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초상화관 개관

신숙주 공신도상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신숙주 공신도상
"신숙주초상", 선현의 표준영정, 『한민족정보마당』online, 한국문화정보원.
한자명칭 申叔舟 功臣圖像
작가 미상
제작시기 1453년 무렵
소장처 청주 구봉영당
문화재지정사항 보물 제613호
유형 공신도상
크기(세로×가로) 167.0×109.5㎝


정의

조선시대 문신인 신숙주(申叔舟, 1414-1475)의 모습을 그린 공신도상(功臣圖像).

내용

공신도상의 제작 및 보관

이 그림은 현재 전해오는 신숙주공신도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충북 청원군의 구봉영당(九峰影堂)에 봉안되어 있다.

이 초상화는 조선 초기의 전형적인 공신도상을 따르고 있어 신숙주가 네 번에 걸쳐 공신에 책록되었을 때 가운데 한 시기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관 3품에 해당하는 백한흉배(白鷳胸背)삽은대(鈒銀帶)의 도상이 그림에 등장하고 있는데, 신숙주가 문관 3품의 직위에 있었을 때는 1453년 정3품 부승지로서 단종을 퇴위시킨 계유정난(癸酉靖難)의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책훈되었을 시기이다. 이를 통해 이 초상화는 1453년 무렵이나 그 직후에 그려진 정난공신도상으로 유추할 수 있다.[1]

화면의 우상단에는 "조선 영의정 고령부원군 시호 문충 호 보한재 신숙주 자 범옹 진(朝鮮領議政高靈府院君諡號文忠號保閑齋申叔舟字泛翁眞)"이라는 제기가 있고 왼쪽에는 "성묘을미 공졸후칠십년 을사개장(成廟乙未 公卒後七十年乙巳改粧)"이라는 글이 있어서 신숙주 사후 70년 후인 1545년에 그림의 장황(裝潢)을 다시 했음을 알 수 있다.[2]

공신도상 외에도 신숙주의 초상은 1749년(영조25)에 제작된 충북 묵정영당 소장본과 1890년(고종 27)에 제작된 평택 고령신씨 사당본이 전한다. 두 초상 모두 청주 구봉영당 소장 신숙주 공신도상의 이모본이다. 신숙주 공신도상은 조선 초기 공신도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며 조선시대 초상화 중 흉배가 그려진 가장 이른 예로도 주목된다.

문헌에 기록된 외모

신숙주의 외모에 관해서는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짧은 언급이 있다.

Quote-left.png 동지(同知) 홍경손(洪敬孫)이 젊었을 때 성균관에서 발원시(發願詩)를 짓기를, '이석형(李石亨)의 글씨, 조계(曹棨)의 활쏘기, 이인견(李仁堅)의 젊음과 신숙주(申叔舟)의 눈, 이문형(李文炯)의 얼굴, 손차면(孫次綿)의 음(양기)을 한 몸에 지니고 등과하기를 항상 정인지(鄭麟趾)와 같게 하리라.' 하고, 미처 아래 구절을 잇지 못하자 중추(中樞) 이계전(李季專)이 이때 옆에 있다가 말하기를, '내 이름으로 협운(協韻)하면 그대가 이을 수 있으리라.' 하여, 홍경손이 드디어 아래 구절을 이어 말하기를, "위장병은 이계전과 같지 말 것이다" 하니, 모두 포복절도하였다. 이 시의 뜻은 대개 이석형은 글씨를 잘 쓰고, 조계는 활을 잘 쏘며, 이인견은 나이가 어리고 이문형은 얼굴이 아름다우며, 신숙주는 눈이 아름답고, 손차면은 성욕이 강하고, 정인지는 두 번 장원 급제하였으나, 이계전은 위장병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Quote-right.png
출처: 성현(成俔), 『용재총화(慵齋叢話)』 제6권.


