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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9일 (일) 07:45 판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 |
대표명칭 | 북로군정서 |
---|---|
한자표기 | 北路軍政署 |
유형 | 독립운동단체 |
창립자 | 서일,현천묵,계화,이장녕 |
창립시대 | 현대 |
창립일 | 1919년 12월 |
목차
정의
1919년 북간도에서 결성되었고, 청산리대첩에서 크게 활동한 무장 독립운동 단체이다.
내용
조직과 명칭
북간도에서 서일(徐一) 등의 대종교 교인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중광단(重光團)이 3·1운동 이후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확대·개편되었다. 1919년 8월 이후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무장 독립 투쟁을 본격화하자 대한정의단은 서일(徐一), 김좌진(金佐鎭), 조성환(曺成煥), 박찬익(朴贊翊) 등이 활동하고 있는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와 결합하여 1919년 10월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를 조직하였다. 총재는 서일, 사령관은 김좌진이 맡았다. 그러나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직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부'라는 명칭이 문제가 되었다. 1919년 12월, 대한군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위를 인정하고 임시정부 산하의 군사기관으로서 공인을 요청하였다. 임시정부는 '군정부'라는 명칭을 '군정서'로 개칭하는 조건으로 이를 인정하였다. 이에 따라 대한군정부는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공식 명칭을 변경하였다. 당시 서간도 지역에 서로군정서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별을 위해 북로군정서로 불리게 되었다.[1]
훈련과 편성
북로군정서는 만주 왕청현(汪淸縣)의 숲속에 근거지를 두고 8동의 군 막사를 짓고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립하였다. 교관은 신흥무관학교에 요청하여 이범석과 신흥무관학교 출신 장교인 박영희(朴寧熙), 백종렬(白鍾烈), 강화린(姜華麟) 등을 지원받고, 학생들은 주변의 주민 출신과 국내에서 들어오는 청년들을 뽑아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속성과를 주로 하여 정신교육, 군사학, 부대 지휘법 등을 가르쳤다. 군사훈련 외에 다른 지역에 있는 독립운동 단체와도 연계하여 만주나 노령(러시아 영토)에 산재한 독립운동가들이나 조직의 연락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다.
독립군 편제는 1개 소대를 50명씩으로 하고, 2개 소대를 1개 중대로, 2개 중대를 1대대로 편성하였다. 병력규모는 초기에는 500여 명이던 것이 1920년 8월에는 1,600명이 넘었다. 부대 운영이나 무기 구입에 사용되는 자금은 관내 주민들이나 국내로부터 조달되는 모금액으로 충당하였다.[2]
중광단(重光團)
1911년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로, 서일(徐一) 등이 국외로 탈출하는 의병들을 규합해서 조직하였다. 단장은 서일이 맡았고, 본부는 지린성[吉林省] 왕칭현[汪淸縣]에 있었다. 둥베이 지방 무장독립운동의 효시가 된 단체로, 무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 군사활동보다는 청년 지사들의 항일 민족의식 고취와 애국운동 함양 등 정신교육에 치중하였다.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3·1운동 직후 서일(徐一)·계화(桂和)·채오(蔡五) 등이 중광단(重光團)의 토대 위에 적극적인 항일무력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동북만주의 대종교도(大倧敎徒)를 규합하여 조직하였다.
청산리대첩
1920년 10월 21∼26일, 서일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가 만주 허룽현(和龍縣) 청산리 백운평(白雲坪), 천수평(泉水坪), 완루구(完樓溝) 등지의 10여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싸움이다.
한국 독립군의 세력이 날로 확대되자 일본은 1920년 10월 러시아에 주둔하는 군대까지 동원해 독립군 진영에 대한 선제공격을 단행했다. 낌새를 눈치 챈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 도독부 등은 산악 안전지대를 통해 백두산으로 이동하다 10월 16일 한인 동포들이 많이 살던 룽징(龍井)촌에서 서쪽으로 100여 리 떨어진 청산리(靑山理) 어귀 허룽(和龍)현 삼도구(三道溝)에서 만나 합동 작전회의를 벌였다.
그 결과 연합군을 3개 연대로 편성하고 청산리 일대의 지리적 조건을 이용해 일본군의 추격을 물리치기로 결정했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6개 중대(제1연대)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2개 대대(제2연대), 최진동이 지휘하는 도독부 6개 중대 병력(제3연대)은 산악지역에 매복해 일본군 동지대(東支隊) 37여단 소속 1만명과 접전을 벌였다. 10월 20일부터 23일까지 10여 차례 전투에서 연합 독립군은 대승을 거뒀다. 바로 청산리대첩이다.[3]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서일(徐一)이 1920년 만주에서 조직한 독립군 연합부대.
