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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정보<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64666&cid=40942&categoryId=33383 <출처> 두산백과, 조선]</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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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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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건국한 나라이며 1392년부터 1910년까지 한반도를 통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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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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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즉위한 태조(太祖) 이성계에서 1910년 마지막 임금인 순종(純宗)에 이르기까지 27명의 왕이 승계하면서 518년간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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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후반에 이르러 고려왕조는 권문세족(權門勢族)이 발호하는 가운데, 정치체제가 약화되고 왕권이 쇠퇴하였으며, 밖으로는 이민족(異民族)의 침입이 계속되는 등, 혼란을 거듭하였다. 이러한 때에 이성계는 여진족(女眞族)·홍건적(紅巾賊) ·왜구 등을 물리쳐 명성을 높이며 중앙정계에 진출,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의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고,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단행하여 구세력인 최영(崔瑩) 일파를 숙청하고, 또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하여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마침내 1392년 7월 16일 개성의 수창궁(壽昌宮)에서 선양(禪讓)의 형식으로 왕위에 올라 나라를 개창하니, 이를 역성혁명(易姓革命)이라고도 한다.
  
== 정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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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본문|조선의 통치 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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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모든 관료는 동반(東班:문관) ·서반(西班:무관)으로 구분되고, 이들 동 ·서반의 품계는 정(正) ·종(從) 각 9품으로 나누어 도합 18품계를 정하여 각 관등의 품계를 일정하게 하였다. 18품계의 관등은 다시 정책결정관인 당상관(堂上官)과 행정집행관인 당하관(堂下官)으로 나뉘며, 당하관은 다시 참상관 ·참하관으로 구분되는데, 참하관은 참외(參外)라 하여 직계가 낮은 실무자였다.
{{조선 행정기구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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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 정치 체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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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본문|조선의 정치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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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고려 후기에 국가의 재정이 파탄되고 민생이 피폐하였던 경험을 살려 초기부터 국가를 부강시키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방향으로 경제구조를 대폭 개편하였다. 국초부터 농본민생주의(農本民生主義)를 내세워 농업발달을 위한 여러 가지 제도와 함께 양반관료의 경제적 기반인 토지정책에 유의하였다.
  
조선의 중앙 정치 체제는 경국대전으로 법제화하였다. 중앙 정치는 문반과 무반의 양반으로 구성하여 운영되었다. 기본 9품에 조와 종이 있어 모두 18품계를 이루었다. 또한 주요 직급자인 당상관과 실무진인 당하관으로 나누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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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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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양반 중심의 사회였다. 양반이란, 원래 문관 벼슬을 가리키는 동반(東班)과 무관 벼슬을 가리키는 서반(西班)을 함께 부르던 말로, 관직에 있는 사람을 통틀어 부르는 말이었다. 이것이 조선에서는 벼슬한 사람만이 아니라 벼슬을 할 수 있는 신분을 지칭하는 말로 그 뜻이 변하였다. 양인에는 직업의 종류와 귀천에 따라 사(士) ·농(農) ·공(工) ·상(商)의 구별이 있었으나 왕권이 확고해지고, 관료조직이 정비되어 가면서 관료들은 지배층으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굳혀 마침내 향리나 농민과 뚜렷이 구별되는 신분을 마련하였다. 하급관리 ·지방행정실무자 ·기술관 등은 별도로 중인(中人)신분을 이루었고, 농업 ·상업 ·수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이른바 상민(常民)이 되었다. 한편, 그 밑에는 천민신분으로 노비 ·광대 ·사당 ·무당 ·창기 ·백정 등이 이에 속하였다. 특히 노비는 공공기관이나 개인에 소속되어 매매 ·증여 ·상속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 시대의 관직은 중앙 관직인 경관직과 지방 관직인 외관직으로 나뉜다. 경관직은 의정부와 6조를 중심으로 그밖에 여러 관직이 있으며, 외관직은 지방 행정 구역에 따라 정해졌다. 6조는 서로 업무를 나누어 맡았으며, 정책 회의 등에서 관서 사이의 업무를 조정하고 통일적인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를 운영하는 방법에 따라 6조 직계제와 의정부 서사제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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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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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서예·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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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건축은 크게 목조건축과 석조건축으로 나눌 수 있다. 목조건축은 초기에는 주심포(株心包) 양식이 우세하였으나 차차 다포(多包)집이 성행하였다. 석조건축은 석탑 ·부도(浮屠) 등이 있으나, 불교의 침체와 더불어 별다른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다.  
  
