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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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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75(개로왕 21). 백제 제21대 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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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위 455∼475. 이름은 '여경(餘慶)'또는 ‘경사(慶司)’, 또는 ‘근개루왕’이라고도 한다. [[비유왕]](毗有王)의 맏아들로서 왕위를 계승했고, 제22대왕인 [[문주왕]]의 아버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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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75년에 백제는 그 발상지이자 중심부인 한강유역 일대를 고구려에 빼앗기고 개로왕은 포로가 되어 살해당했다. 이러한 참담한 패배에 대해 ≪삼국사기≫ 개로왕 21년조에서는 고구려 장수왕이 간첩으로 파견한 승려 도림(道琳)의 계략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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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림은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하는 점을 이용해 신임을 얻은 뒤, 개로왕이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할 생각을 못하게 하였다. 화려한 궁궐의 축조 등 대대적인 토목역사를 일으키게 함으로써 국력을 피폐화시켰다. 이 기록은 당시의 상황을 생동감 있게 전해주는 반면, 도림의 계략만을 중요시해 단순화되었으므로 보충설명이 필요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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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기록의 설명과는 달리 개로왕은 475년 이전부터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했고 469년에는 고구려의 남부지역을 선제공격하였다. 한편 고구려와 사이에 있는 요충지 청목령(靑木嶺 : 현재의 개성 부근으로 추정됨)에 대책(大柵)을 설치, 방어태세를 보강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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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72년에는 북위(北魏)에 구원병 파견을 요청하는 국서를 보내, 북위가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협공해야 하는 이유와 성공 가능성을 보고하며 설득하였다. 이는 북위의 세력을 이용해 고구려의 남침세력을 분산, 약화시키려는 개로왕의 외교적인 시도였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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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시 남조의 송과 대치하고 있던 북위로서는 요동까지 아우르며 동북아시아의 대 제국으로 발전해 나가는 고구려를 적대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개로왕은 전대부터 결성된 제라동맹(濟羅同盟)의 유지·강화에도 힘썼다. 475년에 개로왕이 왕자(뒤의 문주왕)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자 신라가 군대 1만 명을 파견해 준 것은 동맹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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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로왕이 이처럼 고구려의 남침 위협에 고심했음에도 고구려의 침공을 받자 백제는 힘없이 무너졌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를 공격한 고구려의 병력은 3만이었는데, 백제는 불과 7일 만에 방어전선이 무너졌고 도성이 공격당해 개로왕은 탈출하는 도중 잡혀 참수되고 말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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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구려의 3만 병력에 백제가 이토록 무참히 짓밟힌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개로왕의 내정의 실패였다. 개로왕은 왕권 강화를 시도해 왕족 중심의 집권체제를 만들었다. 개로왕이 458년에 송나라에 관작제수를 요청한 11명 가운데에는 그의 두 아들 여도(餘都 : 뒤의 文周王)와 여곤(餘昆 : 文周王의 아우이자 東城王의 아버지인 昆支로 추정됨)을 비롯해 8명이 왕족인 여씨(餘氏)였고, 당시 백제의 주요 세력이었던 해씨(解氏)나 진씨(眞氏)는 없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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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한 문주왕은 왕자로서 백제의 최고 관직인 상좌평(上佐平)을 지냈다. 이러한 사실들은 개로왕이 구래의 대 귀족들을 배제시키면서 왕족 중심의 집권체제를 추구했음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왕권강화를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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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로왕이 왕궁을 장려하게 짓는 등 큰 토목공사를 일으킨 것도 왕의 권위를 높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구래의 대 귀족세력들이 그대로 존속하는 가운데 그들을 배제시킨 채 왕족 중심의 집권체제를 추구한 것은 백제 내부의 정치적 결속을 와해시키고, 백제 왕실의 영도력 자체도 약화시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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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로왕은 백제사람으로서 고구려에 망명해 고구려군의 선봉장이 된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尒萬年)에게 잡혀 살해되었다. 그리고 개로왕이 죽고 문주왕이 즉위하자 구래의 대 귀족인 해구(解仇)의 반란이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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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는 개로왕의 왕족 중심 정권 운영이 백제 지배층 내에 왕실에 대한 적대세력을 키워냈고, 그로 인해 지배층의 내분이 심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무리한 왕궁 건축 등을 강행해 하층민을 위시한 국민들은 왕실에 대한 원망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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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사기≫ 도미전(都彌傳)의 개루왕은 고구려영토와의 위치로 보아 근개루왕, 즉 개로왕으로 보이는데, 이 전설에서 왕은 잔인하게 하층민의 아내를 빼앗으려 한 폭군으로 묘사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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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개로왕이 자신의 과오를 후회하며, “백성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이 있어도 누가 나를 위해 기꺼이 싸우려 하겠는가.”하고 탄식했다는 이야기도 개로왕이 널리 국민들의 신망을 잃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장지는 미상이다. | ||
2022년 8월 30일 (화) 07:54 판
蓋鹵王
∼475(개로왕 21). 백제 제21대 왕.
