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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9일 (일) 08:14 판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서일(徐一)이 1920년 만주에서 조직한 독립군 연합부대.
일제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중국측의 요구에 남·북만주 각지, 특히 북간도에 있던 독립군 부대들은 새로운 항일전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중·소 국경 부근인 밀산(密山) 방면으로 이동하였다.1920년 12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주도 아래 대한독립군·대한신민회, 구춘선(具春先)이 회장인 대한국민회, 혼춘(琿春)의 대한국민회·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의군부(義軍府)·혈성단(血誠團)·야단(野團)·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의 대표들이 노령(露領) 연해주(沿海州)로 건너가 장기 항일전을 준비하기로 결정하고, 밀산에서 이 단체를 조직하였다.총재는 서일(徐一), 부총재는 홍범도(洪範圖), 고문은 백순(白純)·김호익(金虎翼), 외교부장은 최진동(崔振東), 참모부장은 김좌진(金佐鎭), 참모는 이장녕(李章寧)·나중소(羅仲昭), 군사고문은 지청천(池靑天), 제1여단장은 김규식(金奎植), 참모는 박영희(朴寧熙), 제2여단장은 안무(安武), 참모는 이단승(李檀承), 제2여단 기병대장은 강필립, 중대장에는 김창환(金昌煥)·오광선(吳光鮮)·조동식(趙東植) 등을 선임하였다.군단 휘하에 상급부대로 여단을 두고, 그 아래 3개 대대 9개 중대 27개 소대가 편성되어 있었으며, 총병력은 3,500여 명이었다.자유시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무장해제에 불응한 부대는 연해주 이만(현재의 러시아 연해주 달네레첸스크 지방)에서 만주로 회군하였다. 자유시로 이동한 부대는 통합 과정에서 흑하사변을 겪었다. 흑하사변 뒤 자유시에 남은 군대는 고려혁명군으로 재편되었다. 이후 고려혁명군은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였다.항일무장독립군 부대를 통합하여 독립군단을 만들려는 노력은 지속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1924년 9월 군사연합회의준비회가 조직되었다.총재에 이범윤(李範允), 총사령관에는 김좌진이 선임되었다. 김규식·최진동(崔振東)·현천묵(玄天默)·강국모(姜國模)·남성극(南星極)·최호(崔灝)·박두희(朴斗熙)·유현(柳賢)·이장녕 등이 활동하였다. 만주 동녕현(東寧縣)을 중심으로 수분하(綏芬河)에서 하얼빈[哈爾濱]을 잇는 동지연선(東支沿線)을 따라 세력을 확장시켜나갔다.의의와 평가그러나 이 때 여러 독립군 부대가 공식적으로는 단일 독립군단으로 통합되어 있었으나, 재정이 궁핍하고 군세(軍勢)가 분산되어 있어 실제로는 완전한 통합을 이루지 못하였다.
서일(徐一)
일제강점기 북로군정서 총재로 김좌진과 청산리전투에 참전한 독립운동가.종교인.개설본관은 이천 서씨(利川). 함경북도 경원 출신.
본명은 서기학(徐夔學), 호는 백포(白圃).
