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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왕이었던 [[동성왕]]은 왕권 전제화 정책을 무리하게 시행한 탓에 반기를 든 위사좌평 [[백가]]에게 시해당하는 비운을 맞았는데 동성왕의 반대파에 의해 추대된 무령왕은 [[부여 가림성|가림성]](加林城)에서 저항하던 [[백가]]를 502년 정월에 한솔 [[해명]]과 함께 토벌했다. 의문스러운건 [[백가]]는 토벌군이 오자 저항도 하지 않고 항복했으며 그대로 처형당했다는 점인데 [[백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동성왕이 암살당했을 때, 《일본서기》에는 국인들이 그를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백가 혼자만의 소행이 아니라, 어느 정도 모종의 합의나 지원이 있었으나 후에 무령왕 세력들에게 이용당하고 팽당한게 아닌가 싶다.] 때문에 그의 배후에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남래(南來) 귀족 세력 해씨(解氏)[* 한강 유역을 본거지로 하는 귀족 세력이다.]와 연합하여 동성왕을 암살[* 동성왕 시절 《삼국사기》 기록에는 남산의 두 호랑이가 싸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두 호랑이가 | + | 선왕이었던 [[동성왕]]은 왕권 전제화 정책을 무리하게 시행한 탓에 반기를 든 위사좌평 [[백가]]에게 시해당하는 비운을 맞았는데 동성왕의 반대파에 의해 추대된 무령왕은 [[부여 가림성|가림성]](加林城)에서 저항하던 [[백가]]를 502년 정월에 한솔 [[해명]]과 함께 토벌했다. 의문스러운건 [[백가]]는 토벌군이 오자 저항도 하지 않고 항복했으며 그대로 처형당했다는 점인데 [[백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동성왕이 암살당했을 때, 《일본서기》에는 국인들이 그를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백가 혼자만의 소행이 아니라, 어느 정도 모종의 합의나 지원이 있었으나 후에 무령왕 세력들에게 이용당하고 팽당한게 아닌가 싶다.] 때문에 그의 배후에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남래(南來) 귀족 세력 해씨(解氏)[* 한강 유역을 본거지로 하는 귀족 세력이다.]와 연합하여 동성왕을 암살[* 동성왕 시절 《삼국사기》 기록에는 남산의 두 호랑이가 싸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두 호랑이가 [[동성왕]]과 [[무령왕]]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는 해석이 있다.]했다는 학설이 있다. 실제로 무령왕 치세기에는 전임인 [[동성왕]] 치세기에는 없었던 고구려 원정을 시도하며 한강 유역을 수복하기 위한 정책을 펼쳤다. |
− | 일각에서는 동성왕 암살의 배후가 무령왕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도 하는데 무령왕이 [[백가]]를 사주해 동성왕을 시해하고는 배후임을 감추기 위해 백가를 처단했다는 [[토사구팽]]을 주장한 것이나 근거가 빈약하기 때문에 진실은 알 길이 없다. [[부여곤지]]에게는 | + | 일각에서는 [[동성왕]] 암살의 배후가 무령왕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도 하는데 무령왕이 [[백가]]를 사주해 동성왕을 시해하고는 배후임을 감추기 위해 백가를 처단했다는 [[토사구팽]]을 주장한 것이나 근거가 빈약하기 때문에 진실은 알 길이 없다. [[부여곤지]]에게는 [[무령왕]]과 [[동성왕]] 외에도 3명의 아들이 더 있었고, 이들이 각각 사씨, 백씨, 연씨[* 사씨 백씨 연씨 모두 남래(南來) 귀족 세력 해씨(解氏)등과 대착점에 있는 웅진 일대를 본거지로 두는 신진 귀족들이었다.]와 [[혼인]]했다고 가정하면 동성왕이 3남의 [[외척]]이었던 사씨의 세력 기반인 [[사비성]]으로 천도를 계획해 사실상 3남을 왕태자로 책봉하자 이에 백가가 위기감을 느끼고 [[부여곤지]]의 4남을 즉위시키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는게 더 합리적인 것 같다. |
503년 고목성에 쳐들어온 [[위말갈]]을 격퇴시켰고, 달솔 우영(優永)을 보내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했다. 507년 고구려의 사주를 받은 위말갈이 다시 고목성에 쳐들어오자 남쪽에 2개의 책(柵)을 세우고, 장령성(長嶺城)을 쌓았다. 512년 고구려가 가불성과 원산성을 점거하고 약탈을 일삼자 군사 3,000명을 이끌고 위천(葦川)의 북쪽으로 진출해 크게 무찔렀다. 523년 좌평 인우(因友)와 달솔 [[사오]](沙烏)로 하여금 쌍현성(雙峴城)을 쌓게 했다. 