재위 455∼475. 이름은 '여경(餘慶)'또는 ‘경사(慶司)’, 또는 ‘근개루왕’이라고도 한다. 비유왕(毗有王)의 맏아들로서 왕위를 계승했고, 제22대왕인 문주왕의 아버지이다.
475년에 백제는 그 발상지이자 중심부인 한강유역 일대를 고구려에 빼앗기고 개로왕은 포로가 되어 살해당했다. 이러한 참담한 패배에 대해 ≪삼국사기≫ 개로왕 21년조에서는 고구려 장수왕이 간첩으로 파견한 승려 도림(道琳)의 계략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도림은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하는 점을 이용해 신임을 얻은 뒤, 개로왕이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할 생각을 못하게 하였다. 화려한 궁궐의 축조 등 대대적인 토목역사를 일으키게 함으로써 국력을 피폐화시켰다. 이 기록은 당시의 상황을 생동감 있게 전해주는 반면, 도림의 계략만을 중요시해 단순화되었으므로 보충설명이 필요하다.
이 기록의 설명과는 달리 개로왕은 475년 이전부터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했고 469년에는 고구려의 남부지역을 선제공격하였다. 한편 고구려와 사이에 있는 요충지 청목령(靑木嶺 : 현재의 개성 부근으로 추정됨)에 대책(大柵)을 설치, 방어태세를 보강하였다.
472년에는 북위(北魏)에 구원병 파견을 요청하는 국서를 보내, 북위가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협공해야 하는 이유와 성공 가능성을 보고하며 설득하였다. 이는 북위의 세력을 이용해 고구려의 남침세력을 분산, 약화시키려는 개로왕의 외교적인 시도였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
당시 남조의 송과 대치하고 있던 북위로서는 요동까지 아우르며 동북아시아의 대 제국으로 발전해 나가는 고구려를 적대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개로왕은 전대부터 결성된 제라동맹(濟羅同盟)의 유지·강화에도 힘썼다. 475년에 개로왕이 왕자(뒤의 문주왕)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자 신라가 군대 1만 명을 파견해 준 것은 동맹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개로왕이 이처럼 고구려의 남침 위협에 고심했음에도 고구려의 침공을 받자 백제는 힘없이 무너졌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를 공격한 고구려의 병력은 3만이었는데, 백제는 불과 7일 만에 방어전선이 무너졌고 도성이 공격당해 개로왕은 탈출하는 도중 잡혀 참수되고 말았다.
고구려의 3만 병력에 백제가 이토록 무참히 짓밟힌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개로왕의 내정의 실패였다. 개로왕은 왕권 강화를 시도해 왕족 중심의 집권체제를 만들었다. 개로왕이 458년에 송나라에 관작제수를 요청한 11명 가운데에는 그의 두 아들 여도(餘都 : 뒤의 文周王)와 여곤(餘昆 : 文周王의 아우이자 東城王의 아버지인 昆支로 추정됨)을 비롯해 8명이 왕족인 여씨(餘氏)였고, 당시 백제의 주요 세력이었던 해씨(解氏)나 진씨(眞氏)는 없었다.
또한 문주왕은 왕자로서 백제의 최고 관직인 상좌평(上佐平)을 지냈다. 이러한 사실들은 개로왕이 구래의 대 귀족들을 배제시키면서 왕족 중심의 집권체제를 추구했음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왕권강화를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
개로왕이 왕궁을 장려하게 짓는 등 큰 토목공사를 일으킨 것도 왕의 권위를 높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구래의 대 귀족세력들이 그대로 존속하는 가운데 그들을 배제시킨 채 왕족 중심의 집권체제를 추구한 것은 백제 내부의 정치적 결속을 와해시키고, 백제 왕실의 영도력 자체도 약화시켰다.
개로왕은 백제사람으로서 고구려에 망명해 고구려군의 선봉장이 된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尒萬年)에게 잡혀 살해되었다. 그리고 개로왕이 죽고 문주왕이 즉위하자 구래의 대 귀족인 해구(解仇)의 반란이 있었다.
이는 개로왕의 왕족 중심 정권 운영이 백제 지배층 내에 왕실에 대한 적대세력을 키워냈고, 그로 인해 지배층의 내분이 심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무리한 왕궁 건축 등을 강행해 하층민을 위시한 국민들은 왕실에 대한 원망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삼국사기≫ 도미전(都彌傳)의 개루왕은 고구려영토와의 위치로 보아 근개루왕, 즉 개로왕으로 보이는데, 이 전설에서 왕은 잔인하게 하층민의 아내를 빼앗으려 한 폭군으로 묘사되어 있다.
도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개로왕이 자신의 과오를 후회하며, “백성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이 있어도 누가 나를 위해 기꺼이 싸우려 하겠는가.”하고 탄식했다는 이야기도 개로왕이 널리 국민들의 신망을 잃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장지는 미상이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