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기록화로 살펴보는 고려의 항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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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이용환-귀주대첩]] | * 작품: [[이용환-귀주대첩]] |
2017년 12월 27일 (수) 00:25 판
목차
개요
민족기록화는 한반도의 주요 역사적 사건들을 세밀한 필치로 담아내어, 우리 역사와 문화의 현장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 그 중에는 고려와 거란족, 여진족, 원나라(몽골) 등 인접 국가들과의 항쟁을 다룬 다수의 민족기록화 작품들이 존재한다. 이 작품들을 통해 300여년에 걸친 고려 항쟁의 역사를 살펴보고, 그 경과와 의의를 엿볼 수 있다.
내용
강동6주와 동북9성: 『이용환-귀주대첩』과 『안재후-여진정벌』
- 강동6주는 청천강 이북에서 압록강 입구까지의 강동지방에 설치된 행정구역이다. 강동6주 중 하나인 귀주는 예로부터 전략적 기능이 뛰어난 요충지였다. 993년(고려 성종 12) 10월 거란의 제1차 침입 후 체결된 강화조약에서 서희(徐熙)의 외교적인 수완으로 고려의 점유를 인정받았으나, 1018년 12월 이 지역의 반환을 둘러싸고 거란의 제3차 침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1]
이때 고려는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8천의 대군으로 맞서 싸우게 하였다. 여러 차례 패배한 거란의 병력 손실이 커지자 거란 장수 소배압은 정벌을 포기하고 회군하여 가다가 청천강 일대에서 강감찬의 공격을 받아 대패했으며, 특히 귀주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마판관 김종현(金宗鉉)의 공격을 받아 전멸하다시피 하였다. 이때 살아남은 병력이 수천 명에 불과하였을 정도로 거란의 패배는 심각하였다.[2]
『고려사』에 “거란의 패함이 아직 이와 같이 심함이 없었다.”라고 전하고 있듯이, 당시 귀주대첩의 성과는 우리나라 전쟁 역사상 길이 빛나는 것이었다.
귀주대첩이 지닌 가장 큰 의의는 거란의 성종으로 하여금 무력으로 고려를 굴복시키려는 야망을 버리게 한 동시에, 거란이 끈질기게 요구하여 왔던 국왕의 친조(親朝)와 강동6주의 반환을 다시는 요구하지 않게 되었다는 데에 있다.[3] - 여진족은 고려의 동북면 지역을 잠식하고 변경에 머물러 끊임없이 고려의 위협이 되었다.[4] 이에 고려의 문신 윤관(尹瓘)은 여진족을 제어하기 위해 국왕 예종에게 건의하여 신기군(神騎軍), 신보군(神步軍), 항마군(降魔軍)으로 편성된 별무반(別武班)을 편성하여 정예 군사를 양성하였다.
마침내 1107년(고려 예종 2) 12월 1일 윤관의 지휘 하에 고려 17만 대군이 출병하여 여진정벌에 나섰다. 그 결과 적 5천을 죽이고 5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350개 부락을 수복하고 동북9성을 설치하는 성과를 올렸다.
원나라와의 대립: 『김서봉-삼별초의 대몽항전』,『문학진-쌍성수복』,『김태-동령부 우라산성의 공함』
②『문학진-쌍성수복』
③ 『김태-동령부 우라산성의 공함』
- 삼별초는 원나라의 침입 전에는 치안유지, 수도경비, 경호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는 일종의 특수부대였다. 원나라의 침입 후 도성(都城)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점차 그 활동량과 능력에 있어 정부 정규군을 능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원나라와 강화(講和)가 성립되면서 고려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자[5] 이에 반발하여 1270년(원종 11)에 반란을 일으켰다. 독자적으로 정부를 세우고 정부와 원에 대항하여 진도(珍島)를 본거지로 삼아 3년 동안 싸우다가, 1273년(고려 원종 14) 고려·몽골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섬멸 당하였다.[6] 삼별초의 진압 후 원나라는 탐라(耽羅 : 지금의 제주도)에 총관부를 설치하여 감시를 강화하였다.