고구려와의 [[전쟁]]을 통해 북방에서 세력의 균형을 이룬 무령왕은 [[전라남도]] 지방의 [[침미다례]] 등 구 [[마한]] 세력을 완전히 일소하고, 512년에는 《[[일본서기]]》 기록상[* 원문은 '백제가 일본한테 [[임나]]국의 상차리(上哆唎)·하차리(下多唎)·사타(娑陀)·모루(牟婁)의 4현을 달라고 청했다'는 것인데 이는 백제가 대가야 영토인 4곳을 빼앗았다고 해석된다. [[고고학]]적으로도 5세기 호남 동부에서는 [[고령군|고령]] [[대가야]]계 [[토기]]가 출토되고 있어 한동안 가야 세력권이었던 것이 확인되고 있다.] [[가야]]([[반파국]]) 세력하에 있었던 동부로도 진출하여 [[임실군|임실]], [[남원시|남원]] 방면에서 내륙으로 동진, [[섬진강]] 일대를 확보하고 [[낙동강]] 서부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무령왕은 새로 확보한 지역에 군령과 성주를 파견하여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으며, [[전라도]] 동부 지역으로 진출을 시도하던 [[대가야]]는 이 시기 백제한테 밀려서 고립당하는 위기에 처했다. 고대에는 교역이 [[농업]] 생산력만큼 [[국가]]의 명운을 좌지우지하는 사업이었는데 섬진강을 통해서 [[광양만]]에 이르던 길을 고스란히 백제에게 빼앗기면서 어려움에 처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는 이후로도 [[대가야]]가 이런 섬진강 침입에 매우 강하게 반응하고 방어 태세를 갖추는 모습을 보이지만 체급의 차이로 여의치 않았던 모양이다. 섬진강의 물산과 교통로 확보로 백제가 이후 [[신라]]와의 싸움에서 이 길을 이용해서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근간이 되기도 했다. | 503년 고목성에 쳐들어온 [[위말갈]]을 격퇴시켰고, 달솔 우영(優永)을 보내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했다. 507년 고구려의 사주를 받은 위말갈이 다시 고목성에 쳐들어오자 남쪽에 2개의 책(柵)을 세우고, 장령성(長嶺城)을 쌓았다. 512년 고구려가 가불성과 원산성을 점거하고 약탈을 일삼자 군사 3,000명을 이끌고 위천(葦川)의 북쪽으로 진출해 크게 무찔렀다. 523년 좌평 인우(因友)와 달솔 [[사오]](沙烏)로 하여금 쌍현성(雙峴城)을 쌓게 했다. 고구려와의 [[전쟁]]을 통해 북방에서 세력의 균형을 이룬 무령왕은 [[전라남도]] 지방의 [[침미다례]] 등 구 [[마한]] 세력을 완전히 일소하고, 512년에는 《[[일본서기]]》 기록상[* 원문은 '백제가 일본한테 [[임나]]국의 상차리(上哆唎)·하차리(下多唎)·사타(娑陀)·모루(牟婁)의 4현을 달라고 청했다'는 것인데 이는 백제가 대가야 영토인 4곳을 빼앗았다고 해석된다. [[고고학]]적으로도 5세기 호남 동부에서는 [[고령군|고령]] [[대가야]]계 [[토기]]가 출토되고 있어 한동안 가야 세력권이었던 것이 확인되고 있다.] [[가야]]([[반파국]]) 세력하에 있었던 동부로도 진출하여 [[임실군|임실]], [[남원시|남원]] 방면에서 내륙으로 동진, [[섬진강]] 일대를 확보하고 [[낙동강]] 서부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무령왕은 새로 확보한 지역에 군령과 성주를 파견하여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으며, [[전라도]] 동부 지역으로 진출을 시도하던 [[대가야]]는 이 시기 백제한테 밀려서 고립당하는 위기에 처했다. 고대에는 교역이 [[농업]] 생산력만큼 [[국가]]의 명운을 좌지우지하는 사업이었는데 섬진강을 통해서 [[광양만]]에 이르던 길을 고스란히 백제에게 빼앗기면서 어려움에 처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는 이후로도 [[대가야]]가 이런 섬진강 침입에 매우 강하게 반응하고 방어 태세를 갖추는 모습을 보이지만 체급의 차이로 여의치 않았던 모양이다. 섬진강의 물산과 교통로 확보로 백제가 이후 [[신라]]와의 싸움에서 이 길을 이용해서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근간이 되기도 했다. | ||
− | 북쪽으로는 백제군이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까지 다시 진출했다는 설도 설득력 있다. 근거는 무령왕 기록에 보이는 수곡성, 한산, 한수 이북 등의 명칭으로, 당시 백제 영역이 어디까지였는지, 한강 유역에 대한 지배권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학계에서 논의 중에 있다. 고고학적으로 보아서는 이 시기 고구려가 한강 이남 지역을 빠르게 포기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이 때 고구려는 [[안장왕]] 치세였는데 안장왕이 등장하는 경기도 [[고양시]] 북부 지역의 [[고봉산]] 관련 [[미녀]] 한씨 설화가 있는 것을 봐서 [[동성왕]] - 무령왕 - [[성왕(백제)|성왕]] 당시 고양시 일대까지 백제가 수복한 것으로 본다. 《[[삼국사기]]》에도 기록된 [[안장왕|흥안 태자]]와 미녀 한씨 설화를 보면 무령왕 시기의 백제가 지금의 [[강화도]]인 혈성과 경기도 고양시인 개백현까지 태수를 두고 직접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안장왕이 [[태자]] 시절이었던 이 시기는 무령왕의 재위 말년에 해당하는데 이 시기의 백제는 한강 이북까지 탈환하고 지배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안장왕이 한강 유역을 재탈환한 시기는 백제 성왕 재위 초기에 해당하는데 이에 따르면 한강 유역은 이미 성왕 이전에 백제가 일시적으로 되찾은 것이 되고, 안장왕이 다시 빼앗은 것을 백제 | + | 북쪽으로는 백제군이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까지 다시 진출했다는 설도 설득력 있다. 