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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2017년 12월 14일 (목) 13:12 판

최언위(崔彦撝)
대표명칭 최언위
한자표기 崔彦撝
영문명칭 Choe Eon-wi
생몰년 868년(경문왕 8)-944년(혜종 1)
본관 경주
이칭 최신지(崔愼之), 최인연(崔仁渷)
시호 문영(文英)
출생지 경주
시대 고려
성격 문신



정의

신라 말 고려 초의 문신.

내용

개요

최언위(崔彦撝)는 경주 사람으로, 성품이 관대하고 인자하였으며 어렸을 때부터 글짓기를 잘하였다. 나이 18세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문과에 급제하였고, 42세에 비로소 신라에 귀국하였다.[1] 935년(태조 18)에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하자, 고려에 가서 태자사부(太子師傅)가 되었고 문한(文翰)을 위임받았다.[2] 고려에서 최언위는 고위층 자제를 교육하고 궁호(宮號)를 제정하는 일을 맡았다.[3]

세 개의 이름

최언위는 평생 신지(愼之), 인연(仁渷), 언위(彦撝) 등 세 개나 되는 이름을 사용하여, 한동안 이들이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하였다. 당나라로 떠나기 전까지는 '최신지'라는 이름을 사용하였고, 신라에 조정에 와서 작성한 비문에서는 '최인연'을, 그리고 새로운 왕조 고려에 귀부하여서는 '최언위'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4]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寧越 興寧寺址 澄曉大師塔碑)의 경우, 비문의 첫머리에 지은이를 밝힐 때 '최언위'라고 표기하였지만, 마지막 겸사(謙辭) 부분에서는 '최인연'이라는 이름이 나온다.[5]

Quote-left.png 조청대부(朝請大夫) 수(守) 집사시랑(執事侍郞)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 신(臣) 최언위(崔彦撝)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지음.


...(중략)...
지금의 임금께서는 신기(神器)로 아름다움을 잇고, 보도(寶圖)로 천명(天命)을 받으셨는데, 선왕의 뜻을 이어서 (대상의 행적을) 뒷사람들에게 널리 보여주고자 하여 하신(下臣)으로 하여금 높은 행적을 드러내게 하시었습니다. (하지만 본인) 인연(仁渷)은 재주는 토봉(吐鳳)이 되지 못하고 배움은 망양(亡羊)에 부끄러워합니다. 아름다운 자취를 드러내려는 것은 마음에 간절하지만 문장은 손을 다치게 할까 걱정될 뿐입니다.

Quote-right.png
출처: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 50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최신지, 최인연, 최언위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20세기 이후였다.[6]

잊혀진 문장가

최언위는 뛰어난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최치원(崔致遠), 최승우(崔承祐)와 함께 '일대삼최(一代三崔)'라 불리었다.[7] 954년에 건립된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奉化 太子寺 朗空大師塔碑)의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Quote-left.png 최인연(崔仁渷)은 진한(辰韓)의 무족(茂族: 귀족) 사람이다. 이른바 일대(一代)의 삼최(三崔)가 모두 당나라에 유학하여 금방(金榜)으로 급제하고 귀국하였으니 최치원(崔致遠), 최인연(崔仁渷), 최승우(崔承祐) 등인데, 인연(仁渷)은 그 중간에 속하는 사람이다. 학문은 해악(海岳)을 두루 덮었고, 열람한 책은 오거(五車)에 이거(二車)를 더하였으며, 재주는 풍운(風雲)을 모두 맡아 칠보시(七步詩)의 재능에서 삼보(三步)를 제하였으니, 실로 군자국(君子國)의 군자(君子)이며 또한 대인향(大人鄕)의 대인(大人)이라 하겠다. Quote-right.png
출처: 임세권 저, 이우태 편저,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한국국학진흥원, 2014, 36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최치원이 고려 문인들에게 동국 문장의 비조(鼻祖)로서 인정을 받은 것에 비해, 최언위는 고려 문학사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고 그 존재조차 잊혀졌다.[8] 최치원의 글은 문집의 형태로 정리되어 유전되었던 반면, 최언위의 작품은 돌로 전하는 부도탑비명 이외에 전해지는 문장이 없었다는 점이 가장 큰 원인이다. 또한 최언위의 아들 최행귀(崔行歸)가 광종대 역신으로 몰려 복주되었던 사건은 최언위의 문장이 철저히 민멸되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9]

비문의 찬자와 서자

당대의 문장가로서 최언위는 선사 비문의 찬술을 전담하면서 고려의 이념과 태조의 정교를 선양하는 데 앞장섰다.[10] 그가 지었거나 관계되어 있는 비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최언위가 찬자 혹은 서자로 참여한 탑비
시대 탑비 대상 승려 비문 찬술연도 비 건립연도 찬자 서자
신라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무염(無染) 890 924 (경명왕 8) 최치원 최언위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 행적(行寂) 경명왕代 954(광종 5) 최언위 김생(金生)의 글씨를 집자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 절중(折中) 924? 944(혜종 1) 최언위 최윤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 심희(審希) 924 924(태조 7) 신라 경명왕 비문: 행기, 제액: 최언위
고려 해주 광조사 진철대사탑비 이엄(利嚴) 936-7 937(태조 20) 최언위 이환추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비 여엄(麗嚴) 939 939(태조 22) 최언위 이환추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비 개청(開淸) 940? 940(태조 23) 최언위 구족달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형미(逈微) 940? 946(정종 1) 최언위 유훈율
예천 명봉사 경청선원 자적선사능운탑비 홍준(弘俊) 941? 941(태조 24) 최언위 미상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 현휘(玄暉) 943? 943(태조 26) 최언위 구족달
개성 오룡사 법경대사비 경유(慶猷) 943? 944(혜종 1) 최언위 선경

