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낙산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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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유사]]』에 의하면, 낙산사는 671년(신라, 문무왕 11) [[의상|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 + | 『[[삼국유사]]』에 의하면, 낙산사는 671년(신라, 문무왕 11) [[의상|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ref>김학범,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0978 양양 낙산사 일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 | [[의상]]은 동해변에 [[관음보살]]이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 양양의 해안 굴을 찾아왔다. 이레 동안 기도를 하다가 앉은 자리째로 물 위로 뛰어들었는데 팔부신중(불법을 수호하는 8종류의 신)이 나타나 그를 굴 속으로 안내하였다. [[의상]]이 굴 속에서 예를 올리니 동해의 용이 나타나 여의주 한 알을 바치고 수정 염주 한 꾸러미가 내려오므로, 그것을 가지고 나왔다. [[의상]]이 다시 이레 동안 기도를 하였더니 [[관음보살]]이 홀연히 나타나 이르기를, “앉은 자리 위 꼭대기에 한 쌍의 대가 솟아날 것이니 그 자리에 불전을 지어라” 하는 것이었다. 의상이 그 말을 듣고 나오니 과연 쌍죽이 땅에서 솟아나왔다. 이에 관음상을 빚어 모셨더니 그 대가 없어졌으므로, [[의상]]은 그제야 이곳에 진신이 거주함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절의 이름을 ‘낙산사’라 하고 수정 염주와 여의주를 성전에 모시게 되었다.<ref>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 3 - 동해ㆍ설악』, 돌베개, 2011.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7521&cid=42840&categoryId=42847 낙산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3 - 동해ㆍ설악,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
− | + | 창건된 후 786년(원성왕 2)에 낙산사는 화재로 대부분의 사찰 건물이 소실되었는데, [[범일|범일국사]]가 858년(헌안왕 2)에 불전을 다시 짓고 정취보살상(正趣菩薩像)을 봉안하였다. 10세기 중엽에 화재가 발생하여 대부분의 사찰이 다시 소실되었다. <ref>김학범,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0978 양양 낙산사 일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 1950년 한국전쟁 때에 사찰 전체가 또다시 소실되었다. 1953년에 원통보전이 신축된 이후부터 1999년까지 7층 석탑이 중수되고 무설전, 무이당, 범종각, 심검당, 근행당 등의 전각이 건립되면서 사찰의 면모를 새롭게 갖추었다. 2005년 4월 5일에 낙산사는 화재로 또다시 큰 피해를 입었다.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 발생한 대형 산불은 낙산사의 건물은 물론 보물로 지정되었던 낙산사 동종(보물 479호)까지 소실되는 피해를 가져왔다. 이후 낙산사 재건에 필요한 내용을 확인하기 위한,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2007년까지 원통보전, 범종루, 심검당, 취숙헌, 선열당, 홍예문누각, 홍련암연화당, 해우소 등을 신축하였고 2009년에는 설선당, 근행당, 응향각, 정취전, 취숙헌, 고향실, 빈일루, 대성문 등을 신축하였다. | + | 고려시대에 이르러 이를 다시 중창하고 13세기 초에 [[이규보]] 등이 관음보살상을 보수하고 복장유물을 봉안했다. <ref>김학범,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0978 양양 낙산사 일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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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태조|태조 이성계]]는 1399년(정종 원년)에 낙산사에서 능엄법회를 열었고, 1399년(태종 4)에 기청법회를 열었다. 1467년(세조 13)에 [[조선 세조|세조]] 역시 낙산사에 헌향하고 사찰중건을 명하였으며, 1469년(예종 원년)에는 범종을 조성하였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낙산사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1631년(인조 9)에는 36명의 승려가 화재로 소실된 건물을 중창하였으며, 1850년(철종 원년)에는 원통보전, 용선전, 어실각 등을 중수하였다. <ref>김학범,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0978 양양 낙산사 일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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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년 한국전쟁 때에 사찰 전체가 또다시 소실되었다. 1953년에 원통보전이 신축된 이후부터 1999년까지 7층 석탑이 중수되고 무설전, 무이당, 범종각, 심검당, 근행당 등의 전각이 건립되면서 사찰의 면모를 새롭게 갖추었다. 2005년 4월 5일에 낙산사는 화재로 또다시 큰 피해를 입었다.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 발생한 대형 산불은 낙산사의 건물은 물론 보물로 지정되었던 낙산사 동종(보물 479호)까지 소실되는 피해를 가져왔다. 이후 낙산사 재건에 필요한 내용을 확인하기 위한,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2007년까지 원통보전, 범종루, 심검당, 취숙헌, 선열당, 홍예문누각, 홍련암연화당, 해우소 등을 신축하였고 2009년에는 설선당, 근행당, 응향각, 정취전, 취숙헌, 고향실, 빈일루, 대성문 등을 신축하였다.<ref>김학범,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0978 양양 낙산사 일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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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참고문헌'''== | ||
+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 3 - 동해ㆍ설악』, 돌베개, 2011.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7521&cid=42840&categoryId=42847 낙산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3 - 동해ㆍ설악,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 ||
+ | *김학범,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0978 양양 낙산사 일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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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승탑/검토요청]] |
2017년 11월 24일 (금) 16:17 기준 최신판
양양 낙산사 (襄陽 洛山寺) |
|
대표명칭 | 양양 낙산사 |
---|---|
한자 | 襄陽 洛山寺 |
주소 | 강원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로 100, 일원 (전진리) |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제495호 |
문화재 지정일 | 2008년 12월 18일 |
관리자 | 양양군 |
건립시기 | 671년 |
창건자 | 의상 |
경내문화재 | 양양 낙산사 칠층석탑, 양양 낙산사 건칠관음보살좌상, 양양 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비 및 사리장엄구 일괄, 낙산사홍예문, 낙산사원장, 낙산사홍련암 |
|
정의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에 위치한 사찰. 조계종 신흥사의 말사이다.