근거는 무령왕 기록에 보이는 수곡성, 한산, 한수 이북 등의 명칭으로, 당시 백제 영역이 어디까지였는지, 한강 유역에 대한 지배권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학계에서 논의 중에 있다. 고고학적으로 보아서는 이 시기 고구려가 한강 이남 지역을 빠르게 포기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이 때 고구려는 [[안장왕]] 치세였는데 안장왕이 등장하는 경기도 [[고양시]] 북부 지역의 [[고봉산]] 관련 [[미녀]] 한씨 설화가 있는 것을 봐서 [[동성왕]] - [[무령왕]] - [[성왕(백제)|성왕]] 당시 고양시 일대까지 백제가 수복한 것으로 본다. 《[[삼국사기]]》에도 기록된 [[안장왕|흥안 태자]]와 미녀 한씨 설화를 보면 무령왕 시기의 백제가 지금의 [[강화도]]인 혈성과 경기도 고양시인 개백현까지 태수를 두고 직접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안장왕이 [[태자]] 시절이었던 이 시기는 무령왕의 재위 말년에 해당하는데 이 시기의 백제는 한강 이북까지 탈환하고 지배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안장왕이 한강 유역을 재탈환한 시기는 백제 성왕 재위 초기에 해당하는데 이에 따르면 한강 유역은 이미 성왕 이전에 백제가 일시적으로 되찾은 것이 되고, 안장왕이 다시 빼앗은 것을 백제 [[성왕]]이 신라 [[진흥왕]]과 힘을 합쳐 재탈환한 것이 된다. 그래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한강 유역을 잃은 동성왕~무령왕 시기, 한강 유역 관련 지명이 자주 나오는 것이다. 부여에서 갑자기 고구려식 온돌과 그릇 등이 출현하더니 곧 백제 영역 전반으로 빠르게 전파되는 양상이 바로 무령왕 시기에 관찰되는데, 무령왕이 일시적으로 수복한 경기도 등지에서 고구려인들 혹은 고구려 문화를 익힌 옛 백제인들을 부여와 부여 인근 지역에 사민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강 유역을 영역화했는지는 아직 논의 중이지만, 적어도 백제군이 일시적으로나마 옛 위례성까지 치고올라갔던 건 거의 기정사실이었던 걸로 보인다. 무령왕 시절의 백제군이 개성을 비롯한 황해도 지역까지 치고 올라간 적 있다는 학설도 제기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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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외에도 고고학적으로 백제가 [[마한]] 일대를 직할령으로 복속한 시점도 [[무령왕]] 대이다. [[근초고왕]] 재위기부터 시작된 이 지리멸렬한 사업을 무령왕이 종결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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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권 강화 === | === 왕권 강화 === | ||
무령왕은 즉위 후 동성왕을 시해한 귀족들의 세력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양서(역사책)|양서]]》의 <백제전>에 따르면 '''22개로 운영되던 [[담로]]에 부여씨 왕족을 보내 통치하도록 하여 중앙집권적 질서하에서 정치 안정'''을 이루게 되었다. 부여씨 왕족을 지방 통치에 이용하여 토목공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동원할 수 있게 되었고, 왕족은 경제적인 기반을 확대시켜 나갔다. 최고 관등인 좌평제를 개편하여 신·구 세력을 통제했고, 직책이 없는 좌평이 등장했는데 이는 귀족 세력을 국왕 중심으로 서열화하고 국정을 책임있게 분담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다. | 무령왕은 즉위 후 동성왕을 시해한 귀족들의 세력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양서(역사책)|양서]]》의 <백제전>에 따르면 '''22개로 운영되던 [[담로]]에 부여씨 왕족을 보내 통치하도록 하여 중앙집권적 질서하에서 정치 안정'''을 이루게 되었다. 부여씨 왕족을 지방 통치에 이용하여 토목공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동원할 수 있게 되었고, 왕족은 경제적인 기반을 확대시켜 나갔다. 최고 관등인 좌평제를 개편하여 신·구 세력을 통제했고, 직책이 없는 좌평이 등장했는데 이는 귀족 세력을 국왕 중심으로 서열화하고 국정을 책임있게 분담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다. |
2022년 8월 30일 (화) 09:35 판
목차
개요
생애
출생
손자 위덕왕과 함께 생몰년이 알려진 몇 안 되는 백제 왕이다. 《일본서기》에서 461년에 태어났다고 전하고 있으며, 실제로 무령왕릉 발굴 결과 523년에 사망할 당시 62세라고 기록되어 있어 교차검증까지 확실히 마쳤다. 즉위도 40세에 했으니 늦은 편이었지만 장수했다. 만약 동성왕 대신 바로 즉위했으면 44년을 재위할 수도 있었고 그렇다면 재위 44년의 위덕왕과 맞먹는다.