1898년까지 고향에서 한학(漢學)을 배우다가 경성함일사범학교(鏡城咸一師範學校)에 입학하여 1902년에 졸업하고 교육구국사업에 종사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탄압이 심화되자 국내에서 항일투쟁의 어려움을 느끼고 만주로 건너갔다.1911년 두만강을 넘어오는 의병의 잔류병력을 규합하여 중광단(重匡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무력에 의한 투쟁보다는 청년동지들에 대한 민족정신과 한학을 가르쳐 정신교육에 치중하는 한편, 교육에도 뜻을 두어 간도지방에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1912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교리의 연구와 포교활동에 주력하였으며, 1916년 총본사(總本司) 전강(典講)이 되어 활동한 결과, 나철(羅喆)의 교통(敎統) 계승자의 물망에 올라 사교(司敎)로 초승(超陞)되고 영선(靈選)에까지 올랐다.1917년 대종교 총본사를 만주 화룡현(和龍縣)으로 옮겨 만주와 노령(露領)의 동포에게까지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여준(呂準)·유동열(柳東說)·김동삼(金東三)·김좌진(金佐鎭) 등과 무오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을 발표함으로써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이듬해 중광단을 토대로 군사적 행동을 위해 계화(桂和) 등과 대한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하였다.1919년 대종교 2세교주인 무원종사(茂園宗師) 김헌(金獻)이 그에게 교통을 전수하려고 하였으나 독립군 양성과 일제에 대한 무력항쟁에 힘을 기울이기 위해 교통의 인수를 5년 뒤로 미루었다.같은 해 8월 현천묵(玄天默)·김좌진·계화 등과 함께 정의단을 개편하여 군정부(軍政府)로 만들고, 12월에는 다시 한 민족에게 두 개의 정부가 있을 수 없다 하여, 이것을 토대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하면서 총재에 취임하였다.또한 틈틈이 대종교의 교리를 연구하며 수도에 힘써 교리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저술에도 힘을 기울이며 포교활동도 하였다.군정서는 각처에 정보연락망을 구축하고 대종교 신도들의 헌금과 함경도민이 마련해준 군자금을 바탕으로 하여 정규병력 1,500명으로 지방치안을 유지하고 신병모집과 무기수입을 담당하였다.또한 왕청현 십리평(十里坪)에 사관양성소(士官養成所)를 세워 중견사관을 길러내고, 각지에 야간강습소와 소학교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1920년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 일본 정규군을 크게 무찔렀고 병력을 북만(北滿) 밀산현(密山縣)으로 이동시켰다. 이듬해 일본군의 만주 출병으로 인해 밀산현으로 들어온 안무(安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 최진동(崔振東)의 도독부군(都督府軍) 및 의군부(義軍府), 광복단(光復團) 등 여러 독립군단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다.1921년 6월 27일 자유시 수비대 29연대, 2군단 기병대대, 라키친 저격연대가 동원되어 사할린 부대에 대한 무장해제에 들어갔다.그러나 러시아 군인과 항일무장독립군 부대원 사이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고 러시아 군인은 사할린 부대를 구분할 수 없었다. 동원된 러시아 부대는 무장을 한 항일무장독립군에 대하여 무차별적 공격을 감행하였다. 청년장병 다수가 희생당하는 흑하사변(黑河事變)이 일어나게 되었다.이에 같은해 8월 27일 “나라 땅은 유리쪽으로 부서지고 티끌모래는 바람비에 날렸도다. 날이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뇨.”라는 글귀를 남기고 대종교 수양법의 하나인 조식법(調息法)으로 자결하였다.독립운동가로서 그의 활동과 지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또한 대종교에서는 그를 철학적 논리와 과학적 증명으로 종교의 교리를 체계화한 대철(大哲)로 성인(聖人)이라고 추앙하고 있다.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저서에 『오대종지강연(五大宗旨講演)』·『삼일신고강의(三一神誥講義)』, 그리고 계시를 받고 지었다는 『회삼경(會三經)』 등이 있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릉(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1세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阿干大夫). 부총리)의 후손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令). 종 1품. 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 종 1품. 국무총리)
4세 서유위(徐惟偉 장야서령(掌冶署令).정 3품.장관)
5세 서면(徐冕 주부(注簿).정 4품.차관보)
6세 서린(徐嶙 판대부사(判大府事).정 2품.부총리)
7세 서찬(徐瓚 장령(掌令). 정 4품. 차관보)
8세 서인(徐諲 교수(敎授).도승지(都承旨).정 3품.장관.대학자)
9세 서욱(徐勖 도승지(都承旨).정 3품. 장관)
10세 서효손(徐孝孫 판사재사(判司宰事).종 2품.부총리)
11세 서유(徐愈 예조판서(禮曹判書).이성군(利城君). 정2품. 장관.양경공파(良敬公派))
12세 서경흥(徐敬興. 목사(牧使). 정3품.당상관.차관)
13세 서미수(徐眉壽.사직(司直). 정5품.국장)
14세 서석손(徐碩孫. 모의당공(慕義堂公)
15세 서세호(徐世豪. 연순교위(衛尉)
16세 서희안(徐希顔. 사용공(司勇公)
17세 서득천(徐得天. 의병장(義兵將).부사용(副司勇) · 창의순절(副司勇 · 倡義殉節)
18세 서사도(徐思道. 의병장(義兵將).율곡 이이(栗谷 李珥) 문인.임진란 순절(壬辰亂殉節 )
서사근(徐思近 통정대부 판결사(通政大夫判決事)·.의병장(義兵將))
서사원(徐思遠 조선 중기 의병장(義兵將))
서사적(徐思迪) 조선 중기 의병장(義兵將))
19세 서일원(徐一元 .용기위사정(龍驥衛司正).학자(學者)
서종언(徐從彦 이흥군(利興君).오위부총관(五衛副摠官). 종 2품.차관)
서일회(徐一會)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
목차
대종교(大倧敎)
1909년 나철(羅喆)이 조직한 종교.
