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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중인 1593년(조선 선조 26) 6월 22일부터 27일까지 경상우도 [[진주성]]에서 조선군과 왜군이 벌인 두 번째 전투이다. | [[임진왜란]] 중인 1593년(조선 선조 26) 6월 22일부터 27일까지 경상우도 [[진주성]]에서 조선군과 왜군이 벌인 두 번째 전투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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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20일 (목) 16:32 판
의병장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릉(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목차
서예원 아들 서계철 항전
우리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하였던 이유, 그 분석과 비판을 주제로 이야기 하였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당시 진주성 사람들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제2차 진주성 전투의 마지막...진주성이 함락되던 그 날, 힘없는 백성들은 일본군을 피해 달아나다가
무참히 살해 당하고, 대항하다가 살해 당했습니다.
또 아녀자들과 다른 백성들도 일본군에게 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일본군 손에 죽느니..
스스로 죽으려고 남강에 투신해서 죽은 이들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광기어린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해 성이 함락되는 과정에서 무자비한 살육이 벌어졌고,
그렇게 희생된 내용에 대해 우리와 일본측에서 여러 기록이 있습니다.
일본측 기록 회본태합기
우리측 기록에는 보통 6~7만. 많게는 8만, 작게는 3만 정도의 숫자가 언급되고 있으며, 일본측 기록
다이코기(太閤記) 등의 기록에 따르자면 그들이 언급한 일본군이 살해한 조선인의 수가 1만5천3백.
절벽에 떨어지거나 강에 빠져 죽은 조선인의 수가 2만 5천 정도..
그러니까 약 4만이 죽었다고 하고 있어서 우리와 진주성에서 죽은 민관군의 수와 관련해서 엇갈리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웃님, 그러나..확실한 것은 그 숫자가 얼마냐 이것이 중요한게 아니란 겁니다.
일본군의 명백한 보복성격의 전쟁 범죄 행위에 의해 수만에 달하는 엄청난 수의 무고한 백성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그 사실 자체는 명백하고,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측 기록의 6~7만, 많게는 8만이란 숫자는 전투 당시 진주성에 있던 군민 모두를 합친 수라고
생각되는데..성이 함락되며 하루 종일 살육이 벌어졌고, 모조리 죽고 흩어져서 그렇게 언급되었다
보지만, 그렇다고 그 모든 군민이 다 죽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래도 그 아비규환(阿鼻叫喚)속에서도 기적적으로 어떻게든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기록이 여럿 보이거든요.
성벽에서 뛰어내리거나 시신 더미에 묻혀 숨어서, 강물에 뛰어들어서..그렇게 생지옥을 벗어난
기적의 생존자들이 소수지만, 여럿 있었던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정확하진 않아도 진주성의 마지막 날을 증언한 내용도 일부 남았습니다.
지난 이야기에서 등장한 충청도 보령출신 정로위 인발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웃님, 일본군은 진주성 함락 후..진주성을 불태우고 무너뜨리며 철저히 파괴했으며..
진주를 넘어 주위 사천, 고성, 산청 등 지리산 등지까지 쳐들어가 흩어져서 살육과 파괴, 그리고
납치 등 경상우도 지역 곳곳을 휘저으며 초토화(焦土化)시켰습니다.
이웃님, 그 아비규환 속 진주 사람들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먼저..세상 억울할 사람이 한분 있습니다.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등에서 무능하고 비겁했다고, 진주성 함락의 원흉처럼 지목된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 1548~1593)장군이 되겠죠.
전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속의 그 기록들이 과장 또는 악의적으로 왜곡되었다고 봅니다.
왜냐고요?
진주목사 서예원 장군과 대척점에 서서 대립했던 분이 창의사 김천일 선생이었습니다.
이 두분은 당파가 다르죠. 당파색을 보면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입니다.
창의사 김천일 선생이 진주성에 들어온 의병들의 수장이라고 하나..진주성 본주군을 이끌고 있고,
조정에서 임명된 진주목사 서예원 장군의 상급자라 볼 수 없을 뿐더러, 그가 진주목사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임명 또는 해임할 수 없습니다.
이는 명백한 월권이고, 권한남용이죠.
진주목사 서예원 장군도 진주성 본주군의 수장으로서 이런 대우를 받는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매번 대립할 수 밖에 없는 구도가 됩니다.
징비록에서 서애 류성룡 선생이 창의사 김천일 선생과 그 의병대를 비판적으로 평가했던 기록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면..이들의 대립 그 자체도 실상 이상으로 과장되고, 왜곡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진주성 전투의 생존자 충청도군의 군관이었다는 정로위 인발의 발언에 이런 증언은 없었다는 것으로
봐서는요.