왕권을 견제하는 언관이자 청요직이었던 3사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이 있으며, 이 밖에 왕권 강화를 위한 국왕의 직속 수사기구인 의금부, 왕명을 출납을 담당하는 승정원이 있었다. 그리고 서울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는 한성부, 역사서 편찬과 보관을 담당하는 춘추관,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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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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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공예의 특색으로는 인공적인 면의 배격과 공간(空間) ·백색(白色)의 존중을 들 수 있으며, 이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든 공예 부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도자기도 회화와 마찬가지로 임진왜란을 계기로 전 ·후기로 나뉘어지는데, 전기는 분청사기와 백자가, 후기는 청화백자가 성행하였다.
  
=== 지방 행정 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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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참고|조선의 행정 구역|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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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의례의 일환으로 음악을 중요시하여 국초부터 음악을 담당하는 관청으로 아악서(雅樂署)와 전악서(典樂署)를 설치하였다. 특히, 세종 때 박연(朴堧)을 비롯한 음악가들은 수십 종의 악기를 새로 만들어내거나 개량하고, 악곡과 악보를 새로 정리하여 궁중음악의 기초를 확립, 마침내 아악(雅樂)을 대성시켰다. 이 무렵 동양음악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인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하였으며, 그 후 《악장가사(樂章歌詞)》도 간행되었다. 궁중음악과 별도로 민간에서는 당악(唐樂) ·향악(鄕樂) 등의 속악도 발달하였고, 농악무 ·무당춤 ·승무 등의 민속무용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한편, 산대놀이라는 가면극과, 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음이 민간사회에 보급되면서 조선 후기에 걸쳐 널리 유행하였다. 산대놀이는 양주 ·통영 ·안동 등의 것이 특히 유명하다. 
  
조선 초기의 행정구역은 고려말의 행정구역을 그대로 유지한 것이었다. 그러나 1413년 태종은 [[한반도]]를 여덟 개의 [[도 (행정 구역)|도]], [[팔도]]로 나누고 각 도에 관찰사를 두었다.<ref>조선은 [[관찰사]]보다는 덜 억압적인 관직인 [[감사]]가 실질적인 대표 관직이었다. [[대한민국]]은 [[도지사]], [[고려]]는 [[도병마사]]가 행정구역 도를 담당하는 최고 관직이다. 고려에서 8도는 군사 행정구역이었다.</ref> 조선은 고려와 달리, 모든 군현에 지방관인 수령을 파견하였다. 또 인구의 증가와 자연 촌락의 성장에 따라 현 아래의 단위를 정비하여 [[면리제]]가 정착되었으며, 특수 행정구역인 향, 소, 부곡이 소멸하였다. 수령에 대한 감찰을 위한 상설기구인 관찰사를 전국 8도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경재소를 설치하여, 유향소를 중앙에서 통제하였다. 또, [[역원제]]와 [[봉수제]], [[조운제]]를 정비하여, 중앙집권적 국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대한제국 고종|고종]] 32년 ([[1895년]])에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전국을 [[이십삼부|23부]]제로 개편하였다가, 이듬해 8월 기존 팔도 중의 다섯 개의 도를 남·북도로 나누어 모두 [[13도제|13개의 도]]로 행정구역을 재개편하였다.<ref> 칙령(勅令) 제36호, 〈지방 제도와 관제 개정에 관한 안건〔地方制度官制改正件〕〉(《[[고종실록]]》[[:s:고종실록 33년 8월#8월 4일|33년 8월 4일]])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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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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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glemap width="90%" height="200" lat="36.6808864" lon="131.4079434" type="hybrid" zoom="4" icon="http://maps.google.com/mapfiles/marker.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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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37449, 139.722107, 일본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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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glem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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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
  
