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례초언해"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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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례|상례(喪禮)]]에 관한 필수사항만을 발췌하여 언해한 책이다. 발문이나 간기 등이 없어 편저자 및 정확한 간행 연대를 밝히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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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문이나 간기 등이 없어 편저자 및 정확한 간행 연대를 밝히기 어렵다.
[[주자]]의『[[가례|가례(家禮)]]』에서 제시하는 예절 가운데 [[관례|관례(冠禮)]]와 [[혼례|혼례(婚禮)]]는 경사스러운 일이기에 간혹 소략해도 무방하지만, [[상례]]와 [[제례|제례(祭禮)]], 특히 [[상례]]의 경우는 소홀함이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조선사회 전반에 『[[가례]]』의 보급이 충분하지 못했던 탓에 전통적인 [[속례|속례(俗禮)]]에 따른 [[상례]]가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이 책은 이러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상례초언해]]』는 『[[가례]]』의 상례 관련 본문을 중심으로 [[초상]]에서 [[장례]]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발췌하여 언해하였다. 책머리에 [[오복도|오복도(五服圖)]]실려 있고, 1장 복제(服制) 목록을 시작으로 상례에 관한 실용적인 사항이 순서대로 실려 있으며, 필요에 따라 그림을 수록해 설명하였다. 마지막 장에는 [[양위설찬도|양위설찬도(兩位設饌圖)]]실려 있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233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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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의『[[가례|가례(家禮)]]』에서 제시하는 예절 가운데 [[관례|관례(冠禮)]]와 [[혼례|혼례(婚禮)]]는 경사스러운 일이기에 간혹 일부를 생략해도 무방하지만, [[상례]]와 [[제례|제례(祭禮)]], 특히 [[상례]]의 경우는 소홀함이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조선사회 전반에 『[[가례]]』의 보급이 충분하지 못했던 탓에 전통적인 [[속례|속례(俗禮)]]에 따른 [[상례]]가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이 책은 이러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상례초언해]]』는 『[[가례]]』의 상례 관련 본문을 중심으로 [[초상]]에서 [[장례]]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발췌하여 언해하였다. 책머리에 [[오복도|오복도(五服圖)]]」가 실려 있고, 1장 복제(服制) 목록을 시작으로 상례에 관한 실용적인 사항이 순서대로 실려 있으며, 필요에 따라 그림을 수록해 설명하였다. 마지막 장에는 [[양위설찬도|양위설찬도(兩位設饌圖)]]」가 실려 있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233쪽.</REF>
  
 
===[[가례|가례(家禮)]]와 [[속례|속례(俗禮)]]===
 
===[[가례|가례(家禮)]]와 [[속례|속례(俗禮)]]===
실제 『[[가례|주자가례]]』가 편찬된 시기는 13세기 말엽이었고, 『[[가례|주자가례]]』가 한반도로 들어온 것은 고려 후기에서 조선 건국 시기였다. 즉 이 시기는 100년이나 차이가 났으며 중국과 한반도의 풍속은 매우 달랐다. 이런 이유로 실제 『[[가례|주자가례]]』의 내용이 한반도에 정착하기 위해서, 유학자들은 예전부터 내려오던 [[속례]]와 [[가례]]의 간극을, [[성리학]]적 관점에서 재정립해야 하였다. 그리하여 만약 [[속례]] 중 [[성리학]]적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 채용하고, [[성리학]]적 관점에서 너무 벗어나면 배척하는 방법으로 [[속례]]와 [[가례]]의 차이점을 없애려 노력하였다.<ref>남재주, 「속례(俗禮)의 사례와 수용,비판」, 『東洋 禮學』, Vol-22, 2009, 121-125쪽.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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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가례|주자가례]]』가 편찬된 시기는 13세기 말엽이었고, 『[[가례|주자가례]]』가 한반도로 들어온 것은 고려 후기에서 조선 건국 시기였다. 즉 이 둘의 시기는 100년이나 차이가 났으며 중국과 한반도의 풍속도 매우 달랐다. 이런 이유로 실제 『[[가례|주자가례]]』의 내용이 한반도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예전부터 내려오던 [[속례]]와 [[가례]]의 간극을 [[성리학]]적 관점에서 재정립해야 하였다. 그리하여 만약 [[속례]] 중 [[성리학]]적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 채용하고, [[성리학]]적 관점에서 너무 벗어나면 배척하는 방법으로 [[속례]]와 [[가례]]의 차이점을 없애려 노력하였다.<ref>남재주, 「속례(俗禮)의 사례와 수용,비판」, 『東洋 禮學』, Vol-22, 동양예학회, 2009, 121-149쪽.</ref>
  