지식 관계망

  • 최언위가 제작에 참여한 탑비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무염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최치원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최언위 A는 B가 비문을 썼다 A ekc:calligrapher B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 행적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 최언위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 절중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 최언위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 심희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 신라 경명왕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 최언위 A는 B가 제액을 썼다 A ekc:calligrapher B
해주 광조사 진철대사탑비 이엄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해주 광조사 진철대사탑비 최언위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해주 광조사 진철대사탑비 이환추 A는 B가 비문을 썼다 A ekc:calligrapher B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비 여엄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비 최언위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비 이환추 A는 B가 비문을 썼다 A ekc:calligrapher B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비 개청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비 최언위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비 구족달 A는 B가 비문을 썼다 A ekc:calligrapher B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형미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최언위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유훈율 A는 B가 비문을 썼다 A ekc:calligrapher B
예천 명봉사 경청선원 자적선사능운탑비 홍준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예천 명봉사 경청선원 자적선사능운탑비 최언위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 현휘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 최언위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 구족달 A는 B가 비문을 썼다 A ekc:calligrapher B
개성 오룡사 법경대사비 경유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개성 오룡사 법경대사비 최언위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개성 오룡사 법경대사비 선경 A는 B가 비문을 썼다 A ekc:calligrapher B
사무외대사 형미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사무외대사 여엄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사무외대사 이엄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사무외대사 경유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공간정보

  • 최언위가 제작에 참여한 탑비의 소재지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고려사(高麗史)』 열전 권제5(列傳 卷第五) 제신(諸臣). 온라인 참조: "최언위", 고려시대 사료 데이터베이스,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국사편찬위원회.
  2. 정학수, "최언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김보경, 「비문에 새겨진 최언위의 삶, 사유, 문학」, 『고전과 해석』 Vol.5, 고전문학한문학연구학회, 2008, 159쪽.
  4. 이현숙, 「나말려초 최언위의 정치적 활동과 위상」, 『이화사학연구』 Vol.22, 이화여자대학교 사학연구소, 1995, 8쪽.
  5. 이현숙, 「나말려초 최언위의 정치적 활동과 위상」, 『이화사학연구』 Vol.22, 이화여자대학교 사학연구소, 1995, 16쪽.
  6. 이현숙, 「나말여초 최치원과 최언위」, 『퇴계학과 한국문화』 Vol.35-2,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04, 225쪽.
  7. 정학수, "최언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8. 이현숙, 「나말여초 최치원과 최언위」, 『퇴계학과 한국문화』 Vol.35-2,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04, 188-189쪽.
  9. 이현숙, 「나말여초 최치원과 최언위」, 『퇴계학과 한국문화』 Vol.35-2,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04, 225-226쪽.
  10. 김보경, 「비문에 새겨진 최언위의 삶, 사유, 문학」, 『고전과 해석』 Vol.5, 고전문학한문학연구학회, 2008, 159쪽.
  11. "태자사 낭공대사 비석", 주요 소장품 검색, 『소장품』online, 국립중앙박물관.
  12. 김응현, "광조사진철대사보월승공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3. 김응현, "오룡사법경대사보조혜광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권제46 열전 제6(卷第四十六 列傳 第六) 최언위(崔彦撝). 온라인 참조: "최언위", 삼국사기,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국사편찬위원회.
  • 『고려사(高麗史)』 열전 권제5(列傳 卷第五) 제신(諸臣). 온라인 참조: "최언위", 고려시대 사료 데이터베이스,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국사편찬위원회.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혜종의공대왕(惠宗義恭大王) 혜종(惠宗) 1년 12월 최언위의 졸기. 온라인 참조: "최언위의 졸기", 고려시대 사료 데이터베이스,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국사편찬위원회.
  • 김경혜, 「나말여초 최언위의 선승탑비명 연구」,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7.
  • 김보경, 「비문에 새겨진 최언위의 삶, 사유, 문학」, 『고전과 해석』 Vol.5, 고전문학한문학연구학회, 2008, 131-163쪽.
  • 김수천, 「최언위 〈성주사지낭혜화상비〉의 서체미」, 『서지학연구』 제31집, 서지학회, 2005, 201-230쪽.
  • 이현숙, 「나말려초 최언위의 정치적 활동과 위상」, 『이화사학연구』 Vol.22, 이화여자대학교 사학연구소, 1995, 7-42쪽.
  • 이현숙, 「나말여초 최치원과 최언위」, 『퇴계학과 한국문화』 Vol.35-2,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04, 187-232쪽.
  • 장일규, 「나말여초 지식인의 정치이념과 훈요10조 - 최언위의 정치이념을 중심으로」, 『진단학보』 제104호, 진단학회, 2007.12, 41-72쪽.
  • 정학수, "최언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최언위",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