대종교 삼종사 묘역(大倧敎)
삼종사 묘역은 들 가운데 있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和龍市) 용성향(龍城鄕) 청호촌(淸湖村) 청호종산의 작은 구릉. 옛 주소는 화룡현 청파호이다. 삼종사란 대종교(大倧敎)의 홍암(鴻巖) 나철(羅喆, 1863~1916) 대종사, 무원 김교헌(金敎獻, 1867~1923) 종사, 백포(白圃) 서일(徐一, 1881~1921) 종사를 말한다.
중광단(重光團)
1911년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로, 서일(徐一) 등이 국외로 탈출하는 의병들을 규합해서 조직하였다. 단장은 서일이 맡았고, 본부는 지린성[吉林省] 왕칭현[汪淸縣]에 있었다. 둥베이 지방 무장독립운동의 효시가 된 단체로, 무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 군사활동보다는 청년 지사들의 항일 민족의식 고취와 애국운동 함양 등 정신교육에 치중하였다.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3·1운동 직후 서일(徐一)·계화(桂和)·채오(蔡五) 등이 중광단(重光團)의 토대 위에 적극적인 항일무력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동북만주의 대종교도(大倧敎徒)를 규합하여 조직하였다.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북로군정서 사령부 터 지린성 옌지시 이란구(吉林省 延吉市 依蘭區) 북로군정서 사령부 터.
1919년 만주에서 결성되었던 독립군 단체. 북간도에서 서일(徐一) 등의 대종교인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중광단(重光團)이 3·1운동 이후 정의단(正義團)으로 확대·개편되면서 무장독립운동을 수행하기 위해 대한군정회(大韓軍政署, 약칭 군정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 약칭 군정부)로 확대 개편하였으며 임시정부로부터 대한군정서로 인준받았다.
청산리대첩
1920년 10월 21∼26일, 서일(徐一)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가 만주 허룽현(和龍縣) 청산리 백운평(白雲坪), 천수평(泉水坪), 완루구(完樓溝) 등지의 10여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싸움이다.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서일(徐一)이 1920년 만주에서 조직한 독립군 연합부대.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1921년 러시아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서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한 사건으로 흑하(黑河)사변이라고도 한다.자유시는 러시아 제야 강(Zeya river)변에 위치한 ‘알렉세예브스크(Alekseyevsk)’ 마을이며, 현재는 ‘스바보드니(Svobodny)’라는 지명으로 불린다. 러시아어로 ‘스바보다(Svoboda)’가 ‘자유’를 뜻하기 때문에 ‘자유시’라고 불렸다. 그리고 제야 강이 흘러 흑룡강(黑龍江)과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중국의 국경도시 헤이허[黑河]의 지명을 따서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도 한다.
서일총재항일투쟁기념비(徐一总裁抗日斗争纪念碑)
흑룡강성 계서시 118현도 영성촌(黑龙江省 鸡西市 一一八县道 永胜村)
서일의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순국지 부근에 세운 기념비
백포 서일(徐一) 선생의 시어록비(독립기념관 어록비공원)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동 삼방로 95 (남화리) 독립기념관
"조국 광복을 위하여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