자유시사변
그 뒤 군정서는 일본군을 피해 이동해 온 대한독립군·대한신민회·도독부·의군부·혈성단 등 10여 개 독립군 부대와 통합하여 안전지대인 연해주로 건너가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1921년 6월 공산혁명을 치른 소련에 의해 무장 해제를 당하는 불운을 겪었다(자유시사변). 만주로 돌아온 김좌진 등은 흩어진 부대들을 모아 1922년 8월 대한독립군단을 재건하였지만, 이전과 같은 대규모 독립군 부대를 편성하지는 못하였다.[4]
서일(徐一)
일제강점기 북로군정서 총재로 김좌진과 청산리전투에 참전한 독립운동가.종교인.개설본관은 이천 서씨(利川). 함경북도 경원 출신.
본명은 서기학(徐夔學), 호는 백포(白圃).
1898년까지 고향에서 한학(漢學)을 배우다가 경성함일사범학교(鏡城咸一師範學校)에 입학하여 1902년에 졸업하고 교육구국사업에 종사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탄압이 심화되자 국내에서 항일투쟁의 어려움을 느끼고 만주로 건너갔다.1911년 두만강을 넘어오는 의병의 잔류병력을 규합하여 중광단(重匡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무력에 의한 투쟁보다는 청년동지들에 대한 민족정신과 한학을 가르쳐 정신교육에 치중하는 한편, 교육에도 뜻을 두어 간도지방에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1912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교리의 연구와 포교활동에 주력하였으며, 1916년 총본사(總本司) 전강(典講)이 되어 활동한 결과, 나철(羅喆)의 교통(敎統) 계승자의 물망에 올라 사교(司敎)로 초승(超陞)되고 영선(靈選)에까지 올랐다.1917년 대종교 총본사를 만주 화룡현(和龍縣)으로 옮겨 만주와 노령(露領)의 동포에게까지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여준(呂準)·유동열(柳東說)·김동삼(金東三)·김좌진(金佐鎭) 등과 무오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을 발표함으로써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이듬해 중광단을 토대로 군사적 행동을 위해 계화(桂和) 등과 대한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하였다.1919년 대종교 2세교주인 무원종사(茂園宗師) 김헌(金獻)이 그에게 교통을 전수하려고 하였으나 독립군 양성과 일제에 대한 무력항쟁에 힘을 기울이기 위해 교통의 인수를 5년 뒤로 미루었다.같은 해 8월 현천묵(玄天默)·김좌진·계화 등과 함께 정의단을 개편하여 군정부(軍政府)로 만들고, 12월에는 다시 한 민족에게 두 개의 정부가 있을 수 없다 하여, 이것을 토대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하면서 총재에 취임하였다.또한 틈틈이 대종교의 교리를 연구하며 수도에 힘써 교리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저술에도 힘을 기울이며 포교활동도 하였다.군정서는 각처에 정보연락망을 구축하고 대종교 신도들의 헌금과 함경도민이 마련해준 군자금을 바탕으로 하여 정규병력 1,500명으로 지방치안을 유지하고 신병모집과 무기수입을 담당하였다.또한 왕청현 십리평(十里坪)에 사관양성소(士官養成所)를 세워 중견사관을 길러내고, 각지에 야간강습소와 소학교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1920년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 일본 정규군을 크게 무찔렀고 병력을 북만(北滿) 밀산현(密山縣)으로 이동시켰다. 이듬해 일본군의 만주 출병으로 인해 밀산현으로 들어온 안무(安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 최진동(崔振東)의 도독부군(都督府軍) 및 의군부(義軍府), 광복단(光復團) 등 여러 독립군단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다.1921년 6월 27일 자유시 수비대 29연대, 2군단 기병대대, 라키친 저격연대가 동원되어 사할린 부대에 대한 무장해제에 들어갔다.그러나 러시아 군인과 항일무장독립군 부대원 사이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고 러시아 군인은 사할린 부대를 구분할 수 없었다. 동원된 러시아 부대는 무장을 한 항일무장독립군에 대하여 무차별적 공격을 감행하였다. 청년장병 다수가 희생당하는 흑하사변(黑河事變)이 일어나게 되었다.이에 같은해 8월 27일 “나라 땅은 유리쪽으로 부서지고 티끌모래는 바람비에 날렸도다. 날이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뇨.”라는 글귀를 남기고 대종교 수양법의 하나인 조식법(調息法)으로 자결하였다.독립운동가로서 그의 활동과 지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또한 대종교에서는 그를 철학적 논리와 과학적 증명으로 종교의 교리를 체계화한 대철(大哲)로 성인(聖人)이라고 추앙하고 있다.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저서에 『오대종지강연(五大宗旨講演)』·『삼일신고강의(三一神誥講義)』, 그리고 계시를 받고 지었다는 『회삼경(會三經)』 등이 있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릉(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1세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阿干大夫). 부총리)의 후손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令). 종 1품. 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 종 1품. 국무총리)