=== 과거 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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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드&관계==
{{본문|조선의 과거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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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width:70%; text-align: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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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드!!관계!!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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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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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 ~은 ~에 위치해 있다. || 한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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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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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 ~의 수도는 ~이다. ||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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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 ~의 초대 임금은 ~이다. || 이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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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의 관리등용제도에는 [[조선의 과거 제도|과거]], [[음서]], [[취재]], [[천거제]], [[특지]]가 있었다. 음서는 '문음 (門陰)'으로 불렸는데, 신분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조선사회에서는 천시되어, 음서로 요직에 진출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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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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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작성자 : [[김대영]]
  
[[조선의 과거 제도|과거]]의 종류에는 [[과거 제도|문과]] (文科), [[무과]] (武科), [[잡과]] (雜科)<ref>잡과 과목은 [[외국어]] 분야의 [[역과]] (易科), [[천문학]] 분야의 [[음양과]] (陰陽科), [[의학]] 분야의 [[의과]] (醫科), [[법률]] 분야의 [[율과]] (律科)였다.</ref>가 있었다. 그 중 잡과는 서얼이나 중인, 일반 상민들이 주로 치렀다. 과거는 대체로 정기적으로 치러졌으나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특별히 열거나 왕의 재량으로 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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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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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각종 부정이 늘어나 본래의 의미를 잃게 되었다. [[갑오개혁]] 이후, 관리등용제도가 개편되면서 과거는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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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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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조선시대의 법은 [[신라]] 이후 적용된 중국의 당률(唐律) 영향 밑에서 발달되어 오다가, 조선 건국 이후 [[정도전]]이 규정한 [[조선경국전]]과 [[대명률]]에 근거한 법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후 제정된 [[경국대전]]과 그 후속 법인 [[대전회통]]과 [[속대전]], [[대전통편]] 등이 대명률과 함께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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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관장하고 죄인을 심문, 형벌을 구형하는 기관은 [[형조]]였고, 죄인을 체포, 추국하는 곳은 [[의금부]]였으나 죄인을 수사, 국문하는 기능은 형조, 의금부 모두 갖고 있었다. 그밖에 현대 한국의 서울특별시에 해당하는 [[한성부]]에서도 체포, 수사의 기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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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부와 8도의 관찰사 이외에 각 지방의 부윤, 부사, 도호부사, 목사, 군수, 현감, 현령, 면장 등에게는 행정권 이외에 사법권한이 주어졌으며 이들 면장과 그 상급자인 현령, 현감, 군수, 부사, 목사, 도호부사, 부윤 이들의 상급자인 관찰사 등으로 형률 시행이 보고되었으며 관찰사는 최종적으로 의금부와 형조에 수사, 처벌 결과를 보고하였다. 관찰사의 판결에 이의가 있는 자는 한성부에 제소하기도 했다. 한성부는 한성부내의 사건 사고 외에도 각 타도의 사건 사고도 일부 관할하였는데 이는 송나라의 영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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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관의 판결에 이의가 있었으나 [[조선 세종]] 때는 수령고소금지법이 제정되어 이의 제기가 불가능하였다. 이는 1455년 세조의 집권으로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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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기본법은 형법과 민법이었으며, 경국대전에 종합되어 있었다. 경국대전의 법 조항이 소략하기 때문에 형법은 대명률이 주로 적용되었다. 대명률은 명의 기본 법전으로 태장도유사의 5형 형벌 체제인 당률을 계승하면서 자자(刺字)와 능지처사(凌遲處死) 같은 극형을 추가하였다. 민법에 관한 사항은 제반 소송의 재판권을 가지고 있는 관찰사와 수령 등 지방관이 관습법에 따라 처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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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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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땔감장수.png|thumb|170px|조선 말기의 땔감장수 또는 나뭇꾼, [[성리학]]의 영향으로 조선에서 상업과 무역, 상인은 천대시 받았다. 1880년경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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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신발장수.png|thumb|170px|조선 말기의 신발(짚신) 상인으로, 짚신 행상이다. 1880년경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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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조선의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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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조선 후기의 농촌 경제|조선 후기의 상업|조선의 