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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참고문헌'''== | ||
===인용 및 참조=== | ===인용 및 참조=== | ||
+ | * 『世宗實錄五禮儀』 | ||
+ | * 『[[대사례의궤]]』 | ||
* 국립민속박물관, 『조선시대 대사례와 향사례』, 국립민속박물관, 2009. | * 국립민속박물관, 『조선시대 대사례와 향사례』, 국립민속박물관, 2009. | ||
* 김문식ㆍ김지영 외 4명, 『왕실의 천지제사』, 돌베개, 2011. | * 김문식ㆍ김지영 외 4명, 『왕실의 천지제사』, 돌베개, 2011. |
2017년 8월 18일 (금) 22:44 판
정의
황제나 황태자, 왕이나 왕세자, 황후나 황태자비, 왕비나 왕세자비 등의 왕족이 의례를 행하기 위해 궁 밖으로 행차하는 의례이다.
내용
거가출궁하는 목적에 따라 의식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제례
제사 3일 전에 유사(有司)가 관원들이게 각자의 직무에 임하게 한다. 제사 2일 전 장악원에서 헌현(軒懸)을 벌여 놓는다. 제사 1일 전에 통례원(通禮院)에서 왕세자와 종친, 백관이 서는 자리를 설치한다. 문관은 백관의 조복, 무관은 [[기복|기복(器服)을 입는다. 당일 왕은 왕의 조복을 입고 여(輿)를 타고 나가다가 경복궁 근정문에 도착하면 왕은 연(輦)으로 갈아타고 경복궁 광화문 밖으로 나간다. 경복궁 광화문 밖에서 왕세자와 종친, 백관은 왕의 수레가 오면 국궁하고 지나가면 평신한 뒤 왕을 따라간다. 왕이 제례의 재궁(齋宮)에 도착하면 의식이 끝난다.[1]
대사례
종친과 백관 및 학생 등이 창경궁 집춘문 밖에서 왕을 기다렸다 초엄(初嚴)을 알리면 장위(仗衛)와 노부(菌簿)를 창경궁 집춘문 안에 진열하고 여를 준비한다. 북이 이엄을 알리면, 종친과 백관 4품 이상은 백관의 조복을 입고, 5품 이하는 백관의 공복을 입는다. 왕은 창덕궁 영화당을 나와 여(輿)를 타고 창경궁 집춘문에 이른다. 창경궁 집춘문에서 성균관까지는 연(輦)을 탄다. 창경궁 집춘문에서 기다리던 종친과 백관 등은 왕이 도착하면 국궁하며 왕이 지나가면 몸을 펴고 따라간다. 왕이 성균관 하연대에 도착해 연에서 내려 문묘의 동문 밖인 임시거처인 악차에 도착하면 의식이 끝난다.[2]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
왕 | 거가출궁 | A는 B를 거행한다 |
왕세자 | 거가출궁 | A는 B를 행한다 |
왕비 | 거가출궁 | A는 B를 행한다 |
왕세자빈 | 거가출궁 | A는 B를 행한다 |
영조 | 거가출궁 | A는 B를 행한다 |
거가출궁 | 제례 | A는 B의 부분이다 |
거가출궁 | 대사례 | A는 B의 부분이다 |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世宗實錄五禮儀』
- 『대사례의궤』
- 국립민속박물관, 『조선시대 대사례와 향사례』, 국립민속박물관, 2009.
- 김문식ㆍ김지영 외 4명, 『왕실의 천지제사』, 돌베개, 2011.
- 김문식ㆍ송지원, 「국가제례의 변천과 복원」, 『서울 20세기 생활ㆍ문화변천사』, 서울시정개발원, 2001.
- 신병주, 「영조대 대사례의 실시와 『대사례의궤』」, 『한국학보』 28권 1호, 일지사(한국학보), 2002.
- 이욱, 「근대 국가의 모색과 국가의례의 변화-1894~1908년 국가 제사의 변화를 중심으로」, 『정신문화연구』 95, 한국학중앙연구원, 2004.
- 이욱, 「조선전기 유교국가의 성립과 국가제사의 변화」, 『한국사연구』 118, 한국사연구회,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