이 출가함. |
829년 | 범일이 경주에서 구족계를 받음. |
831년 | 범일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남. |
847년 | 범일이 귀국함. |
851년 | 범일이 강릉 굴산사에 주석함. |
889년 | 범일이 강릉 굴산사에서 입적함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 ↑ 신라시대에 주(州)를 담당했던 지방장관. "도독",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김흥삼, "범일",
『디지털강릉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영길, "범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신곤, 김봉규, "본래심(本來心)을 강조한 동방의 보살 - 사굴산문 범일", 『佛脈 한국의 선사들』, 우리출판사, 2004, 221쪽.
- ↑ 장정룡, "대관령국사당신화",
『한국민속대백과사전』online , 국립민속박물관, 작성일: 2016년 11월 28일. - ↑ 착한 행위를 하여 받는 좋은 과보.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선과",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정동락, 「통효 범일(810-889)의 생애에 대한 재검토」, 『민족문화논총』 Vol.24,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1, 64쪽.
- ↑ 고운기, "범일 - 대관령의 산신이 된 신라의 승려",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중국 당(唐)나라 무종(武宗)의 회창 연간(會昌年間)에 있었던 불교 탄압. "회창의 폐불",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정동락, 「통효 범일(810-889)의 생애에 대한 재검토」, 『민족문화논총』 Vol.24,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1, 74-75쪽.
- ↑ 정동락, 「통효 범일(810-889)의 생애에 대한 재검토」, 『민족문화논총』 Vol.24,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1, 77쪽.
- ↑ 김영길, "범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영길, "범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정영식, "통효범일", 『조당집 읽기』, 운주사, 2016, 290쪽.
- ↑ 김영길, "범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당(唐)의 소종연호(昭宗年號). 889년(진성여왕 3).
- ↑ 상주가 쓰는 두건(頭巾)이니, 일반인들은 상주(喪主)가 되면 삼베로 만든 황색두건(黃色頭巾)을 쓰지만, 스님들은 상주가 되면 속법(俗法)을 따르지 않고 장삼(長衫)과 가사(袈裟)를 입고 먹물색(緇墨) 두건(頭巾)을 사용하였음.
- ↑ 배움에 대한 절망적인 슬픔.
참고문헌
- 고운기, "범일 - 대관령의 산신이 된 신라의 승려",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김신곤, 김봉규, "본래심(本來心)을 강조한 동방의 보살 - 사굴산문 범일", 『佛脈 한국의 선사들』, 우리출판사, 2004, 219-225쪽.
- 김영길, "범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흥삼, "범일",
『디지털강릉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흥삼, 「신라말 굴산문 범일과 김주원계 관련설의 비판적 검토」, 『한국고대사연구』 Vol.50, 한국고대사학회, 2008, 295-325쪽.
- 이일야, "사굴산문", 『해주에서 장흥까지 아홉개의 산문이 열리다』, (주)조계종출판사, 2016, 147-175쪽.
- 장정룡, "대관령국사당신화",
『한국민속대백과사전』online , 국립민속박물관, 작성일: 2016년 11월 28일. - 정동락, 「통효 범일(810-889)의 생애에 대한 재검토」, 『민족문화논총』 Vol.24,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1, 57-91쪽.
- 정동락, 「범일(810-889)의 선사상」, 『대구사학』 Vol.68, 대구사학회, 2002, 1-35쪽.
- 정동락, 「범일의 굴산문 개창과 성장기반 조성」, 『신라사학보』 Vol.35, 신라사학회, 2015, 65-98쪽.
- 정영식, "통효범일", 『조당집 읽기』, 운주사, 2016, 289-290쪽.
- 한정섭, 오청환, 『한국고승전(上) - 삼국, 고려편』, 불교정신문화원, 2014, 164-165쪽.
- 함복희, 「범일국사 설화의 의미와 문화콘텐츠 방안 연구」, 『동아시아고대학』 Vol.34, 동아시아고대학회, 2014, 285-316쪽.
- 홍성익, 「굴산사지 범일의 부도 명에 대한 검토」, 『신라사학보』 No.24, 신라사학회, 2012, 263-310쪽.
- 황루시, 「무속의 관점에서 본 범일국사 담론」, 『인문학연구』 Vol.19, 관동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4, 91-110쪽.
- 황루시, "범일국사",
『한국민속대백과사전』online , 국립민속박물관, 작성일: 2016년 10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