일본에서 태어났는데 고려의 충숙왕, 조선의 현종, 대한민국의 이명박 대통령과 더불어 외국에서 태어난 몇 안 되는 한국사의 지도자이다. 동성왕이 개로왕의 동생인 부여곤지의 아들이며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다는 통설에 따른다면 동성왕의 출생이 부여곤지의 도왜 이후가 되므로 정황상 동성왕 역시 외국에서 태어났다고 봐야한다. 다만 무령왕은 일본 본토 출생은 아니고 중간에 기착했던 섬에서 태어났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개로왕의 아들이거나 부여곤지의 큰아들이다. 부여곤지가 왜국으로 파견나갈 때 임신한 개로왕의 부인을 데려갔고, 그때 낳은 아이가 사마, 즉 무령왕이었다고 전한다. 한때 거의 무시되었지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출생 연대와 《일본서기》에서 전하는 부여곤지의 왜국 파견 시기가 일치하고, 유사점이 보여 이를 지지하는 입장이 늘어났다. 《일본서기》 유랴쿠 덴노 5년(461년) 조에 따르면 개로왕은 아우인 부여곤지를 왜국에 사신으로 보낼 때 곤지의 간청에 따라 자신의 임신한 부인[* 여기서 부인(夫人)은 삼국시대 당시 왕비를 일컫는 호칭.]을 곤지의 아내로 삼아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가는 도중 개로왕의 부인이자 부여곤지의 새 아내가 산기를 느껴 지금의 사가현 북쪽에 있는 섬인 카카라노시마에 정박하여 무령왕을 낳았다. 무령왕의 다른 이름 '사마왕(斯麻王)'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461년) 6월 병술삭(1일)에 임신한 부인이 카스리노키시(加須利君)의 말처럼 츠쿠시(筑紫)의 카카라노시마(各羅島)[* 현 카카라시마(加唐島).]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래서 아이 이름을 세마키시(嶋君)라 하였다. 이에 코니키시(軍君)가 곧 배에 태워 세마키시를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이가 무령왕(武寧王)이다. 백제 사람들은 이 섬을 니리무세마(主島)라 불렀다. >---- >《일본서기》 권14 [5년]
부여곤지가 일본으로 넘어가던 중 카카라노시마(各羅島)에 정박하여 무령왕을 낳았는데 섬에서 태어난 것 때문에 '사마왕'이라 하기도 한다. 《일본서기》는 무령왕의 이름을 '세마키시(도군, 嶋君)'라고 전하는데 고대 일본어가 아닌 고대 한국어(백제어)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중세 한국어 천자문에서 왕을 가리키는 훈으로 '긔지'라는 말이 있는 걸로 볼 때 현대어로 역하면 '섬기지' 정도가 될 듯 하다.] 무령왕이 태어난 섬의 동굴에는 관련 설화가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덧붙여서 서동요에 나오는 서동으로 추정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사실 무령왕의 출신은 불분명하다. 무령왕이 개로왕의 아들이자 동성왕의 사촌 혹은 부여곤지의 아들이며 동성왕의 이복형이라는 것은 《일본서기》의 기록이고[* 부여곤지의 아들이며 동성왕의 이복형이라는 것은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신찬》의 기록이며 개로왕의 아들이자 동성왕의 사촌이라는 전승은 《일본서기》의 다른 권에 실려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동성왕의 차남으로 기록되어 있다. 백제/왕사 문서에 있는 가계도나 한국사 교과서 등의 왕계표는 《삼국사기》 기록에 따른 것이라 일단 이리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무령왕릉 발굴 결과 무령왕이 동성왕이나 삼근왕보다 나이가 많은 것으로 밝혀져서 현재는 《일본서기》의 기록 쪽을 인정하고 있다. 다만 《일본서기》에서도 2가지 전승에 대해 어느 쪽이 맞는지 우리도 정확히는 모르겠다는 구절이 나오며 동성왕은 문주왕의 아들이라는 가설도 있어서 무령왕과 동성왕의 혈연 관계가 정확히 어떠한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은 무령왕이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윤색이라는 학설이 있으며, 《일본서기》에서 두 가지 설을 언급하는 이유 또한, 무령왕의 생물학적 친부로 추정되는 부여곤지의 후손이 전하는 전승과 무령왕의 아들 순타태자의 후손이 전하는 전승이 상충하기 때문이라는 학설이 있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즉위와 전쟁