공업과 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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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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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조선의 사회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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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 기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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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조선의 교육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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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교육기관은 중앙과 지방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중앙에는 최고 학부인 [[성균관]]과, 중등교육기관에 해당하는 4학(四學)이 존재했다(→[[학당]]). 성균관의 입학자격은 소과인 생진과에 합격한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동학]], [[서학]], [[남학]], [[중학]]이 4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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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 중등교육기관에는 [[향교]](鄕校)가 존재했으며, 성현에 대한 제사와 유생의 교육, 지방민의 교화를 기능으로 했다. 각 부·목·군·현에 하나씩 있었는데, 규모와 지역에 따라 중앙에서 교관인 교수 또는 훈도를 파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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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초등교육에 해당하는 [[서당]] (書堂)이 존재했는데, 4학이나 향교에 입학하지 못한 선비나 평민의 자제를 대상으로 사설적으로 운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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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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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물장수.png|thumb|right|150px|조선 말기의 물장수. 항아리에 물을 이고 다니면서 판매하였다. 1880년경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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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조선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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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조선의 어문학|조선의 학문|조선의 과학과 기술|조선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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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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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조선의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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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기본적으로 [[주자학]] 중심의 유교 사회였다. [[불교]]는 유교국가인 조선의 철저한 견제를 받았으나 왕실의 개인 신앙이나 민중들의 신앙으로 이어졌으며, [[민간 신앙]]은 민중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는 정감록(한 도참 예언가가 말했는데, 고려 말에 정몽주와 초기에 정도전, 조선 선조 때의 정여립 등을 통해서 정씨가 이씨 왕조를 무너뜨리고 정씨왕조를 세우는 예언서)을 들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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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종교 행사에는 신자들의 혈연적 차별이 있어서, 불교 종교 행사와 달리 그들만의 신앙 모임을 고착화시켜 유지하기가 수월하다. 종친회의 종손, 학파의 제자, 악공 등의 제사 직접 관련자 식으로 출입이 제한되는 편이다. 불교 종교 시설은 비교적 출입이 자유롭지만 유교 종교 시설은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곳이 대부분이다. 종교적인 폐쇄성은 국가의 폐쇄적 성격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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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가톨릭|천주교]]는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인박해]]등으로 탄압받았으나, 19세기 말부터 이러한 종교적인 탄압은 신분제 해방으로 인해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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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외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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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조선의 대외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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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와 [[청나라]]에 대해서는 사대 정책을 펼쳤다. 한편 남쪽의 [[일본]]이나 [[유구 왕국]], 북방의 [[여진족]]에 대해서는 교린정책을 펼쳤다. 교린책은 강온책을 동시에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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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진족이 [[후금]](청)을 세워 중국을 지배하자 조선에서는 한때 [[병자호란]]의 원한을 갚자는 북벌론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조선 효종|효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결국 실행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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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으며, 조선에 들어서 아랍인이 아닌 서양인과의 접촉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과 들어온 서양 선교사와의 만남이었다. 그 뒤 접촉이 없다가 18세기부터 [[천주교]]가 전래되면서 조금씩 늘어났으며, 19세기에 [[서세동점]]과 맞물려 조선도 서양과의 접촉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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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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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공용|Category:Joseon Dynasty|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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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references/>
  