 
===『[[가례|주자가례]]』의 전파과정 ===
 
===『[[가례|주자가례]]』의 전파과정 ===
『[[가례|주자가례]]』가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공민왕시기(1351년-1374년)로 이때부터 고려 조정은 『[[가례|주자가례]]』 내용의 예식절차를 관료에게 적용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료들이 부정적인 움직임을 보았고 특히 『[[가례|주자가례]]』를 옹호하는 [[신진사대부]]의 세력도 당시에는 큰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가례|주자가례]]』의 [[가례]]가 조선 조정에서 받아들여진 것은 바로 성종 시기였다(1469-1495) 이 시기부터 조정에서는 백성들에게 [[가례]]를 전파하려 하였지만, 일반인들은 유학자 보다도 더 [[속례]]에 친숙한 상황이었다. 이후 선조시기(1567년-1608년) 유학자들의 당쟁과 [[임진왜란]] [[병자호란]]등 사회적 격변기에 많은 유학자가 낙향하여, 이들이 적극적으로 [[가례]]에 대해 전파하면서 17세기에 이르러 일반민들도 [[가례]]를 따르기 시작한 것이다. <ref>이문주, 「《주자가례》의 조선 시행과정과 가례주석서에 대한 연구」, 『儒敎文化硏究』, Vol-16, 2010, 38-49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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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례|주자가례]]』가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공민왕시기(1351년-1374년)로 이때부터 고려 조정은 『[[가례|주자가례]]』 내용의 예식절차를 관료에게 적용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료들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특히 『[[가례|주자가례]]』를 옹호하는 [[신진사대부]]의 세력도 당시에는 큰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가례|주자가례]]』의 [[가례]]가 조선 조정에서 받아들여진 것은 바로 성종 시기(1469-1495)였다. 이 시기부터 조정에서는 백성들에게 [[가례]]를 전파하려 하였지만, 일반인들은 유학보다도 [[속례]]에 친숙한 상황이었다. 이후 선조시기(1567년-1608년) 치열한 당쟁과 [[임진왜란]] [[병자호란]]등 사회적 격변기를 겪으면서 많은 유학자가 낙향하였다. 이들이 각지에서 적극적으로 [[가례]]에 대해 전파하면서 17세기에 이르러 일반민들도 [[가례]]를 따르기 시작한 것이다. <ref>이문주, 「《주자가례》의 조선 시행과정과 가례주석서에 대한 연구」, 『儒敎文化硏究』, Vol-16, 2010, 38-49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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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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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주, 「속례(俗禮)의 사례와 수용,비판」, 『東洋 禮學』, Vol-22, 2009, 121-1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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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주, 「속례(俗禮)의 사례와 수용,비판」, 『東洋 禮學』, Vol-22, 동양예학회, 2009, 121-149쪽.  
**이문주, 「《주자가례》의 조선 시행과정과 가례주석서에 대한 연구」, 『儒敎文化硏究』, Vol-16, 2010, 37-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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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주, 「《주자가례》의 조선 시행과정과 가례주석서에 대한 연구」, 『儒敎文化硏究』, Vol-16, 성균관대학교 유교문화연구소, 2010, 37-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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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2일 (화) 23:15 기준 최신판

상례초언해
한글팀 상례초언해 01 표지.jpg
한자명칭 喪禮抄諺解
영문명칭 A Korean annotation of necessary process in funeral rites
작자 미상
간행시기 19세기 간본
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청구기호 A5E-31
유형 고서
크기(세로×가로) 18.3×12.6cm
판본 목판본
수량 1책
표기문자 한글