하지만, 성내의 병력에 비해 장수가 너무 많고, 지휘권이 확립되지 않아 혼란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창의사 김천일 선생이 진주목사 서예원 장군을 무시하고 대립했다고 한다면 가장 큰 이유는..
동아시아 7년전쟁 개전 초, 김해부사로 있던 서예원 장군이 패하여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패전지장(敗戰之將)이란 말이죠.
그렇다쳐도..의병의 수장인 그가 진주성 전투의 주력군인 본주군을 이끄는 서예원 장군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김시민 장군이었다면..절대 용납치 않았을 겁니다.
그에게 그랬다면 김시민 장군은 정말 칼을 빼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서예원 장군은 김해부사로 김해성에서 싸우다 패하고 도주한 것은 맞는데..
싸우기도 전에 적전도주한 것이 아니라, 맞서 싸웠고, 두세번 막아내었지만, 일본군이 끝내 성벽을
타고 넘어 왔습니다.
그러자 초계군수 이유검이 성문을 열고 도주하여 그 성문으로 적이 난입했습니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고, 돌이킬 길이 없습니다.
핑계가 도주한 초계군수 이유검을 잡는다고 했지만, 김해성이 함락되고 완전히 전세가 기울어
돌이킬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성을 이탈한 겁니다.
이 패전으로 초계군수 이유검은 참수되고, 김해부사 서예원 장군은 백의종군 처분됩니다.
패전지장이 맞습니다만, 그는 백의종군했고..또 의병장 송암 김면 선생이 이끌던 의병부대의
중위장이 되어 각지에서 싸웠습니다.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그렇게 앞선 패전의 죄를 씻었지요.
그리고 진주목사로 부임해 온 것이고요.
학봉집을 보면..학봉 김성일 선생도 김시민 장군 만큼은 아니겠지만, 서예원 장군의 능력을 어느정도
인정했습니다. 경상우도 3대 의병장 송암 김면 장군 부대의 핵심인 중위장으로 활약했던 경력과
학봉집에서 말하는 평가를 보면 그가 정말 실록에 나오는 그 무능하고 비겁한 장수 같지도 않은..
그런 장수가 맞는지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네요.
물론..서예원 장군이 전임 목사였던 김시민 장군에 비해 능력이 뛰어나다거나, 백성과 군사들이
절대적으로 따르는 그런 사람이라 볼 수 없습니다. 그게 현실이고요.
그를 따라다니는 패전지장의 꼬리표, 또 전쟁나면 도망하겠지 이런 식의 불신의 눈초리..
장수(將帥)된 자로 이는 큰 결점이죠. 그 누구보다 서예원 장군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습니다.
서예원 장군은 김시민 장군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그렇다고 해도 실록의 기록과는 달리..
그렇게 무능하고, 비겁한 장수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생각있는 분이셨던 것 같습니다.
무엇을 보고 아냐고요?
서예원 장군은 최전방, 가장 위험한 전장인 진주성으로 가족들을 불러 들였습니다.
왜 일까요.
서예원 장군이 그의 꼬리표, 그를 향한 불신의 눈초리를 잘 알기에, 이렇게 자신의 의지를 보여서
그런 시각을 불식하고..군사들과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성이 함락되고..서예원 장군의 최후에도 별별 설(說)이 다 돌았습니다.
어떤 이는 또 비겁하게 숨어 있다가 잡혀서 목이 잘렸다고 하고, 어떤 이는 싸우다가 안되겠다
싶었는지 남강에 뛰어들어 탈출하다가 잡혀 죽었다고도 하고..어떤 이는 적에게 돌진해서
싸우다가 죽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서예원 장군은 진주성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목은 일본에서 기다리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내졌습니다.
확실치도 않은 실록의 기록 때문에..멀쩡한 사람 하나 바보, 등신으로 만들고, 수백년 넘게
감당하기 힘든 불명예를 받게 만들었죠.
어떻게 진주성 전투 패전의 책임을 선조가 면하려고, 진주목사 한사람에게 그 책임과 수모를
다 몰아 준답니까. 너무 심합니다.
그래놓고.. 나중에 선무원종 1등공신에 추록되고, 병조참의에 추증합니다.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에 보이는 그 기록대로라면..이는 잘못된 처사임에 분명하겠죠.
그 기록대로가 아니니까 어쨌든 이렇게라도 포상한 것 아닌가요.
그래도 서예원 장군은 수백년 지난 지금도 억울할 겁니다.
