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선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 1번째 줄: | 1번째 줄: | ||
| + | 서선달(徐先達) | ||
| + | |||
| + | |||
덕필유린(德必有隣) | 덕필유린(德必有隣) | ||
2026년 10월 5일 (월) 11:15 판
서선달(徐先達)
덕필유린(德必有隣)
덕이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웃이 있다
옛날 옛적, 조선 철종 때 경상북도 상주 땅에 서씨 성을 가진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서선달이라 불렀다.
본래 조선시대에 ‘선달’이란 과거시험에 급제하고도 아직 벼슬을 받지 못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하지만 서선달은 과거에 급제한 적이 없었다. 아니, 과거시험을 본 적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마을 사람들은 그를 서선달이라 불렀다.
그는 비록 집안이 오래전에 몰락하여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으며 겨우 생계를 이어갔지만, 성품만큼은 누구보다 곧고 착했다. 자신의 형편이 어려워도 남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고, 누군가 도움이 필요하면 가장 먼저 달려갔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서선달’이라 불렀던 것이다.
어느 해, 유난히 심한 흉년이 들었다.
서선달의 농사도 흉작을 면하지 못했다. 봄이 찾아왔지만 씨앗을 살 돈조차 없었다.
‘이러다가는 올해 농사를 아예 지을 수 없겠구나.’
궁리 끝에 서선달은 서울에서 쌀가게 일을 하며 살아가는 큰아들을 찾아갔다.
효심 깊은 아들은 아버지의 딱한 사정을 듣고 가슴 아파했다. 그는 주인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아직 받지 않은 몇 달 치 품삯을 미리 받아 아버지에게 건넸다.
“아버지, 이것으로 종자를 마련하십시오.”
서선달은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
“고맙다. 올해 농사를 잘 지어 꼭 갚으마.”
그렇게 아버지는 돈을 품에 넣고 고향 상주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상주에서 서울까지,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이어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서선달은 오백 리가 넘는 길을 걸어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문경새재의 높은 고개를 넘던 중, 그만 전대에 넣어두었던 돈을 길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서선달은 그것도 모르고 삼십 리나 더 걸었다.
한참 뒤 허리춤이 허전한 것을 느낀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어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급히 몸을 더듬어 보니 돈이 들어 있던 전대가 사라지고 없었다.
“아이고, 내 돈!”
아들의 피땀 어린 품삯이었다.
농사를 지을 종자를 마련할 유일한 돈이기도 했다.
서선달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리고 왔던 길을 따라 미친 듯이 되돌아 뛰기 시작했다.
삼십 리를 다시 달려 높은 고갯마루에 이르렀을 때였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그는 더 이상 걸을 수 없어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못난 놈아! 돈을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그렇게 걸어왔단 말이냐!”
그는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치며 한탄했다.
그때였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가?”
고개를 들어보니 도포를 입은 한 노인이 서 있었다.
“제가…… 돈을 잃어버렸습니다.”
“돈이 얼마나 들어 있었나?”
“백 냥이었습니다.”
노인은 말없이 품속에서 전대 하나를 꺼내 들었다.
“혹시 이것이 자네 것인가?”
서선달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이게 어떻게……!”
분명 자신의 전대였다.
“제가 조금 전 이 고개를 넘다가 이것을 주웠네. 열어보니 백 냥이나 들어 있더군. 돈을 잃어버린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타들어 갈까 싶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네.”
노인은 돈을 발견한 뒤에도 욕심내지 않았다.
오히려 돈을 잃어버린 사람이 반드시 다시 찾으러 올 것이라 생각하고, 몇 시간이나 그 자리에서 주인을 기다렸던 것이다.
서선달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어르신, 제 목숨을 살려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손사래를 쳤다.
“은혜랄 게 뭐가 있겠나. 잃은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
노인은 전대를 서선달에게 건네주고는 아무런 보답도 바라지 않은 채 산 아래로 내려갔다.
서선달은 한동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산신령이었을까?’
그는 이상한 감동을 가슴에 품은 채 다시 길을 떠났다.
얼마 후 서선달은 안동의 어느 나루터에 이르렀다.