정의

상례(喪禮)에 관한 필수사항만을 발췌하여 언해한 책이다.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발문이나 간기 등이 없어 편저자 및 정확한 간행 연대를 밝히기 어렵다. 주자의『가례(家禮)』에서 제시하는 예절 가운데 관례(冠禮)혼례(婚禮)는 경사스러운 일이기에 간혹 일부를 생략해도 무방하지만, 상례제례(祭禮), 특히 상례의 경우는 소홀함이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조선사회 전반에 『가례』의 보급이 충분하지 못했던 탓에 전통적인 속례(俗禮)에 따른 상례가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이 책은 이러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상례초언해』는 『가례』의 상례 관련 본문을 중심으로 초상에서 장례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발췌하여 언해하였다. 책머리에 「오복도(五服圖)」가 실려 있고, 1장 복제(服制) 목록을 시작으로 상례에 관한 실용적인 사항이 순서대로 실려 있으며, 필요에 따라 그림을 수록해 설명하였다. 마지막 장에는 「양위설찬도(兩位設饌圖)」가 실려 있다. [1]

가례(家禮)속례(俗禮)

실제로 『주자가례』가 편찬된 시기는 13세기 말엽이었고, 『주자가례』가 한반도로 들어온 것은 고려 후기에서 조선 건국 시기였다. 즉 이 둘의 시기는 100년이나 차이가 났으며 중국과 한반도의 풍속도 매우 달랐다. 이런 이유로 실제 『주자가례』의 내용이 한반도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예전부터 내려오던 속례가례의 간극을 성리학적 관점에서 재정립해야 하였다. 그리하여 만약 속례성리학적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 채용하고, 성리학적 관점에서 너무 벗어나면 배척하는 방법으로 속례가례의 차이점을 없애려 노력하였다.[2]

주자가례』의 전파과정

주자가례』가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공민왕시기(1351년-1374년)로 이때부터 고려 조정은 『주자가례』 내용의 예식절차를 관료에게 적용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료들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특히 『주자가례』를 옹호하는 신진사대부의 세력도 당시에는 큰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주자가례』의 가례가 조선 조정에서 받아들여진 것은 바로 성종 시기(1469-1495)였다. 이 시기부터 조정에서는 백성들에게 가례를 전파하려 하였지만, 일반인들은 유학보다도 속례에 더 친숙한 상황이었다. 이후 선조시기(1567년-1608년) 치열한 당쟁과 임진왜란 병자호란등 사회적 격변기를 겪으면서 많은 유학자가 낙향하였다. 이들이 각지에서 적극적으로 가례에 대해 전파하면서 17세기에 이르러 일반민들도 가례를 따르기 시작한 것이다. [3]

지식 관계망

  • 상례초언해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상례초언해 주자가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상례초언해 오복도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상례초언해 양위설찬도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주자가례 상례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주자가례 가례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상례초언해 상례 A는 B의 언해본이다 A edm:isDerivativeOf B
주자가례 주자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성리학 가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성리학 속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임진왜란 성리학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임진왜란 속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속례 병자호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상례초언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A는 B에 소장되었다 A edm:currentLocation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9세기 상례초언해가 간행되었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39197 127.054387 상례초언해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주석

  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233쪽.
  2. 남재주, 「속례(俗禮)의 사례와 수용,비판」, 『東洋 禮學』, Vol-22, 동양예학회, 2009, 121-149쪽.
  3. 이문주, 「《주자가례》의 조선 시행과정과 가례주석서에 대한 연구」, 『儒敎文化硏究』, Vol-16, 2010, 38-49쪽.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남재주, 「속례(俗禮)의 사례와 수용,비판」, 『東洋 禮學』, Vol-22, 동양예학회, 2009, 121-149쪽.
    • 이문주, 「《주자가례》의 조선 시행과정과 가례주석서에 대한 연구」, 『儒敎文化硏究』, Vol-16, 성균관대학교 유교문화연구소, 2010, 37-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