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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공'''(徐恭, [[1101년]]<ref>《고려사》 상에는 사망 연도 당시의 나이가 기재되어 있지 않으나, 〈묘지명〉에는 7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되어 있으므로, 이에 따른다.</ref> ~ [[1171년]] [[8월 23일]]([[음력 7월 20일]])<ref>《고려사》에는 이 날짜보다 하루 빨리 되어 있으나, 〈묘지명〉의 기록을 따른다.</ref><ref name=b>〈서공 묘지명〉</ref>)은 [[고려]]의 문신이다. 본관은 [[이천 서씨|이천]]이며, [[서희]]의 현손<ref>〈묘지명〉에는 4대손으로 되어 있다.</ref>이다. | '''서공'''(徐恭, [[1101년]]<ref>《고려사》 상에는 사망 연도 당시의 나이가 기재되어 있지 않으나, 〈묘지명〉에는 7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되어 있으므로, 이에 따른다.</ref> ~ [[1171년]] [[8월 23일]]([[음력 7월 20일]])<ref>《고려사》에는 이 날짜보다 하루 빨리 되어 있으나, 〈묘지명〉의 기록을 따른다.</ref><ref name=b>〈서공 묘지명〉</ref>)은 [[고려]]의 문신이다. 본관은 [[이천 서씨|이천]]이며, [[서희]]의 현손<ref>〈묘지명〉에는 4대손으로 되어 있다.</ref>이다. | ||
− |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 + |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고려)|서정]](徐靖),우복야 [[서균(고려)|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고려)|서린]](徐嶙), 평장사 [[서공(고려)|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고려)|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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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고려)|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고려)|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
2022년 2월 7일 (월) 17:26 판
서공(徐恭, 1101년[1] ~ 1171년 8월 23일(음력 7월 20일)[2][3])은 고려의 문신이다. 본관은 이천이며, 서희의 현손[4]이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생애
1145년(인종 23년) 합문통사사인으로서 금나라 동경에 사신으로 다녀왔다.[5] 고려 의종 때 음서로 경령전판관이 되었다.[6]
1163년(의종 17년) 추밀원부사를 거쳐[7] 1164년(의종 18년)에는 병부상서 동지추밀원사가 되었다.[8]
1165년(의종 19년) 지추밀원사를 거쳐 판삼사사에 올랐다.[9]
왕을 호종해 서경에 갔을 때, 왕이 개경과 서경의 문관·무관 관료들에게 활을 쏘게 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큰 촛불을 과녁 위에 꽂고 쏘게 하였는데, 서경 사람들은 많이 맞혔으나 개경에서 따라온 신하들 중에는 맞히는 사람이 없었다. 왕의 기분이 자못 좋지 않은 터에 서공이 첫 번째 화살로 촛불을 맞히고 두 번째 화살로 과녁을 맞히자, 왕은 크게 기뻐하며 비단을 하사하였다.[6]
담력과 책략이 뛰어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여섯 번이나 양계병마사로 부임하니 사졸들이 잘 따랐다.[6]
1171년(명종 원년) 8월 23일(음력 7월 20일)에 죽었다.[3]
가족
- 증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전기 자료
- 《고려사》 권94, 〈열전〉7, 서희 부 서공
- 〈서공 묘지명〉(김용선 엮음, 《고려묘지명 집성》에 수록됨)
각주
틀:각주- ↑ 《고려사》 상에는 사망 연도 당시의 나이가 기재되어 있지 않으나, 〈묘지명〉에는 7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되어 있으므로, 이에 따른다.
- ↑ 《고려사》에는 이 날짜보다 하루 빨리 되어 있으나, 〈묘지명〉의 기록을 따른다.
- ↑ 3.0 3.1 〈서공 묘지명〉
- ↑ 〈묘지명〉에는 4대손으로 되어 있다.
- ↑ 《고려사》 권17, 〈세가〉17, 인종 23년(1145년) 3월 5일(경술)
- ↑ 6.0 6.1 6.2 《고려사》 권94, 〈열전〉7, 서희 부 서공
- ↑ 《고려사》 권18, 〈세가〉18, 의종 17년(1163년) 12월 30일(병술)
- ↑ 《고려사》 권18, 〈세가〉18, 의종 18년(1164년) 12월 22일(임인)
- ↑ 《고려사》 권18, 〈세가〉18, 의종 19년(1165년) 5월 13일(신유); 12월 30일(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