선왕이었던 동성왕은 왕권 전제화 정책을 무리하게 시행한 탓에 반기를 든 위사좌평 백가에게 시해당하는 비운을 맞았는데 동성왕의 반대파에 의해 추대된 무령왕은 가림성(加林城)에서 저항하던 백가를 502년 정월에 한솔 해명과 함께 토벌했다. 의문스러운건 백가는 토벌군이 오자 저항도 하지 않고 항복했으며 그대로 처형당했다는 점인데 백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동성왕이 암살당했을 때, 《일본서기》에는 국인들이 그를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백가 혼자만의 소행이 아니라, 어느 정도 모종의 합의나 지원이 있었으나 후에 무령왕 세력들에게 이용당하고 팽당한게 아닌가 싶다.] 때문에 그의 배후에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남래(南來) 귀족 세력 해씨(解氏)[* 한강 유역을 본거지로 하는 귀족 세력이다.]와 연합하여 동성왕을 암살[* 동성왕 시절 《삼국사기》 기록에는 남산의 두 호랑이가 싸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두 호랑이가 동성왕과 무령왕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는 해석이 있다.]했다는 학설이 있다. 실제로 무령왕 치세기에는 전임인 동성왕 치세기에는 없었던 고구려 원정을 시도하며 한강 유역을 수복하기 위한 정책을 펼쳤다.
일각에서는 동성왕 암살의 배후가 무령왕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도 하는데 무령왕이 백가를 사주해 동성왕을 시해하고는 배후임을 감추기 위해 백가를 처단했다는 토사구팽을 주장한 것이나 근거가 빈약하기 때문에 진실은 알 길이 없다. 부여곤지에게는 무령왕과 동성왕 외에도 3명의 아들이 더 있었고, 이들이 각각 사씨, 백씨, 연씨[* 사씨 백씨 연씨 모두 남래(南來) 귀족 세력 해씨(解氏)등과 대착점에 있는 웅진 일대를 본거지로 두는 신진 귀족들이었다.]와 혼인했다고 가정하면 동성왕이 3남의 외척이었던 사씨의 세력 기반인 사비성으로 천도를 계획해 사실상 3남을 왕태자로 책봉하자 이에 백가가 위기감을 느끼고 부여곤지의 4남을 즉위시키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는게 더 합리적인 것 같다.
503년 고목성에 쳐들어온 위말갈을 격퇴시켰고, 달솔 우영(優永)을 보내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했다. 507년 고구려의 사주를 받은 위말갈이 다시 고목성에 쳐들어오자 남쪽에 2개의 책(柵)을 세우고, 장령성(長嶺城)을 쌓았다. 512년 고구려가 가불성과 원산성을 점거하고 약탈을 일삼자 군사 3,000명을 이끌고 위천(葦川)의 북쪽으로 진출해 크게 무찔렀다. 523년 좌평 인우(因友)와 달솔 사오(沙烏)로 하여금 쌍현성(雙峴城)을 쌓게 했다. 고구려와의 전쟁을 통해 북방에서 세력의 균형을 이룬 무령왕은 전라남도 지방의 침미다례 등 구 마한 세력을 완전히 일소하고, 512년에는 《일본서기》 기록상[* 원문은 '백제가 일본한테 임나국의 상차리(上哆唎)·하차리(下多唎)·사타(娑陀)·모루(牟婁)의 4현을 달라고 청했다'는 것인데 이는 백제가 대가야 영토인 4곳을 빼앗았다고 해석된다. 고고학적으로도 5세기 호남 동부에서는 고령 대가야계 토기가 출토되고 있어 한동안 가야 세력권이었던 것이 확인되고 있다.] 가야(반파국) 세력하에 있었던 동부로도 진출하여 임실, 남원 방면에서 내륙으로 동진, 섬진강 일대를 확보하고 낙동강 서부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무령왕은 새로 확보한 지역에 군령과 성주를 파견하여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으며, 전라도 동부 지역으로 진출을 시도하던 대가야는 이 시기 백제한테 밀려서 고립당하는 위기에 처했다. 고대에는 교역이 농업 생산력만큼 국가의 명운을 좌지우지하는 사업이었는데 섬진강을 통해서 광양만에 이르던 길을 고스란히 백제에게 빼앗기면서 어려움에 처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는 이후로도 대가야가 이런 섬진강 침입에 매우 강하게 반응하고 방어 태세를 갖추는 모습을 보이지만 체급의 차이로 여의치 않았던 모양이다. 섬진강의 물산과 교통로 확보로 백제가 이후 신라와의 싸움에서 이 길을 이용해서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근간이 되기도 했다.
