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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1년(효종 2) | + | 1651년(효종 2) 5월에 [[왕세자]] 책봉이 끝나고 [[왕세자]]의 [[가례(嘉禮)]] 준비가 시작되었다. [[현종]]이 [[왕세자]] 시절 [[혼례]]를 위해 1651년 7월 [[가례도감]]이 설치되었다. 세 번에 걸쳐 신부를 간택하는데 7월 19일 최종 간택에서 영의정 [[김육|김육(金堉)]]의 손녀이자 [[김우명|김우명(金佑明)]]의 딸이 낙점되었다. 당시 왕세자([[현종]])는 11세이고, 왕세자비([[명성왕후]])는 10세였다. 9월 28일 신부의 집에 청혼서를 보내는 [[납채]], 10월 17일 신부집에 예물을 보내는 [[납폐]], 10월 27일 [[가례]]의 일자를 알리는 [[고기]], 11월 21일 신부를 [[왕세자빈]]으로 책봉하는 [[책비|책빈]]은 [[창덕궁 인정전]]에서 거행되었다. 12월 22일 신부의 집에서 신부를 데리고 오는 [[친영]]은 [[어의궁]]에서 시행했는데, [[왕세자]]가 친영을 위해 별궁으로 가기 전에 [[효종]]은 [[왕세자]]를 훈계하는 '초계례(醮戒禮)'를 먼저 치렀다. [[왕세자빈]]과 함께 술과 음식을 나누는 [[동뢰]]는 [[창덕궁 인정전]]에서 거행하였다. 다음날 [[왕세자빈]]은 [[대비]]와 [[왕대비]]에게 [[조현례|조현례(朝見禮)]]를 행하였다. 이 책에는 [[가례]]에 쓰인 각종 기물에 대한 도설과 함께 12면의 [[친영]][[반차도]]가 그려져 있는데, 앞선 [[가례]]보다 [[친영]]에 참여하는 인원이 많아서 [[반차도]]의 양이 증가한 점이 특징이다.<ref>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 130~132쪽.</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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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5일 (금) 22:00 기준 최신판
현종명성왕후가례도감의궤 (顯宗明聖王后嘉禮都監儀軌) |
|
대표명칭 | 현종명성왕후가례도감의궤 |
---|---|
한자표기 | 顯宗明聖王后嘉禮都監儀軌 |
주제 | 가례(嘉禮) |
작성주체 | 가례도감(嘉禮都監) |
의례담당자 | 이시백(李時白) |
작성지역 | 한성부 |
작성시기 | 1652년(효종 3년) |
소장처(원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어람용) 규장각한국학연구원(오대산) |
판본 | 필사본 |
표기문자 | 한자, 이두 |
수량 | 어람용: 총 1책 171장 오대산: 총 1책 124장 |
크기 | 어람용: 47.4×32.8 오대산: 45.5×35.5 |
도설 | 12면(채색) |
반차도 | 어람용: 16면(채색) 총 길이: 약 528㎝ 오대산: 12면(채색) 총 길이: 약 420㎝ |
목차
정의
1651년(조선 효종 2) 왕세자 현종과 왕세자비 명성왕후의 혼례를 치르는 가례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내용
1651년(효종 2) 5월에 왕세자 책봉이 끝나고 왕세자의 가례(嘉禮) 준비가 시작되었다. 현종이 왕세자 시절 혼례를 위해 1651년 7월 가례도감이 설치되었다. 세 번에 걸쳐 신부를 간택하는데 7월 19일 최종 간택에서 영의정 김육(金堉)의 손녀이자 김우명(金佑明)의 딸이 낙점되었다. 당시 왕세자(현종)는 11세이고, 왕세자비(명성왕후)는 10세였다. 9월 28일 신부의 집에 청혼서를 보내는 납채, 10월 17일 신부집에 예물을 보내는 납폐, 10월 27일 가례의 일자를 알리는 고기, 11월 21일 신부를 왕세자빈으로 책봉하는 책빈은 창덕궁 인정전에서 거행되었다. 12월 22일 신부의 집에서 신부를 데리고 오는 친영은 어의궁에서 시행했는데, 왕세자가 친영을 위해 별궁으로 가기 전에 효종은 왕세자를 훈계하는 '초계례(醮戒禮)'를 먼저 치렀다. 왕세자빈과 함께 술과 음식을 나누는 동뢰는 창덕궁 인정전에서 거행하였다. 다음날 왕세자빈은 대비와 왕대비에게 조현례(朝見禮)를 행하였다. 이 책에는 가례에 쓰인 각종 기물에 대한 도설과 함께 12면의 친영반차도가 그려져 있는데, 앞선 가례보다 친영에 참여하는 인원이 많아서 반차도의 양이 증가한 점이 특징이다.[1]
