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종린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종린(宗璘)
BHST Monk1.png
대표명칭 종린
영문명칭 Jongrin
한자 宗璘
생몰년 1127년(인종 5)-1179년(명종 9)
시호 현오(玄悟)
중지(重之)
성씨 왕씨(王氏)
출신지 황해도 개성
승탑비 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휘는 종린(宗璘), 자는 중지(重之), 속성은 왕(王)씨로 고려 17대 국왕 인종(仁宗)의 아들이다.[1]

Quote-left.png

스님의 휘는 종린(宗璘)이요, 자는 중지(重之)며 속성은 왕씨(王氏)이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용인 서봉사 현오국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81쪽.


출가수행

13세에 승려가 되고자 하였다. 이에 의천(義天)의 유풍을 이을 사람이 없을까 염려하던 인종은 징엄(澄儼)에게 명하여 불일사(佛日寺)에서 1141년(인종 19) 수계(授戒)하게 하였다.[2]

Quote-left.png

나이 겨우 13살 때, 교(敎) (결락) 원(院)에서 간청하여 득도(得度)하고 법문(法門)이 되었다. 인묘(仁廟)께서 일찍부터 대각(大覺)의 여풍(餘風)을 계승 발전시킬 사람이 없을까 염려하다가, 이 때에 이르러 기꺼이 원명(圓明)국사(國師)에게 명하여 (결락) 시시(示時). 인자일(因自日) (결락) 희문자(喜文字). 15살 때, 불일사(佛日寺)에 나아가서 비구계(比丘戒)를 받았으니, 신유년(辛酉年) 12월이었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용인 서봉사 현오국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81쪽.


활동

인종이 항상 궁궐 내 도량으로 종린을 초빙하여 강론을 들었다. 이후 의종이 즉위하자 종린을 1146년에 수좌(首座)로 진급시켰다. 그 후 귀신사(歸信), 국태사(國泰寺), 중흥사(重興寺),부석사(浮石寺) 등에 주지하는 동안에도 검소하여 방장실 안에 10전(錢) 값어치의 저축물도 없었으므로 사부대중이 모두 존경하였다. 이에 임금이 승통(僧統)으로 추대하였다.[3]

Quote-left.png

인묘(仁廟)께서 항상 궁내(宮內)의 도량에 국사를 청하여 강론하였는데, 청중이 날마다 경청하고 조금도 게을리하는 이가 없었다. 황통(皇統)(결락) 의종(毅宗) 원년(元年) 병인(丙寅)에 비서(批書)를 내려 수좌(首座)로 진급(進級)하였다. 그 후 귀신(歸信)·국태(國泰)·중흥(重興)·부석등사(浮石等寺)를 차례로 주지(住持)하였다. 그러나 방장실(方丈室)은 소연(蕭然)하게 텅비어 십전(十錢) 값어치의 저축물도 없었다.항상 안여(晏如)하여 울창한 종실(宗室)이 되어 궤(軌) (결락) 스님께서는 일찍부터 도덕을 쌓아 일대(一代)에 걸쳐 사부대중(四部大衆)의 아망(雅望)의 대상이었으므로, 이에 배명(拜命)하여 승통(僧統)으로 추대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용인 서봉사 현오국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81-482쪽.


1171년(명종 1) 임금이 만수가사(滿繡袈裟) 1벌을 하사하고 그해 겨울 백고좌회(百高座會)를 열고 스님을 청해 강설을 듣은 후 임금이 좌세(佐世)라는 호를 내리고, 내전에 불러서 가사 한 벌을 하사하였다. 이때 충희(冲曦)를 출가시켰다.[4]

Quote-left.png

신묘년(辛卯年) 가을에 내전(內殿)으로 초빙하여 만수가사(滿繡袈裟) 한 바탕을 하사하였다. 그 해 겨울에 이르러 백고좌회(百高座會)를 열고, 스님으로 하여금 (결락) 월(月)에 조금 몸이 불편하므로 문인(門人)이 의사를 청하니, 스님께서 이르되 (결락) 지(之) (결락) 의(矣) (결락) 미(未) (결락) 의사를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용인 서봉사 현오국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82쪽.


입적

1179년 6월 29일 세속의 나이 53세, 승가의 나이 39세로 입적했다. 1179년 입적하자 개성 동남쪽 귀법사(歸法寺)에 시신을 임시로 모셨다가, 7월 17일 동림산 기슭에서 다비를 하고 11월에 장단현 대탁산에 안치했다. 1179년 명종이 현오국사(玄悟國師)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5]

Quote-left.png

6월 29일 병이 매우 심하여지므로 스님은 손으로 일몰처(日沒處)를 가리키면서 숙연히 입적(入寂)하였다. 안색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으며, 수족(手足)의 굴신(屈伸)도 생전(生前)과 같았다. (결락) 개경(開京) 동남쪽 귀법사(歸法寺)에 유해(遺骸)를 임시 안장(安葬)하였다. 임금께서 부음(訃音)을 들으시고, 크게 진도(震悼)하여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근신(近臣)으로 하여금 장사와 49재를 지내도록 하였다. 7월 16일 전중소감(殿中少監) 임충질(任忠質)과 상서호부원외랑(尙書戶部員外郞) 최광유(崔光裕)와 내시(內侍) 함경전녹사(含慶殿錄事) (결락) 등을 보내어 (결락) 국사로 책봉하되, 시호를 현오(玄悟)라고 추증(追贈)하였다. 그리고 이 달 17일 동림산(東林山) 기슭에서 다비(茶毗)하고, 이 해 11월에 장단현(長湍縣) 대탁산(大倬山)에 안조(安厝)하였다. 장사하는 날에 하늘로 뻗은 오색(五色) 기운이 무지개와 같아서 영구차를 따라 갔으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그 비상함을 경탄(驚歎)하였다. 자(自) (결락) 골(骨). 개(皆) (결락) 춘추는 53세이요, 법랍은 39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용인 서봉사 현오국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82-483쪽.


지식관계망

  • 현오국사 종린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 종린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 용인 서봉사지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고려 인종 종린 A는 B의 아버지이다 A ekc:hasSon B
징엄 종린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종린 개성 불일사 A는 B에서 계를 받았다 A edm:isRelatedTo B
종린 김제 귀신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종린 국태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종린 중흥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종린 부석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종린 개성 귀법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종린 충희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박정미, 홍영의, "종린", 『디지털용인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 김상현, "종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3. 박정미, 홍영의, "종린", 『디지털용인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4. 박정미, 홍영의, "종린", 『디지털용인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5. 박정미, 홍영의, "종린", 『디지털용인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김상현, "종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박정미, 홍영의, "종린", 『디지털용인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서봉사현오국사탑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 이지관, 「용인 서봉사 현오국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70-4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