- 1258년(고려 고종 45년) 11월, 원나라가 함경도 화주(和州:영흥 永興) 이북 땅에 침입하였다. 원나라는 이 지역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자국 장수들로 하여금 대를 이어 다스리도록 하였다.[7]
1356년(공민왕 5년)에 고려는 대대적인 반원운동(反元運動)을 전개하면서 유인우(柳仁雨)를 동북면병마사로, 전대호군(前大護軍) 공천보(貢天甫), 전종부령(前宗簿令) 김원봉(金元鳳)을 부사로 삼아 이 지역을 수복하도록 하였다.[8]
이때 천호 이자춘(李子春, 조선 환조)의 협력으로 쌍성총관부를 탈환하여 폐지하고 화주목(和州牧)을 설치했다. 이후 이자춘은 동북면 병마사에 임명되어 이 지역에서 세력을 잡았고, 이것은 이자춘의 아들인 이성계가 뒷날 조선왕조를 세울 수 있는 세력기반이 되었다.[9] -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에 이어 1370년(공민왕 19년) 1월, 이성계 휘하의 고려군이 동녕부 우라산성(于羅山城, 현재의 오녀산성)을 함락시켰다. 원나라의 평장사(平章事) 기(奇)새인티무르는 그의 부친 기철(奇轍)이 고려에서 참형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원나라 유민을 모아 동녕부에 웅거하여 고려의 북변을 침입하였다. 이에 이성계는 1370년 1월에 동녕부의 동지(同知) 이(李)오로첩목아가 지키는 우라산성을 포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다.[10]
왜구 섬멸: 『박창돈-최영장군의 홍산전투』
- 1376년 7월 왜구가 부여에 침입하여 공주를 함락하고 연산현의 개태사로 쳐들어왔다. 이에 맞써 싸우던 양광도 원수 박인계가 전사하자 최영이 출정을 자청하였다. 우왕이 육십인 그의 나이를 들어 만류하였으나 최영은 출정을 거듭 요청해 허락을 받았다.
최영이 양광도도순문사 최공철(崔公哲), 조전원수 강영(康永), 병마사 박수년(朴壽年) 등과 함께 홍산에 이르러 몸소 군사를 이끌고 진두에 서서 왜구를 공격하니 왜구는 무수한 사상자를 내고 패퇴하였다.[11]
이 싸움은 나세, 최무선 등의 진포대첩, 이성계의 황산대첩, 정지의 남해대첩과 함께 고려말 왜구토벌에서 가장 빛나는 전적 중 하나이다.
지식 관계망
중심요소
- 작품: 이용환-귀주대첩
- 작품: 안재후-여진정벌
- 작품: 김서봉-삼별초의 대몽항전
- 작품: 문학진-쌍성수복
- 작품: 김태-동령부 우라산성의 공함
- 작품: 박창돈-최영장군의 홍산전투]
문맥요소
- Actor-단체: 삼별초
- Actor-단체: 탐라총관부
- Actor-단체: 쌍성총관부
- Actor-단체: 동녕부
- Actor-인물: 서희
- Actor-인물: 강감찬
- Actor-인물: 조선 태조
- Actor-인물: 고려 공민왕
- Actor-인물: 최영
- Event-사건: 귀주대첩
- Event-사건: 여진정벌
- Event-사건: 삼별초항쟁
- Event-사건: 동녕부정벌
- Event-사건: 고려말 왜구의 침입
- Event-사건: 홍산전투
- Heritage-문화유산: 오녀산성
- Object-문헌: 고려사
- Place-장소: 청천강
- Concept-개념: 강동6주
- Concept-개념: 별무반
- Concept-개념: 동북9성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민족기록화로 살펴보는 고려의 항쟁 | 이용환-귀주대첩 |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 A dcterms:hasPart B |
민족기록화로 살펴보는 고려의 항쟁 | 안재후-여진정벌 |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 A dcterms:hasPart B |
민족기록화로 살펴보는 고려의 항쟁 | 김서봉-삼별초의 대몽항전 |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 A dcterms:hasPart B |
민족기록화로 살펴보는 고려의 항쟁 | 문학진-쌍성수복 |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 A dcterms:hasPart B |
민족기록화로 살펴보는 고려의 항쟁 | 김태-동령부 우라산성의 공함 |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 A dcterms:hasPart B |
민족기록화로 살펴보는 고려의 항쟁 | 박창돈-최영장군의 홍산전투 |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 A dcterms:hasPart B |
주석
- ↑ 이용범, "귀주대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귀주대첩",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 이용범, "귀주대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남일, "여진정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삼별초",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 민병하, "삼별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3년 3월 13일. - ↑ 한국사사전편찬회,『한국고중세사사전』, 가람기획, 2007. 온라인 참조: "쌍성총관부", 한국고중세사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김용덕, "쌍성총관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한국사사전편찬회,『한국고중세사사전』, 가람기획, 2007. 온라인 참조: "쌍성총관부", 한국고중세사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동녕부정벌",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 "최영이 홍산전투에서 왜적을 물리치다",
『한국사데이타베이스』, 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 자원
- 이용범, "귀주대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귀주대첩",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김남일, "여진정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삼별초",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민병하, "삼별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3년 3월 13일. - 한국사사전편찬회,『한국고중세사사전』, 가람기획, 2007. 온라인 참조: "쌍성총관부", 한국고중세사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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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동녕부정벌",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최영이 홍산전투에서 왜적을 물리치다",
『한국사데이타베이스』, online 국사편찬위원회.
- 이용범, "귀주대첩",
유용한 정보
- 송기호, "귀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민덕식, "환인오녀산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7년 6월 5일. - "기록화 : 여진정벌",
『e뮤지엄』online , 국립중앙박물관. 온라인 참조: "기록화 : 여진정벌", e뮤지엄,『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차용걸, "남도석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삼별초항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손홍렬, "홍산대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