북쪽으로는 백제군이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까지 다시 진출했다는 설도 설득력 있다. 근거는 무령왕 기록에 보이는 수곡성, 한산, 한수 이북 등의 명칭으로, 당시 백제 영역이 어디까지였는지, 한강 유역에 대한 지배권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학계에서 논의 중에 있다. 고고학적으로 보아서는 이 시기 고구려가 한강 이남 지역을 빠르게 포기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이 때 고구려는 안장왕 치세였는데 안장왕이 등장하는 경기도 고양시 북부 지역의 고봉산 관련 미녀 한씨 설화가 있는 것을 봐서 동성왕 - 무령왕 - 성왕 당시 고양시 일대까지 백제가 수복한 것으로 본다. 《삼국사기》에도 기록된 흥안 태자와 미녀 한씨 설화를 보면 무령왕 시기의 백제가 지금의 강화도인 혈성과 경기도 고양시인 개백현까지 태수를 두고 직접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안장왕이 태자 시절이었던 이 시기는 무령왕의 재위 말년에 해당하는데 이 시기의 백제는 한강 이북까지 탈환하고 지배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안장왕이 한강 유역을 재탈환한 시기는 백제 성왕 재위 초기에 해당하는데 이에 따르면 한강 유역은 이미 성왕 이전에 백제가 일시적으로 되찾은 것이 되고, 안장왕이 다시 빼앗은 것을 백제 성왕이 신라 진흥왕과 힘을 합쳐 재탈환한 것이 된다. 그래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한강 유역을 잃은 동성왕~무령왕 시기, 한강 유역 관련 지명이 자주 나오는 것이다. 부여에서 갑자기 고구려식 온돌과 그릇 등이 출현하더니 곧 백제 영역 전반으로 빠르게 전파되는 양상이 바로 무령왕 시기에 관찰되는데, 무령왕이 일시적으로 수복한 경기도 등지에서 고구려인들 혹은 고구려 문화를 익힌 옛 백제인들을 부여와 부여 인근 지역에 사민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강 유역을 영역화했는지는 아직 논의 중이지만, 적어도 백제군이 일시적으로나마 옛 위례성까지 치고올라갔던 건 거의 기정사실이었던 걸로 보인다. 무령왕 시절의 백제군이 개성을 비롯한 황해도 지역까지 치고 올라간 적 있다는 학설도 제기되고 있다.
이외에도 고고학적으로 백제가 마한 일대를 직할령으로 복속한 시점도 무령왕 대이다. 근초고왕 재위기부터 시작된 이 지리멸렬한 사업을 무령왕이 종결한 것이다.
왕권 강화
무령왕은 즉위 후 동성왕을 시해한 귀족들의 세력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양서》의 <백제전>에 따르면 22개로 운영되던 담로에 부여씨 왕족을 보내 통치하도록 하여 중앙집권적 질서하에서 정치 안정을 이루게 되었다. 부여씨 왕족을 지방 통치에 이용하여 토목공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동원할 수 있게 되었고, 왕족은 경제적인 기반을 확대시켜 나갔다. 최고 관등인 좌평제를 개편하여 신·구 세력을 통제했고, 직책이 없는 좌평이 등장했는데 이는 귀족 세력을 국왕 중심으로 서열화하고 국정을 책임있게 분담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다.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고 제방을 구축하며 농사를 권장하는 등 민생 안정에도 힘썼다. 포학무도하다고 할 정도로 전제 군주적인 모습을 보여온 선왕 동성왕과는 꽤 대조적인 모습이다.
