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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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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弘俊)
BHST Monk1.png
대표명칭 홍준
영문명칭 Hongjun
한자 弘俊
생몰년 882(헌강왕 8)-939(태조 22)
시호 자적선사(慈寂禪師)
홍준(弘俊)
탑호 능운(陵雲)
성씨 김씨(金氏)
승탑비 예천 명봉사 경청선원 자적선사능운탑비



정의

신라 말 고려 초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자적선사 홍준(慈寂禪師 弘俊)의 속성은 김씨(金氏)로, 지방에 낙향한 신라 왕족 출신을 자처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출신지는 결락되어 확인되지 않는다.[1]

Quote-left.png 선사는 법휘(法諱)가 홍준(洪俊)이고, 세속의 성씨는 김(金)씨이시다. 그 조상은 진한(辰韓, 신라를 가리킨다) 으뜸가는 혈통이고 토군(兎郡)[2]의 이름난 집안이었다. 혹은 궁궐에서 선한 일을 널리 행하였고, 혹은 조정에서 나라를 보위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최연식, 「경청선원 자적선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12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유년기

비범한 어린 시절을 보낸 홍준은 어려서부터 출가에 뜻을 두었다.

Quote-left.png 중화(中和) 2년(882, 헌강왕 8) 3월 16일에 (선사가) 탄생하셨다.

선사는 나면서부터 뛰어난 용모를 가졌고 어린아이들의 놀이를 하지 않았다. 10세 무렵에 책을 가지고 배움의 자리에 나아갔다. 온화하고 공손하게 가풍을 잘 이었고, 조용히 조상의 덕을 잘 지켰다. 또한 한 번에 다섯 줄 씩 읽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동리에 이름을 떨쳤다. 불교 경전을 살펴보고 유교 경전과 비교해 보니 ...이 큰 바다의 근원에 ..., 개미와 거머리가 사는 숲이 ...(과 같아서)... 그 크고 작음이 ...... 이때에 ... 부모에게 (아뢰어) 출가에 힘쓰겠다고 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최연식, 「경청선원 자적선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13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출가수행

홍준은 대관령 동쪽에 있던 흑암선원(黑巖禪院)으로 진경대사 심희(眞鏡大師 審希, 855-923)를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출가한 나이는 확인되지 않지만 진경대사가 대관령 동쪽의 명주에 머물던 때가 890년대 말인 것을 고려할 때 10대 후반에 출가한 것으로 생각된다.[3]

Quote-left.png 천천히 동쪽으로 가 큰 고개를 넘어 흑암선원(黑巖禪院)에 이르러 진경대사(眞鏡大師)를 뵈었다. (진경대사는) 아름다운 모습은 얼음과 같고, ...는 옥과 같았다. (선사는) 곧바로 생각한 바를 아뢰고 마음속에 이루려하는 바를 우러러 고하였다. 대사는 이 세상을 헤쳐 가는 큰 배요 법문(法門)의 영수였다. 선사는 이에 스승으로 섬기며 공경을 지극히 다하였다. 바야흐로 도의 나무 곁에 깃들어 살면서 선림(禪林)의 열매를 얻게 된 것이다. Quote-right.png
출처: 최연식, 「경청선원 자적선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13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홍준은 899년[4]에 명주의 예양율사(乂良律師)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Quote-left.png 건부(乾符) 6년(실제로는 광화(光化) 2년(899, 효공왕 3))에 명주(溟州) 예양율사(乂良律師)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리고 나서 스투파를 참배하면서 기운이 뛰어난 이름난 산들을 돌아다니고, 대승의 가르침을 찾아 현명하고 밝은 스승들을 찾아다녔다. Quote-right.png
출처: 최연식, 「경청선원 자적선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14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활동

홍준은 경명왕 때에 왕실의 초청을 받은 진경대사를 따라 경주에 들어가 수도의 동천사(東泉寺)에 머물렀다.[5]

Quote-left.png 경명대왕(景明大王)께서 봉림대사(鳳林大師:심희)의 가르침이 높이 존경스럽고 그윽한 기운이 깊다고 여기셔서 특별히 왕명을 내려 서울에 오게 하셨으므로 선사가 모시고 갔다. 법회를 개최할 때에 동천사(東泉寺)에 머무르면서 대궐에 나아가 임금님을 뵈었다. Quote-right.png
출처: 최연식, 「경청선원 자적선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14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고려가 건국된 후에는 홍준의 명성을 접한 고려 태조의 초청으로 개경에 갔으며, 태조는 홍준을 구산선원(龜山禪院)에 머무르며 주지하게 하였다.