공신도상에 묘사된 모습

신숙주 공신도상좌안팔분면(左顔八分面)의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으로 공수자세를 취한 채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조선 초기의 전형적인 공신도상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화면은 세 폭 연폭이 이어져 있는데 이 또한 조선시대 초기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여기서는 얼굴 부분이 들어가는 중간 부위는 넓은 폭을 쓰고 팔꿈치 각 부분에서 양 끝으로는 좁은 폭을 사용하여 세 폭이 이어져 있다.[3]

초상화의 복식은 오사모(烏紗帽)녹포단령(錄袍團領)을 입고 족좌대(足座臺) 위에는 백목화(白木靴)를 신은 발이 놓여 있다. 발은 자연스럽게 족좌대를 딛고 있는데 팔자형으로 벌린 모습을 보이는 조선 중기 이후의 공신상의 형식과는 다른 특징이다. 사모는 모정이 높고 양쪽 뿔이 좁고 길면서 끝 부분은 약간 처져 있다. 가슴에는 백한이 수놓아진 백한흉배가 보이고 허리에는 삽은대를 두르고 있다.[4]

안면은 후보되었는데 운염과 준찰 등 조선 후기에 사용되는 음영법이 나타나고 있어 기록에 나타나는 1545년의 개장 이후에도 가채가 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안면부의 부드러운 묘법과 의복부의 직선적이고 빳빳한 필법은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5]

교의에 호피나 표피가 아닌 끈으로 방석을 매어 사용하는 것이나, 채전 없이 맨 바닥에 족좌대와 교의를 설치하여 담박하게 배경을 처리한 점, 흉배를 화면 중앙에 두드러지게 표현한 점, 단령 안에 자색 목깃과 홍색 안감을 드러내는 복식형태, 자연스럽게 족좌대를 딛고 있는 발의 표현 등은 조선 초기 공신도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신숙주 공신도상 공신도상 A는 B에 해당한다 A dcterms:type B
신숙주 공신도상 신숙주 A는 B를 묘사하였다 A ekc:depicts B
신숙주 공신도상 청주 구봉영당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신숙주 공신도상 정난공신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신숙주 초상(묵정영당) 신숙주 공신도상 A는 B의 이모본이다 A ekc:isCopyOf B
신숙주 초상(고령신씨 사당) 신숙주 공신도상 A는 B의 이모본이다 A ekc:isCopyOf B
장황 신숙주 공신도상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용재총화 신숙주 A는 B를 묘사하였다 A ekc:depicts B
성현 용재총화 A는 B를 썼다 A dcterms:creator B
좌안팔분면 신숙주 공신도상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오사모 신숙주 공신도상 A는 B에 나타난다 A ekc:isShownOn B
녹포단령 신숙주 공신도상 A는 B에 나타난다 A ekc:isShownOn B
백목화 신숙주 공신도상 A는 B에 나타난다 A ekc:isShownOn B
백한흉배 신숙주 공신도상 A는 B에 나타난다 A ekc:isShownOn B
삽은대 신숙주 공신도상 A는 B에 나타난다 A ekc:isShownOn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977년 신숙주 공신도상이 보물 제613호로 지정되었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6.561718 127.557204 신숙주 공신도상청주 구봉영당에 봉안되어 있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조선미, 『한국의 초상화, 形과 影의 예술』, 돌베개, 2009, 441-442쪽.
  2. 국립중앙박물관, 『초상화의 비밀』, 국립중앙박물관, 2011, 296쪽.
  3. 조선미, 『한국의 초상화, 形과 影의 예술』, 돌베개, 2009, 441-442쪽.
  4. 조선미, 『한국의 초상화, 形과 影의 예술』, 돌베개, 2009, 441-442쪽.
  5. 국립중앙박물관, 『초상화의 비밀』, 국립중앙박물관, 2011, 297쪽.
  6. "신숙주초상", 선현의 표준영정, 『한민족정보마당』online, 한국문화정보원.

참고문헌

유용한 정보

  1. "신숙주 초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7월 18일.

더 읽을거리

  1. 전시도록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조선의 공신』, 장서각, 2012.
  2. 단행본
    • 문화재청, 『한국의 초상화 : 역사속의 인물과 조우하다』, 눌와, 2007.
  3. 논문
    • 조선미, 「조선왕조시대의 공신도상에 관하여」, 『미술사학연구』151호, 한국미술사학회,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