진주성 함락이 그만의 책임은 아닐진대..왜 그에게 모든 책임을 묻고, 또 감당못할 치욕까지 주어
수백년 넘게 불명예스런 사람으로 남겼는가 하고요.
그에게 책임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패전의 책임을 묻는다면 공평하게 물어야지요.
전투에서 싸우다 순절한 공적과 충절을 기리고 높인다면, 그것도 공평하게 해야 합니다.
사실..전투에서의 지휘관으로 패전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면, 진주목사보다 진주목사의 상관이자,
최고 지휘관인 경상우병사 최경회 장군의 책임을 가장 크게 물어야 맞습니다.
그러나, 당시 선조(宣祖)와 조정 대신들, 사신(史臣)들의 평가가 공명정대하지 못하였고, 이 때문에
수백년 넘게 제2차 진주성 전투의 실상이 왜곡되었습니다.
높여지고, 기려지는 분들은 문제없겠으나, 그러자고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몰아서 억울한
피해자가 생겼다면 이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이웃님, 그러면 서예원 장군의 부름을 받고 진주성 내에 들어와 있던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진주성이 함락되어 수많은 이들이 죽어가는데 무사할 수 있었을까요.
진주성 전투 중에 정부인(貞夫人) 이씨는 출가 전인 어린 딸, 며느리 노씨와 함께 여종들을 데리고
병사들 밥도 짓고, 다친 병사들 돌보며 돕다가 성이 함락되자 욕을 보지 않으려고 강물에 뛰어들어
아녀자들은 자결했으며,
장자인 생원 계성(繼聖)은 성이 함락될 때 사노(私奴)인 김이, 춘년과 더불어 적에게 돌진해
싸우다 전사했다고 합니다.
서예원의 둘째아들, 서계철(徐繼哲, 1579~1636)의 이야기도 듣고 보면 기구합니다.
진주성이 함락될 때, 서예원 장군의 뜻에 따라 진주성에 들어간 가솔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이때 화를 피한 가족은 둘째 아들인 계철과 막내 아들로..
이들은 이제 막 결혼해서 각자 처가에 있어서 진주성에 있지 않았던 것이었죠.
둘째 아들 계철은..진주에서 가까운 함양(咸陽)에 있었다고 합니다.
진주성의 흉한 소식을 접하자 그는 아내와 처가 가족들의 만류를 물리치고 진주로 갔습니다.
진주로 가면 십중팔구 비명횡사할 가능성이 높으니 아주 무모한 행동이죠.
그러나 부모와 식솔들의 시신이라도 찾으려는 그 마음은 효심에서 나온 것이고, 대단한 용기를 낸
행동이 아닐까 합니다.
앞서 우리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하였던 이유, 그 분석과 비판을 주제로 이야기 하였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당시 진주성 사람들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제2차 진주성 전투의 마지막...진주성이 함락되던 그 날, 힘없는 백성들은 일본군을 피해 달아나다가
무참히 살해 당하고, 대항하다가 살해 당했습니다.
또 아녀자들과 다른 백성들도 일본군에게 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일본군 손에 죽느니..
스스로 죽으려고 남강에 투신해서 죽은 이들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광기어린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해 성이 함락되는 과정에서 무자비한 살육이 벌어졌고,
그렇게 희생된 내용에 대해 우리와 일본측에서 여러 기록이 있습니다.
일본측 기록 회본태합기
우리측 기록에는 보통 6~7만. 많게는 8만, 작게는 3만 정도의 숫자가 언급되고 있으며, 일본측 기록
다이코기(太閤記) 등의 기록에 따르자면 그들이 언급한 일본군이 살해한 조선인의 수가 1만5천3백.
절벽에 떨어지거나 강에 빠져 죽은 조선인의 수가 2만 5천 정도..
그러니까 약 4만이 죽었다고 하고 있어서 우리와 진주성에서 죽은 민관군의 수와 관련해서 엇갈리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웃님, 그러나..확실한 것은 그 숫자가 얼마냐 이것이 중요한게 아니란 겁니다.
일본군의 명백한 보복성격의 전쟁 범죄 행위에 의해 수만에 달하는 엄청난 수의 무고한 백성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그 사실 자체는 명백하고,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측 기록의 6~7만, 많게는 8만이란 숫자는 전투 당시 진주성에 있던 군민 모두를 합친 수라고
생각되는데..성이 함락되며 하루 종일 살육이 벌어졌고, 모조리 죽고 흩어져서 그렇게 언급되었다
보지만, 그렇다고 그 모든 군민이 다 죽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래도 그 아비규환(阿鼻叫喚)속에서도 기적적으로 어떻게든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기록이 여럿 보이거든요.
