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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진덕, 「『주자가례』와 죽음의 유학적 이해」, 『정신문화연구』 제23권 제3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0. | * 최진덕, 「『주자가례』와 죽음의 유학적 이해」, 『정신문화연구』 제23권 제3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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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일 (목) 23:05 기준 최신판
계빈 (啓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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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계빈 |
---|---|
한자표기 | 啓殯 |
유형 | 의례 |
관련개념 | 흉례, 상례 |
정의
발인(發引) 전, 빈전에 봉안되어 있는 찬궁을 여는 의식으로, 국장(國葬)에서는 승하한지 5개월째 되는 달에 거행한다.[1]
내용
계빈 3일 전에 사직(社稷)과 종묘(宗廟)에 고한 뒤, 당일에 빈전의 영좌(靈座) 앞에 예찬(禮饌)을 진설한다. 향과 술을 올리고 축문을 읽은 다음 찬궁을 열고 재궁을 꺼내 털고 닦는다. 다시 예찬을 진설하여 향과 술을 올리고 슬픔을 다하고 위문을 마치면 의식이 끝난다. 조선시대 전 시기를 통해서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다만 세종 대의 계빈은 『국조오례의』로 오면서 집사관의 명칭들이 바뀌었고, 영조 대에 『국조상례보편』에는 영조의 원비인 정성왕후의 국상 때 계빈을 발인 1일 전에 행하도록 하여 『국조오례의』에 3일 전 규정을 고치도록 했다. 또한, 사직과 종묘에 고할 때, 왕세자나 왕세손의 상인 소상(小喪)이나 왕비의 상인 내상(內喪)의 경우는 사직에 고하지 않고 종묘에만 고한다. 종묘에 고할 때는 조상에게 영결을 고하는 조조(朝祖)의 뜻을 함께 고하도록 했다. 대한제국 시기 황제의 예를 표방한 『대한예전』에는 황실의 국상(國喪) 과정을 다룬 의례들은 기재되지 않다.[2]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종친 | 계빈 | A는 B를 참여하였다 | A ekc:participates B |
백관 | 계빈 | A는 B를 참여하였다 | A ekc:participates B |
상례 | 계빈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주석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주자가례(朱子家禮)』
- 이현진, 「영조대 왕실 喪葬禮의 정비와 『國朝喪禮補編』」, 『韓國思想史學』 37, 한국사상사학회, 2011.
- 이현진, 「정조 초 영조의 國葬 절차와 의미」, 『泰東古典硏究』 27,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2011.
- 이현진, 『왕의 죽음, 정조의 국장』, 글항아리, 2015.
- 이현진, 『조선왕실의 상장례』, 신구문화사, 2017.
- 임민혁, 「조선초기 『國朝五禮儀』 흉례의 구조와 의례적 성격」, 『역사와 실학』 50 , 2013.
- 鄭鐘秀, 『朝鮮初期 喪葬儀禮 硏究』,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 최규순, 「傳統 喪禮에서의 復과 復衣에 나타난 多面的 성격」, 『한국학논총』 V.34,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0.
- 최진덕, 「『주자가례』와 죽음의 유학적 이해」, 『정신문화연구』 제23권 제3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