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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덕필유린(德必有隣) 조선 철종때 경상 도 상주땅에 서씨 성을 가진 농부가 살았는데 사람들 은 그를 그냥 서선 달 이라고 불렀습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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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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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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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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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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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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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섭대천]](利涉大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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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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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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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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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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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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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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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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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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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양산 은선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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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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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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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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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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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성당]](希聖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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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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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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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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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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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성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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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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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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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양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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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성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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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성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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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강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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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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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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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고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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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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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튀르키예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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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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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가리아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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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아시아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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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자흐스탄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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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즈베키스탄서씨]]

2026년 10월 5일 (월) 11:06 판

덕필유린(德必有隣)

조선 철종때 경상 도 상주땅에 서씨 성을 가진 농부가 살았는데 사람들 은 그를 그냥 서선 달 이라고 불렀습 니다.

원래 선달이란 과 거 시험에 급제는 했으나 아직 벼슬 을 받지 못한 사람 을 이르는 말이지 만

이 사람은 무슨 급제와는 관련이 없었고 그냥 사람 이 심성이 착하고 무던해서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불렀 다고 합니다.

서 선달은 남의 땅을 빌려서 겨우 입에 풀칠하며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인 가는 봄이 왔어도 그해 농사를 지을 비용이 없을 정도 로 곤궁하였습 니다.

생각다 못한 그는 서울 쌀가게에서 장부를 담당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큰아들을 찾아갔 습니다.

효자 아들은 주인 께 통사정하여 6개 월 치 월급을 임시 로 먼저 받아 아버 지께 드렸습니다.

서 선달은 500리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데 문경 새재 고개를 넘던 중 그만 돈을 흘려 잃어버리고 말았 습니다.

이때 반대쪽에서 고개를 넘어오던 한 노인이 이 돈 꾸러미를 발견했 는데 세어보니 백 냥이나 되는 큰돈 이었습니다.

한편 서 선달은 30 리를 더 와서야 돈 을 잃어버린 것을 알았는데 전 재산 을 잃어버렸으니 눈앞이 깜깜했습 니다.

그런데 다행히 돈 을 발견한 사람이 착한 사람이었습 니다.

횡재라고 좋아하는 하인에게 일러 말합니다.

잃은 사람은 반드 시 찾아온다. 목숨같이 귀한 돈 을 잃은 그 사람은 얼마나 속이 탈꼬!"

그 노인은 가던 길 을 멈추고 몇 시간 이고 돈 주인이 나 타나기를 기다렸 습니다.

과연 한참 후에 서 선달이 얼굴이 흙빛이 되어 나타 났습니다.

주운 돈을 서선달 에게 돌려주자

서 선달은 "어른께 서 제 목숨을 살려 주셨습니다" 하며 돈을 찾아 준 은혜 를 갚겠다며 사례 를 하려 하는데

그 노인은 은혜랄 게 있소 당연한 일 인데" 하고는 펄쩍 뛰며 사양을 했습 니다. 그는 주운 돈 100냥을 서선달에 게 전달을 하고 가 던 길을 갔습니다.

서 선달도 다시 집 을 향해 갔고 이윽 고 문경 진남강가 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마침 한 청년 이 물에 빠졌는데 구경꾼은 많아도 누구 하나 뛰어들 어 구해 줄 생각을 못하고 있었습니 다.

그때,서 선달이 외쳤습니다.

"누구든지 저 청년 을 구해내면 백냥 을 주겠소."

그러자 어느 장정 이 뛰어들어 청년 을 살려냈습니다.

죽다 살아난 도령 이 서선달에게 말 하기를

"정말 고맙습니다. 어른이 아니었으면 저는 수중 고혼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집은 안동에 서 제일 큰 부자인 데 함께 가시면 백냥을 갚아드리 겠습니다"

서 선달 은 무슨 사례를 받고자 한 일은 아니었으나 자기의 사정도 있 는지라 같이 안동 까지 가게 되었습 니다.

안동의 청년의 집 은 과연 고래 등 같은 부잣집 이었습니다.

그때 청년의 부친 이 득달같이 달려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부친이 란 사람은? 다름 아닌 서 선달의 돈을 찾아준 바로 그 노인 이었습 니다.

"온 재산을 털어 제 아들을? 구해 주시 다니 당신은 진정 의인이요? 정말 고맙소이다."

아닙니다. 댁의 아드님은 어르신 께서 살려내신 것입니다

제가 돈을 잃었다 면 무슨 수로 살렸겠습니까?

겸손의 말씀 이십 니다.

7대 독자 외아들을 살려주신 은혜 백골이 되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안동 권부자 노인 은 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살려준 보 답으로 돈 천냥을 나귀에 실어 서선달 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다 시 서선달이 사는 상주 이안 고을을 찾아와 백 섬 지기 전답까지 사주고 돌아 갔습니다.

이 일은 후에 조정 에까지 알려져 안동과 상주 두 고을이 모두 조정 으로부터 후한 상 을 받았다고 합니다.

요즈음 시대는 참 착하게 살기가 힘 든 시대입니다. 착한 것이 오히려 바보처럼 여겨지는 안타까운 시대입 니다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고 사기치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덕필유린 입니다

덕이 있고 심성이 착한 사람은 반드 시 주위에 돕는 손길이 있습니다.

착하고 양심적으로 사는 것이 바보 같 아 보이지만 사람 답게 행복하게 사는 지름길임을 명심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 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정직하게 살면 하늘도 사람들도 반드시 돕습니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1]]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효양산 은선사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희성당(希聖堂)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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