목록
계사(啓辭), 첩정(牒呈), 감결(甘結), 의주(儀註), 서계상전(書啓賞典), 일방(一房), 이방(二房), 삼방(三房)
해제
김혁, "현종명성왕후가례도감의궤", 의궤 검색,
김영인, "현종명성왕후가례도감의궤", 의궤 검색,
판본
국립중앙박물관: 어람용(2525)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오대산본(奎 13107), 강화부본(奎 13072)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적상산성본(K2-268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현종명성왕후가례도감의궤의궤 | 현종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현종명성왕후가례도감의궤의궤 | 명성왕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현종명성왕후가례도감의궤의궤 | 왕세자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현종명성왕후가례도감의궤의궤 | 왕세자빈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현종명성왕후가례도감의궤의궤 | 왕세자의 대례복 | A는 B를 기록하였다 | A ekc:mentions B |
현종명성왕후가례도감의궤의궤 | 왕세자빈의 조복 | A는 B를 기록하였다 | A ekc:mentions B |
현종명성왕후가례도감의궤의궤 | 왕세자빈의 대례복 | A는 B를 기록하였다 | A ekc:mentions B |
현종명성왕후가례도감의궤의궤 | 왕세자빈의 소례복 | A는 B를 기록하였다 | A ekc:mentions B |
현종명성왕후가례도감의궤의궤 | 가례 | A는 B를 기록하였다 | A ekc:documents B |
현종명성왕후가례도감의궤의궤 | 국립중앙박물관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현종명성왕후가례도감의궤의궤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현종명성왕후가례도감의궤의궤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
1651년 | 현종과 명성왕후의 가례가 거행되었다 |
1651년 | 『현종명성왕후가례도감의궤』가 편찬되었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7.579468 | 126.991050 | 창덕궁 인정전에서 납채가 거행되었다. |
37.579468 | 126.991050 | 창덕궁 인정전에서 납폐가 거행되었다. |
37.579468 | 126.991050 | 창덕궁 인정전에서 고기가 거행되었다. |
37.579468 | 126.991050 | 창덕궁 인정전에서 책비가 거행되었다. |
37.574970 | 127.002027 | 어의궁에서 친영이 거행되었다. |
37.579468 | 126.991050 | 창덕궁 인정전에서 동뢰가 거행되었다. |
시각자료
가상현실
왕세자빈의 행렬
번호 | 이미지 | 대상 | 설명[2] | 복장/복식 |
---|---|---|---|---|
1 | 청양산(靑陽繖) | 청색 양산 | 청건(靑巾) 청의(靑衣) | |
2 | 함부(函負) | 함을 지고 가는 사람 | 청건(靑巾) 청의(靑衣) | |
2 | 기행나인(騎行内人) | 말을 탄 궁녀 | 전모(氈帽) 장삼(長衫) 치마(赤亇) 말군(襪裙) | |
2 | 보행나인(步行内人) | 걸어가는 궁녀 | 저고리(赤古里) 치마(赤亇) | |
2 | 상궁(尚宫) | 정5품 궁녀 | 너울[羅兀] 여립(女笠) 할의(割衣) 치마(赤亇) | |
3 | 향차비(香差備) | 향을 담당하는 관원 | 가리마 저고리(赤古里) 치마(赤亇) | |
4 | 별감(别監) | 호위를 맡았던 하급 군관 | 청건(靑巾) 청의(靑衣) | |