성벽에서 뛰어내리거나 시신 더미에 묻혀 숨어서, 강물에 뛰어들어서..그렇게 생지옥을 벗어난
기적의 생존자들이 소수지만, 여럿 있었던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정확하진 않아도 진주성의 마지막 날을 증언한 내용도 일부 남았습니다.
지난 이야기에서 등장한 충청도 보령출신 정로위 인발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웃님, 일본군은 진주성 함락 후..진주성을 불태우고 무너뜨리며 철저히 파괴했으며..
진주를 넘어 주위 사천, 고성, 산청 등 지리산 등지까지 쳐들어가 흩어져서 살육과 파괴, 그리고
납치 등 경상우도 지역 곳곳을 휘저으며 초토화(焦土化)시켰습니다.
이웃님, 그 아비규환 속 진주 사람들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먼저..세상 억울할 사람이 한분 있습니다.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등에서 무능하고 비겁했다고, 진주성 함락의 원흉처럼 지목된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 1548~1593)장군이 되겠죠.
전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속의 그 기록들이 과장 또는 악의적으로 왜곡되었다고 봅니다.
왜냐고요?
진주목사 서예원 장군과 대척점에 서서 대립했던 분이 창의사 김천일 선생이었습니다.
이 두분은 당파가 다르죠. 당파색을 보면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입니다.
창의사 김천일 선생이 진주성에 들어온 의병들의 수장이라고 하나..진주성 본주군을 이끌고 있고,
조정에서 임명된 진주목사 서예원 장군의 상급자라 볼 수 없을 뿐더러, 그가 진주목사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임명 또는 해임할 수 없습니다.
이는 명백한 월권이고, 권한남용이죠.
진주목사 서예원 장군도 진주성 본주군의 수장으로서 이런 대우를 받는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매번 대립할 수 밖에 없는 구도가 됩니다.
징비록에서 서애 류성룡 선생이 창의사 김천일 선생과 그 의병대를 비판적으로 평가했던 기록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면..이들의 대립 그 자체도 실상 이상으로 과장되고, 왜곡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진주성 전투의 생존자 충청도군의 군관이었다는 정로위 인발의 발언에 이런 증언은 없었다는 것으로
봐서는요.
하지만, 성내의 병력에 비해 장수가 너무 많고, 지휘권이 확립되지 않아 혼란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창의사 김천일 선생이 진주목사 서예원 장군을 무시하고 대립했다고 한다면 가장 큰 이유는..
동아시아 7년전쟁 개전 초, 김해부사로 있던 서예원 장군이 패하여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패전지장(敗戰之將)이란 말이죠.
그렇다쳐도..의병의 수장인 그가 진주성 전투의 주력군인 본주군을 이끄는 서예원 장군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김시민 장군이었다면..절대 용납치 않았을 겁니다.
그에게 그랬다면 김시민 장군은 정말 칼을 빼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서예원 장군은 김해부사로 김해성에서 싸우다 패하고 도주한 것은 맞는데..
싸우기도 전에 적전도주한 것이 아니라, 맞서 싸웠고, 두세번 막아내었지만, 일본군이 끝내 성벽을
타고 넘어 왔습니다.
그러자 초계군수 이유검이 성문을 열고 도주하여 그 성문으로 적이 난입했습니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고, 돌이킬 길이 없습니다.
핑계가 도주한 초계군수 이유검을 잡는다고 했지만, 김해성이 함락되고 완전히 전세가 기울어
돌이킬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성을 이탈한 겁니다.
이 패전으로 초계군수 이유검은 참수되고, 김해부사 서예원 장군은 백의종군 처분됩니다.
패전지장이 맞습니다만, 그는 백의종군했고..또 의병장 송암 김면 선생이 이끌던 의병부대의
중위장이 되어 각지에서 싸웠습니다.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그렇게 앞선 패전의 죄를 씻었지요.
그리고 진주목사로 부임해 온 것이고요.
학봉집을 보면..학봉 김성일 선생도 김시민 장군 만큼은 아니겠지만, 서예원 장군의 능력을 어느정도
인정했습니다. 경상우도 3대 의병장 송암 김면 장군 부대의 핵심인 중위장으로 활약했던 경력과
학봉집에서 말하는 평가를 보면 그가 정말 실록에 나오는 그 무능하고 비겁한 장수 같지도 않은..
그런 장수가 맞는지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네요.
물론..서예원 장군이 전임 목사였던 김시민 장군에 비해 능력이 뛰어나다거나, 백성과 군사들이
절대적으로 따르는 그런 사람이라 볼 수 없습니다. 그게 현실이고요.