Quote-left.png 지금 임금(今上: 고려 태조)께서 선사가 선교(宣敎)[6]대사의 손자이고 법응대사(法膺大師: 진경대사 심희)의 제자로서 좋은 가르침의 모임을 크게 열어 은미한 뜻을 널리 설해주어 불교를 배우는 사람들이 수시로 운집한다는 것을 들으시고 이때에 특별히 사자를 보내 절에 이르게 하여 (선사로 하여금) 선을 배우는 무리들을 이끌고 서울에 이르게 하였다.

...(중략)...
다음날 옥당(玉堂)으로 맞아들여 법석 위에 오르게 하고, 그 선(禪)의 덕을 공경히 우러르면서 열 배를 듣는 뛰어남으로 (불법을) 깨달으시고, (선사의) 풍모를 삼가 받들면서 직접 (선사에게) 삼귀(三歸)를 바치는 예를 보이셨다. 서로 만나 마음을 터놓는 것이 늦음을 안타까워하면서 과거의 인연을 가만히 생각하였다. 이에 담당 관청에 명하여 서울 안에서 ... 곧 구산선원(龜山禪院)을 정하여 머무르기를 청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최연식, 「경청선원 자적선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14-15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입적

이후 홍준은 개경의 구산선원에서 선법을 펼치다 939년(태조 22) 10월 1일에 그곳에서 입적하였다.[7]

Quote-left.png 이곳에서 좌선하고 계시면서 5년이 지나니, (불법의) 종지에 노닐 날이 얼마 남지 않게 되고 변화하여 돌아가실 날이 가까이 다가왔다. 천복(天福)[8] 4년(939, 태조 22) 10월 1일에 구산선원의 법당에서 입적하셨다. 돌아가신 모습은 살아계실 때와 같아서 과일 같은 입술이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돌아가실 때) 몸을 버리는 이치가 어찌 하나뿐이겠는가. 혹은 나무를 의지하여 열반에 드시고, 혹은 산속에 들어가서 삼매에 드시며, 혹은 껍질을 벗고 떠나가시고, 혹은 (몸을) 불태우고 가신다. 세속의 향년은 58세이시고, 승려로서는 40안거를 지내셨다. Quote-right.png
출처: 최연식, 「경청선원 자적선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15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태조 왕건은 그의 입적을 안타까워하여 '자적선사(慈寂禪師)'라는 시호와 '능운지탑(陵雲之塔)'이라는 탑호를 하사하고, 아울러 선사의 행적을 기록하는 탑비를 세우게 하였다.[9]

Quote-left.png 임금께서는 평소 (선사의) 그윽한 가르침을 우러르셨는데, 입적하셨다는 말을 들으시고 깊은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시며 마음 속으로 대단히 슬퍼하셨다. 곧바로 자적선사(慈寂禪師)의 시호를 내리시고 (부도) 탑의 이름을 능운지탑(陵雲之塔)으로 정해주셨으니 예에 맞는 것이다. Quote-right.png
출처: 최연식, 「경청선원 자적선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15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지식관계망

  • 예천 명봉사 경청선원 자적선사능운탑비와 자적선사 홍준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예천 명봉사 경청선원 자적선사능운탑비 홍준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예천 명봉사 경청선원 자적선사능운탑비 최언위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예천 명봉사 경청선원 자적선사능운탑비 고려 태조 A는 B가 이름을 지었다 A dc:contributor B
예천 명봉사 경청선원 자적선사능운탑비 예천 명봉사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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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산선문 봉림산문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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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 신라 경명왕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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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 최언위 A는 B가 제액을 썼다 A ekc:calligrapher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882년 홍준이 태어남.
899년 홍준구족계를 받음.
939년 홍준이 구산선원에서 입적함.
941년 홍준의 탑비인 예천 명봉사 경청선원 자적선사능운탑비가 건립됨.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최연식, 「경청선원 자적선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5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2. 현토군을 의미하지만 여기에서는 우리나라를 가리킨다.
  3. 최연식, 「경청선원 자적선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5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4. 비문에는 건부(乾符) 6년으로 되어있지만, 건부 6년은 879년으로 홍준의 출생 이전이다. 건부는 아마도 건녕(乾寧, 894-987년)을 잘못 쓴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다만 건녕은 897년까지만 사용되었다. 신라 말에는 중국의 개원(改元)이 바로 전해지지 않아서 앞의 연호가 계속 사용된 사례들이 적지 않다. 건녕 6년은 실제로는 광화(光化) 2년이며 899년에 해당한다. 당시 홍준의 나이는 18세이다. 최연식, 「경청선원 자적선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14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5. 최연식, 「경청선원 자적선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5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6. 선교(宣敎)는 6조 혜능(慧能)을 가리킴.
  7. 최연식, 「경청선원 자적선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5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8. 후진(後晉) 고조(高祖)의 연호로 936-943년에 사용되었다.
  9. 최연식, 「경청선원 자적선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5-6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