4세 서유위(徐惟偉 장야서령(掌冶署令).정 3품.장관)
5세 서면(徐冕 주부(注簿).정 4품.차관보)
6세 서린(徐嶙 판대부사(判大府事).정 2품.부총리)
7세 서찬(徐瓚 장령(掌令). 정 4품. 차관보)
8세 서인(徐諲 교수(敎授).도승지(都承旨).정 3품.장관.대학자)
9세 서욱(徐勖 도승지(都承旨).정 3품. 장관)
10세 서효손(徐孝孫 판사재사(判司宰事).종 2품.부총리)
11세 서유(徐愈 예조판서(禮曹判書).이성군(利城君). 정2품. 장관.양경공파(良敬公派))
12세 서경흥(徐敬興. 목사(牧使). 정3품.당상관.차관)
13세 서미수(徐眉壽.사직(司直). 정5품.국장)
14세 서석손(徐碩孫. 모의당공(慕義堂公)
15세 서세호(徐世豪. 연순교위(衛尉)
16세 서희안(徐希顔. 사용공(司勇公)
17세 서득천(徐得天. 의병장(義兵將).부사용(副司勇) · 창의순절(副司勇 · 倡義殉節)
18세 서사도(徐思道. 의병장(義兵將).율곡 이이(栗谷 李珥) 문인.임진란 순절(壬辰亂殉節 )
서사근(徐思近 통정대부 판결사(通政大夫判決事)·.의병장(義兵將))
서사원(徐思遠 조선 중기 의병장(義兵將))
서사적(徐思迪) 조선 중기 의병장(義兵將))
19세 서일원(徐一元 .용기위사정(龍驥衛司正).학자(學者)
서종언(徐從彦 이흥군(利興君).오위부총관(五衛副摠官). 종 2품.차관)
서일회(徐一會)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
서일총재항일투쟁기념비(徐一总裁抗日斗争纪念碑)
흑룡강성 계서시 118현도 영성촌(黑龙江省 鸡西市 一一八县道 永胜村)
서일의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순국지 부근에 세운 기념비
대종교(大倧敎)
1909년 나철(羅喆)이 조직한 종교.
대종교 삼종사 묘역(大倧敎)
삼종사 묘역은 들 가운데 있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和龍市) 용성향(龍城鄕) 청호촌(淸湖村) 청호종산의 작은 구릉. 옛 주소는 화룡현 청파호이다. 삼종사란 대종교(大倧敎)의 홍암(鴻巖) 나철(羅喆, 1863~1916) 대종사, 무원 김교헌(金敎獻, 1867~1923) 종사, 백포(白圃) 서일(徐一, 1881~1921) 종사를 말한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북로군정서 | 서일 | A는 B에 의해 설립되었다 | A ekc:founder B |
북로군정서 | 김좌진 | A는 B과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북로군정서 | 청산리대첩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919년 12월 |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북로군정서를 승인하였다 |
1920년 10월 | 북로군정서는 청산리대첩에 참여하였다 |
1920년 12월 | 북로군정서는 대한독립군단에 합류하였다 |
시각자료
갤러리
김좌진과 북로군정서의 모습을 담은 옛 사진. [5]
주석
- ↑ "북로군정서",
『우리역사넷』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북로군정서",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 "북로군정서", 『네이버 기관단체사전:종합』, 굿모닝미디어. 온라인 참조: "북로군정서",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신재홍, "북로군정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좌진과 북로 군정서군",
『우리역사넷』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 자원
- "김좌진과 북로 군정서군",
『우리역사넷』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북로군정서",
『우리역사넷』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북로군정서",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북로군정서", 『네이버 기관단체사전:종합』, 굿모닝미디어. 온라인 참조: "북로군정서",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신재홍, "북로군정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좌진과 북로 군정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