외교
무령왕은 백제의 문화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무령왕은 512년과 521년에 남조의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외교 관계를 강화했다.[* 이 때 나제동맹 국인 신라 사신을 양나라에 같이 데려갔는데, 신라는 진흥왕 이전까지는 서해안에 항구가 없었으므로 중국 국가들과 직접 교류가 거의 없었고, 사신단에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백제 사신은 신라가 백제의 속국 중 하나라고 양나라 황제에게 거짓말을 했다. 한 마디로 이용해 먹은 것. 그리고 호남 동부 주도권을 두고 백제와 다투던 대가야 반파국까지 백제의 부용국이라고 양나라에 언플을 하기도 했다.]
521년 양무제(梁武帝)로부터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 百濟諸軍事 寧東大將軍)'의 작호를 제수받았다. 이는 으레 나오는 명목상의 책봉 기록이지만 은근히 의미가 큰 기록이기도 한데, 양나라는 앞서 502년에 고구려 문자명왕을 '거기대장군', 무령왕을 '정동대장군'으로 봉했다. 둘 중 고구려 쪽이 더 위계가 높았다. 그런데 520년 양나라는 고구려 안장왕을 '영동장군'에 책봉한 반면 이번에는 백제 무령왕을 그보다 더 높은 '영동대장군'으로 책봉했다. 양나라가 백제의 위계를 고구려보다 높게 잡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름뿐인 관작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젠 바다 건너 제3자인 양나라가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한때 위기에 몰렸던 백제가 무령왕 때쯤부터는 역전에 성공해 고구려의 위상을 뛰어넘고 있다고 본 것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무령왕보다 낮은 작호를 제수받은 안장왕이 백제의 우위를 뒤엎고 고구려의 전성기를 유지시킨 명군이라는 것. 무령왕의 아들인 성왕이 치세 초기에는 안장왕의 공격적인 대 백제 방면 확장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심지어 학계에서는 동성왕 ~ 무령왕 때 백제가 회복한 한강 유역을 다시 안장왕이 빼앗아갔다는 주장도 꽤 신빙성있게 보고 있다.]
즉위 6년, 왜에 이미 보내진 마나군이 왕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아군[* 순타태자와 동일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의 후손인 타카노노 니이가사가 헤이안 시대를 개막시킨 간무 덴노의 모후였다.]과 교체를 하여 부여씨 왕족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여 정치를 안정시켰다. 또한 선대왕인 아신왕처럼 유교를 가르치는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513)와 고안무(高安茂)를 일본에 보내(516) 백제의 선진 문화를 왜에 전해주기도 했다. 민생의 안정에도 힘써 제방을 수축하고 유랑민들을 구제해 농사를 짓게 했다.
이렇게 양나라와 왜 등 동아시아 국가들과 외교관계가 활발했다는 걸 보여주는 게 무령왕릉 & 《양직공도》이다. 동아시아사와 한국사에 잘 나온다.
사망
웅진을 수도로 자리한 군주들 중 유일하게 천수를 누린 왕이다. 웅진 시대의 백제 왕들은 22대 문주왕(암살), 23대 삼근왕(암살 유력), 24대 동성왕(암살), 그리고 25대 무령왕[* 전임 왕의 암살자를 색출하는 데에 최초로 손쉽게 성공했다!]과 26대 성왕[* 성왕은 재위 중반에 웅진성에서 사비성으로 천도했으며, 신라와의 전쟁터에서 전사하고 말았다.]이 있다.
사실 그 앞으로도 21대 개로왕(전사), 20대 비유왕(암살, 전사 유력), 19대 구이신왕(암살 유력) 등... 천수를 누린 백제 왕으로는 아주 오랜만이었다.
무령왕릉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왕이었던 무령왕이 지금과 같이 유명해진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무령왕의 능 때문이다. 무령왕릉은 백제 무덤 중 유일하게 주인이 확인된 왕릉이며, 도굴되지 않고 고스란히 출토된 금제 관장식 등의 호화로운 유물 덕에 급속히 유명해졌다. [* 1971년 다른 무덤에선 오랜 세월 이어진 도굴을 전혀 안 당하고 발굴되었다! 무덤이 통째로 묻혔다가 배수로 공사 중에 발굴된 게 이유인 듯. 다만 졸속 발굴이라는 오명이 붙기도 했다.]
무령왕릉에서 무령왕의 부인 역시 합장되어 발견되었다. 무령왕의 사망 3년 뒤인 526년 12월 사망했다고 한다. 무령왕릉 지석에서 '백제국왕대비(百濟國王大妃)'로 표현했는데 아쉽게도 성과 이름이 적혀있지 않아 알 수 없다.
무덤 양식은 양나라, 관은 왜의 금송으로 제작되었다. (한국사, 동아시아사에 《양직공도》랑 같이 잘 나오는 유적이다.)
논란
기록이 상대적으로 많이 남았지만 재위 초기의 기록과 수명에 부정합이 존재한다.
