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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9일 (화) 10:17 판
정의
고려 중기의 문신.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대방(大方), 호는 송암(松庵), 시호는 절효(節孝)이다. 고려 고종(재위 1213∼1259) 때의 문신이자, 이름난 효자였다. 스무 살에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으며, 나라에서 식읍(食邑)을 하사 받고 장성을 본관으로 삼아 장성서씨 시조가 되었다.
모친이 병들자 문하시중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하였고, 향리에 초당(草堂)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유교적 생활습관과 덕목을 제시한 ‘거가십훈(居家十訓)’을 남겨 후세의 지침이 되게 하였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효자로 꼽히는 그의 효행 행적은 <고려사> 열전 효우편과 세종 때 편찬된 <삼강행실도>에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장성군 서삼면 모암리에 있었던 모암서원(慕岩書院, 현 칠현유적지)에 배향되었으며, 북일면 박산리에 서능정려비(徐稜旌閭碑,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62호)가 있다.
내용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서숭조,서희찬,서릉(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