그때 어디선가 다급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사람 살려주세요!”
놀라 달려가 보니 한 젊은이가 거센 물살에 휩쓸려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강가에 몰려 있었지만 아무도 선뜻 물에 뛰어들지 못했다.
“물살이 너무 세오. 잘못 들어갔다가는 둘 다 죽을 수 있소!”
서선달도 물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평생 산골에서 살아 헤엄칠 줄 몰랐다.
그렇다고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서선달은 품에서 돈꾸러미를 꺼내 높이 들어 올렸다.
“누구든 저 젊은이를 구해주는 사람에게 이 백 냥을 주겠소!”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정말 백 냥을 준단 말이오?”
“그렇소! 반드시 주겠소!”
그러자 한 장정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거센 물살을 헤치고 젊은이에게 다가간 장정은 마침내 그를 강가로 끌어냈다.
사람들이 환호했다.
젊은이는 물을 토하며 겨우 정신을 차렸다.
“선비님…… 정말 고맙습니다. 선비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 강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서선달은 약속대로 장정에게 백 냥을 모두 건넸다.
그 돈은 자신의 전 재산이었다.
젊은이는 서선달의 손을 잡았다.
“우리 집으로 함께 가시지요.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반드시 은혜를 갚겠습니다.”
서선달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사람 목숨을 살리는 데 무슨 보답을 바라겠소.”
그러나 젊은이는 끝내 물러서지 않았다.
“제 목숨을 살려주신 분을 그냥 보내드릴 수는 없습니다.”
결국 서선달은 젊은이를 따라 안동으로 향했다.
얼마 후 그들이 도착한 곳은 안동에서도 이름난 부자의 집이었다.
높은 담장과 커다란 솟을대문, 수많은 행랑채가 이어진 대저택이었다.
서선달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렇게 큰 집이 세상에 있었던가?’
잠시 후 집 안에서 한 노인이 급히 달려 나왔다.
“내 아들을 살려주신 분이 바로 귀인이십니까?”
서선달은 고개를 숙였다.
“별일 아닙니다. 제가 한 일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인의 얼굴을 본 순간 서선달은 깜짝 놀랐다.
“어르신은……?”
노인 역시 서선달을 바라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자네는……?”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노인은 바로 얼마 전 문경새재에서 서선달의 돈을 찾아주었던 사람이었다.
서선달은 놀라 입을 열었다.
“어르신께서 바로 제 돈을 찾아주신 분이셨군요!”
노인은 그제야 모든 사정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자네가 내 아들을 살려주었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서선달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돈을 잃어버렸다면 무슨 돈으로 아드님을 살릴 수 있었겠습니까? 어르신께서 먼저 제 돈을 찾아주셨기에 제가 아드님을 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노인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이보게……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신기하구먼.”
노인은 서선달의 손을 굳게 잡았다.
“자네가 내 아들의 목숨을 살려주었으니, 이 은혜를 어찌 잊겠는가.”
노인은 아들의 목숨을 구해준 보답으로 서선달에게 큰돈과 재물을 내렸다. 훗날에는 상주에 있는 서선달의 고향까지 찾아가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전답을 마련해주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서선달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착하게 살아온 사람에게는 반드시 좋은 인연이 돌아오는 법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 있다.
덕필유린(德必有隣).
덕이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뜻이다.
서선달은 돈을 잃어버렸을 때 욕심 없는 노인을 만났고, 자신은 다시 그 노인의 아들을 살렸다.
선행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베푼 작은 선의는 돌고 돌아 다시 자신에게 돌아왔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해져도 정직하게 사는 것이 어리석은 일은 아니다.
당장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여도, 사람의 마음속에 쌓인 덕과 신뢰는 언젠가 반드시 새로운 인연으로 돌아온다.
어렵고 힘들어도 바르게 살자.
남을 속이지 말고, 가진 것이 적어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자.
덕은 반드시 이웃을 만들고, 선행은 반드시 또 다른 선행을 부른다.
이것이 바로 오래전 서선달의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는 가르침이다.
德必有隣
덕이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웃이 있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목차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효양산 은선사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희성당(希聖堂)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