내용
『삼국유사』에 의하면, 낙산사는 671년(신라, 문무왕 11)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1]
의상은 동해변에 관음보살이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 양양의 해안 굴을 찾아왔다. 이레 동안 기도를 하다가 앉은 자리째로 물 위로 뛰어들었는데 팔부신중(불법을 수호하는 8종류의 신)이 나타나 그를 굴 속으로 안내하였다. 의상이 굴 속에서 예를 올리니 동해의 용이 나타나 여의주 한 알을 바치고 수정 염주 한 꾸러미가 내려오므로, 그것을 가지고 나왔다. 의상이 다시 이레 동안 기도를 하였더니 관음보살이 홀연히 나타나 이르기를, “앉은 자리 위 꼭대기에 한 쌍의 대가 솟아날 것이니 그 자리에 불전을 지어라” 하는 것이었다. 의상이 그 말을 듣고 나오니 과연 쌍죽이 땅에서 솟아나왔다. 이에 관음상을 빚어 모셨더니 그 대가 없어졌으므로, 의상은 그제야 이곳에 진신이 거주함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절의 이름을 ‘낙산사’라 하고 수정 염주와 여의주를 성전에 모시게 되었다.[2]
창건된 후 786년(원성왕 2)에 낙산사는 화재로 대부분의 사찰 건물이 소실되었는데, 범일국사가 858년(헌안왕 2)에 불전을 다시 짓고 정취보살상(正趣菩薩像)을 봉안하였다. 10세기 중엽에 화재가 발생하여 대부분의 사찰이 다시 소실되었다. [3]
고려시대에 이르러 이를 다시 중창하고 13세기 초에 이규보 등이 관음보살상을 보수하고 복장유물을 봉안했다. [4]
태조 이성계는 1399년(정종 원년)에 낙산사에서 능엄법회를 열었고, 1399년(태종 4)에 기청법회를 열었다. 1467년(세조 13)에 세조 역시 낙산사에 헌향하고 사찰중건을 명하였으며, 1469년(예종 원년)에는 범종을 조성하였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낙산사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1631년(인조 9)에는 36명의 승려가 화재로 소실된 건물을 중창하였으며, 1850년(철종 원년)에는 원통보전, 용선전, 어실각 등을 중수하였다. [5]
1950년 한국전쟁 때에 사찰 전체가 또다시 소실되었다. 1953년에 원통보전이 신축된 이후부터 1999년까지 7층 석탑이 중수되고 무설전, 무이당, 범종각, 심검당, 근행당 등의 전각이 건립되면서 사찰의 면모를 새롭게 갖추었다. 2005년 4월 5일에 낙산사는 화재로 또다시 큰 피해를 입었다.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 발생한 대형 산불은 낙산사의 건물은 물론 보물로 지정되었던 낙산사 동종(보물 479호)까지 소실되는 피해를 가져왔다. 이후 낙산사 재건에 필요한 내용을 확인하기 위한,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2007년까지 원통보전, 범종루, 심검당, 취숙헌, 선열당, 홍예문누각, 홍련암연화당, 해우소 등을 신축하였고 2009년에는 설선당, 근행당, 응향각, 정취전, 취숙헌, 고향실, 빈일루, 대성문 등을 신축하였다.[6]
지식관계망
- 의상대사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양양 낙산사 | 의상 | A는 B가 창건하였다 | A ekc:founder B |
양양 낙산사 | 관음보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양양 낙산사 | 범일 | A는 B가 중창하였다 | A ekc:renovator B |
양양 낙산사 | 이규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양양 낙산사 | 조선 태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양양 낙산사 | 조선 세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천희 | 양양 낙산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 K-HERITAGE, 천년을 이어온 아름다운 일출 양양 낙산사 의상대와 홍련암,
- YTN NEWS, 10년 전 오늘 잿더미된 '낙산사', 얼마나 복원됐나 / YTN,
주석
- ↑ 김학범, "양양 낙산사 일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 3 - 동해ㆍ설악』, 돌베개, 2011. 온라인 참조: "낙산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3 - 동해ㆍ설악,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김학범, "양양 낙산사 일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학범, "양양 낙산사 일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학범, "양양 낙산사 일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학범, "양양 낙산사 일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 3 - 동해ㆍ설악』, 돌베개, 2011. 온라인 참조: "낙산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3 - 동해ㆍ설악,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김학범, "양양 낙산사 일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