4 | 봉촉(捧燭) | 등불을 든 사람 | 청건(靑巾) 청의(靑衣) | |
4 | 소환귀유치(小宦歸遊赤) | 나이 어린 내시 | *홍건 *홍의 | |
5 | 나장(羅將) | 행렬의 호위를 담당하는 의금부나 병조의 하급 군졸 | 조건(皁巾) 반비의 협수주의(周衣) | |
6 | 별감(别監) | 호위를 맡았던 하급 군관 | 청건(靑巾) 청의(靑衣) | |
7 | 연(輦)-명성왕후(明聖王后) | 왕실에서 사용하는 지붕이 있는 가마로, 명성왕후(明聖王后)가 타고 있다. | 왕비의 소례복 | |
7 | 연배군(輦陪軍) | 왕비의 가마를 메는 군사 | 청건(靑巾) 청의(靑衣) | |
8 | 청선(靑扇) | 청색 부채 | 청건(靑巾) 청의(靑衣) | |
9 | 차지(次知) | 궁궐의 여러가지 일을 맡아 보던 사람 | *백관의 상복 | |
9 | 내관(內官) | 궁궐에서 음식이나 왕명 전달, 청소 등의 일을 맡아보던 환관 | *백관의 상복 | |
10 | 시녀(侍女) | 궁궐에서 왕비 등의 시중을 담당한 궁녀 | 너울[羅兀] 여립(女笠) 할의(割衣) 치마(赤亇) | |
10 | 의녀(醫女) | 내의원과 혜민서에 소속된 여자 의원 | 전모(氈帽) 저고리(赤古里) 치마(赤亇) | |
11 | 연배여군(輦陪餘軍) | 예비로 따라가는 왕비의 가마를 메는 군사 | 청건(靑巾) 청의(靑衣) | |
12 | 내의원관원(內醫院官員) | 왕의 약을 조제하던 의관 | 백관의 상복 | |
12 | 도사(都事) | 중앙과 지방 관청에서 사무를 담당한 관직 | 백관의 상복 |
도감 관원의 행렬
번호 | 이미지 | 대상 | 설명[3] | 복장/복식 |
---|---|---|---|---|
1 | 사령(使令) | 각 관청의 관원이 부리던 하인으로 호위와 시종을 담당함 | 백관의 융복 | |
1 | 서리(書吏) | 중앙 관아에 근무하던 하급 관원 | 백관의 융복 | |
2 | 도제조(都提調) | 육조의 속아문이나 군영 등에 두었던 정1품 관직으로, 현종-명성왕후 가례의 총책임자는 이시백(李時白)이었다. | 백관의 상복 | |
2 | 제조(提調) | 당상관 이상의 관원이 없는 관아에 겸직으로 임명하여 각 관아를 실질적으로 통솔하던 직책 | 백관의 상복 | |
2 | 도청(都廳) | 임시 관서인 도감의 관직 | 백관의 상복 | |
2 | 낭청(郎廳) | 각 관서에서 차출하여 겸임시켰던 당하관의 실무 담당 관직 | 백관의 상복 | |
2 | 감조관(監造官) | 여러가지 왕실행사의 실무를 감독하는 관원 | 백관의 상복 |
주석
- ↑ 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 130~132쪽.
- ↑ 제송희, "현종명성왕후가례도감의궤",
『외규장각 의궤』online , 국립중앙박물관. - ↑ 제송희, "현종명성왕후가례도감의궤",
『외규장각 의궤』online , 국립중앙박물관.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국혼정례』
- 『상방정례』
- 임민혁, 『조선 국왕 장가보내기』, 글항아리, 2017.
- 신병주, 『왕실의 혼례식 풍경』, 돌베개, 2013.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저, 『조선 왕실의 혼례 이야기』,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11.
- 이성미, 『가례도감의궤와 미술사』, 소와당, 2008.
- 김문식, 신병주 저, 『조선 왕실기록문화의 꽃 의궤』, 돌베개, 2005.
- 서울대학교 규장각, 『규장각소장 분류별의궤해설집』,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5.
- 서울대학교 규장각, 『규장각소장 의궤 해제집(3)』,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5.
- 신명호, 『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 돌베개, 2002.
- 신병주, 『66세의 영조 15세의 신부를 맞이하다』, 효형출판, 2001.
- 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