생년
무령왕의 사망에 대해서는 묘지석, 《일본서기》, 《삼국사기》가 모두 서기 523년 5월로 일치한다. 묘지석에 따르면 62세로 죽었고, 《일본서기》에 따르면 461년 6월 1일에 태어났다. 즉 461년에 태어나 523년에 62세로 죽었으므로, 이 나이는 연 나이로 계산된 것이 된다.
옛날 사람이니 당연히 세는나이를 썼을 것이리라고 생각하는 측에서는, 생년을 461년이 아니라 462년(=523 - (62 - 1))으로 설정하고, 더 나아가 63세 생일이 되기 전에 죽었으므로 62세로 처리했다고 보기도 한다.
초기 기록
《삼국사기》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동성왕이 501년 12월 피습으로 인해 승하하고, 502년 1월에 무령왕이 백가를 죽이는 상황이 나온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 <연표>에서는 501년 동성왕이 사망하고 무령왕이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501년 12월 동성왕이 세상을 떠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냥터에서 백가가 보낸 자객에게 습격당했던 시기보다 좀 지나서인데 아무래도 중태에 빠졌다가 얼마 뒤 승하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가 유월 칭원법[* 한 왕이 죽으면 그 다음 달부터 차기 왕의 치세로 세는 방식. 예컨대 선왕이 11월에 죽으면 그해 12월부터 원년이고, 선왕이 12월에 죽으면 이듬해 1월부터 원년이다.]을 따른다고는 하나 이는 고구려에만 해당한다. 장수왕은 491년 12월에 승하했기 때문에 문자명왕 기록의 시작(원년)은 492년 1월이다. 그러나 백제 구이신왕은 427년 12월에 죽었는데 차기 왕인 비유왕의 원년이 427년이다. 신라의 경우도 다르지 않으며, 태종 무열왕이 661년 6월에 죽었으나 다음 왕인 문무왕의 기록은 661년 6월부터 원년으로 하여 시작한다. 동성왕이 501년 12월에 죽었기 때문에 《삼국사기》에 무령왕의 원년이 501년으로 기록된 것이다. 다만 비유왕은 원년의 기록이 없고, 2년(428년)부터 기록이 시작되는 반면, 무령왕은 분명 원년이 501년 12월인데도 불구하고 501년 1월부터 시작되는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백가의 처형은 무령왕 2년(502)의 사건인데, 모종의 원인으로 인해 기록에서 연도가 빠졌고, 후대에 이것이 2년이 아닌 원년으로 잘못 기록된 셈이다. 원년이 501년인 것은 변함이 없다.
《삼국사기》의 무령왕 기록은 (기록된) 순서대로 원년 1월, 원년 11월, 2년 봄(1~3월), 2년 11월, 3년 9월, 3년 겨울(10~12월)이다. 백가의 처형이 원래 2년 1월인데 이것이 1년 1월로 잘못 기록되었음을 밝혔다. 그러니 앞서 적은 4개의 기사를 1년씩 미루어서 무령왕 2, 3, 4년에 일어났다고 보면 참 편할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결정적인 오류를 발생시키니, 바로 대(對)고구려 전쟁 기록의 연도 문제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무령왕 원년 11월에 달솔 우영(優永)과 군사 5,000명을 보내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을 습격했다고 되어 있다. <고구려본기>에도 이 사건이 똑같이 나오는데, 그 시기가 문자명왕 12년(503년!)이다. 또 무령왕 2년 11월에 고구려를 침공하는데, <고구려본기>에는 동일한 사건이 문자명왕 11년(502년!)조에 기록되어 있다. 무령왕 초기의 기록을 1년씩 뒤로 미룬다면, 동일한 두 기사가 서로 엇갈리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 오류를 해결하는 방법은 대단히 간단하며 단순하다. 우선, 무령왕 원년이 501년이며 백가의 토벌이 무령왕 2년에 있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이제 무령왕 원년 11월로 기록된 수곡성 침공을 무령왕 3년 11월로 수정해 보자. 놀랍게도 어떠한 모순도 발생하지 않는다. 《삼국사기》에 기사들이 기록된 순서를 기준으로 서술하면, 수곡성 침공 기사의 순서__만__ 변경하면 6개 기사들의 순서를 올바르게 정립할 수 있다. 원본의 "무령왕이 즉위했다. 정월에 (···). 11월에 (···). 2년 봄에 (···). 11월에 (···). 3년 9월에 (···). 겨울에 (···)."라는 순서가, "무령왕이 즉위했다. 2년 정월에 (···). --11월에 (···).-- (--2년--) 봄에 (···). 11월에 (···). 3년 9월에 (···). 11월에 (···). 겨울에 (···)."로 정정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논한 내용을 정리하면 아래 표와 같다. 괄호 안의 숫자는 사건이 발생한 달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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