그를 따라다니는 패전지장의 꼬리표, 또 전쟁나면 도망하겠지 이런 식의 불신의 눈초리..
장수(將帥)된 자로 이는 큰 결점이죠. 그 누구보다 서예원 장군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습니다.
서예원 장군은 김시민 장군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그렇다고 해도 실록의 기록과는 달리..
그렇게 무능하고, 비겁한 장수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생각있는 분이셨던 것 같습니다.
무엇을 보고 아냐고요?
서예원 장군은 최전방, 가장 위험한 전장인 진주성으로 가족들을 불러 들였습니다.
왜 일까요.
서예원 장군이 그의 꼬리표, 그를 향한 불신의 눈초리를 잘 알기에, 이렇게 자신의 의지를 보여서
그런 시각을 불식하고..군사들과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성이 함락되고..서예원 장군의 최후에도 별별 설(說)이 다 돌았습니다.
어떤 이는 또 비겁하게 숨어 있다가 잡혀서 목이 잘렸다고 하고, 어떤 이는 싸우다가 안되겠다
싶었는지 남강에 뛰어들어 탈출하다가 잡혀 죽었다고도 하고..어떤 이는 적에게 돌진해서
싸우다가 죽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서예원 장군은 진주성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목은 일본에서 기다리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내졌습니다
일본에 끌려간 서계철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백제계 일본인 휘원(輝原)이란 자의 집에 보내지게
되었고, 그곳에서 각별한 대접을 받고 머물며 아버지 서예원의 목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고 합니다.
그런데..여기서 휘원이란 자. 백제계 성씨..모리.
그럼..모리휘원(毛利輝元)..모리 테루모토로 추정됩니다.
동아시아 7년전쟁 때 일본군 7군을 이끌면서 주로 경상도 전선에 있었습니다.
일본 서부를 대표하는 다이묘(大名)인데..뜻하지 않게 여기서 일본측의 거물을 만나게 된 셈이네요.
서계철은 이렇게 일본에서 13년을 보내고 전쟁 후 사명대사께서 일본을 찾아 강화 협상하고 일본에
끌려간 피로인들을 송환할 때에..귀국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버지 진주목사 서예원의 목은 흔적도 없이 되어 찾지 못하고 대신 그의 옷을 가지고 귀국해서
함양에 초혼묘를 쓴 후에..후일 그가 밀양에 자리잡게 되면서 진주목사 서예원 장군의 직계손은
밀양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전쟁 후에, 나라에서 진주성에서 죽은 서예원 장군 일가의 의열(義烈)을 기려서 정려(旌閭)를
내려서 이들을 기리는 육절려(六節閭)가 강원도 횡성에 있습니다.
이웃님, 저는 이런 행적과 가솔들의 이야기와 그들이 보여준 품성으로 미루어 보건대..
도저히 실록 속에 그려진 그런 무능하고 비겁한 장수 서예원의 모습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현재 이러한 제2차 진주성 전투에 대한 일반적인 기록과 평가는 제 시각에선 부당하게 보입니다.
역사서, 드라마, 역사 다큐는 물론이고, 진주성 내에 있는 창렬사를 봐서도 그렇게 여기는데요...
가장 큰 문제는 한마디로 말한다면, 주객전도(主客顚倒)입니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실질적으로 전투를 수행한 핵심이자 주력은 진주성의 분주군과 백성들이죠.
진주성의 주인이자,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진주성 본주군과 백성들, 경상우도 의병들 앞에..
타지에서 지원온 전라도 의병과 의병장들이 있어 모든 찬사와 기억을 이들이 독점하고 있으며,
정작 주인인 진주성과 경상우도 사람들은 잊혀지고,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주목사 서예원 장군 뿐만아니라 진주판관 성수경 장군, 삼가의병장 윤탁 장군, 전 거제현령
이며 합천의병장이었던 김준민 장군도 그 공적과 비중에 걸맞지 않게 저평가 되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것은..저처럼 진주에 사는 사람들은 더 심각하게 여기고, 재평가에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이죠.
2차 진주전투
임진왜란 중인 1593년(조선 선조 26) 6월 22일부터 27일까지 경상우도 진주성에서 조선군과 왜군이 벌인 두 번째 전투이다.
육절려(六節閭)
강원 횡성군 공근면 매곡리 산11에 있는 정려각. 정면 4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5호. 1817년(순조 17),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전사한 서예원(徐禮元)과 그의 처, 아들, 며느리, 사위, 딸의 충효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