== 참고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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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톨로지/문화콘텐츠로 본 동양의 도깨비들}}
*{{위키인용 |ref="태조실록 1413"| reference ={{서적 인용 |저자=춘추관 관원들 |연도=1413 |제목=[[태조실록]]}} }}
+
* {{글로벌세계대백과|제목=조선 양반사회의 성립, 경제체제의 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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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깥 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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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인터넷 국역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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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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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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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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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 = [[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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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문서 =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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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 = [[13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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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료 = [[18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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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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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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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인문정보학입문2017]][[분류 : 문화콘텐츠로 본 동양의 도깨비들]] [[분류 : 요괴인간벰]][[분류:국가]][[분류: 일본의 요괴]][[분류: 김대영]]
[[분류: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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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392년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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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897년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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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한국의 옛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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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한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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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1일 (수) 01:21 판

국가 정보[1]

요약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건국한 나라이며 1392년부터 1910년까지 한반도를 통치하였다.

자세한 정보

1392년 즉위한 태조(太祖) 이성계에서 1910년 마지막 임금인 순종(純宗)에 이르기까지 27명의 왕이 승계하면서 518년간 지속되었다.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고려왕조는 권문세족(權門勢族)이 발호하는 가운데, 정치체제가 약화되고 왕권이 쇠퇴하였으며, 밖으로는 이민족(異民族)의 침입이 계속되는 등, 혼란을 거듭하였다. 이러한 때에 이성계는 여진족(女眞族)·홍건적(紅巾賊) ·왜구 등을 물리쳐 명성을 높이며 중앙정계에 진출,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의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고,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단행하여 구세력인 최영(崔瑩) 일파를 숙청하고, 또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하여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마침내 1392년 7월 16일 개성의 수창궁(壽昌宮)에서 선양(禪讓)의 형식으로 왕위에 올라 나라를 개창하니, 이를 역성혁명(易姓革命)이라고도 한다.

정치

조선의 모든 관료는 동반(東班:문관) ·서반(西班:무관)으로 구분되고, 이들 동 ·서반의 품계는 정(正) ·종(從) 각 9품으로 나누어 도합 18품계를 정하여 각 관등의 품계를 일정하게 하였다. 18품계의 관등은 다시 정책결정관인 당상관(堂上官)과 행정집행관인 당하관(堂下官)으로 나뉘며, 당하관은 다시 참상관 ·참하관으로 구분되는데, 참하관은 참외(參外)라 하여 직계가 낮은 실무자였다.

경제

조선은 고려 후기에 국가의 재정이 파탄되고 민생이 피폐하였던 경험을 살려 초기부터 국가를 부강시키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방향으로 경제구조를 대폭 개편하였다. 국초부터 농본민생주의(農本民生主義)를 내세워 농업발달을 위한 여러 가지 제도와 함께 양반관료의 경제적 기반인 토지정책에 유의하였다.

사회

조선은 양반 중심의 사회였다. 양반이란, 원래 문관 벼슬을 가리키는 동반(東班)과 무관 벼슬을 가리키는 서반(西班)을 함께 부르던 말로, 관직에 있는 사람을 통틀어 부르는 말이었다. 이것이 조선에서는 벼슬한 사람만이 아니라 벼슬을 할 수 있는 신분을 지칭하는 말로 그 뜻이 변하였다. 양인에는 직업의 종류와 귀천에 따라 사(士) ·농(農) ·공(工) ·상(商)의 구별이 있었으나 왕권이 확고해지고, 관료조직이 정비되어 가면서 관료들은 지배층으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굳혀 마침내 향리나 농민과 뚜렷이 구별되는 신분을 마련하였다. 하급관리 ·지방행정실무자 ·기술관 등은 별도로 중인(中人)신분을 이루었고, 농업 ·상업 ·수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이른바 상민(常民)이 되었다. 한편, 그 밑에는 천민신분으로 노비 ·광대 ·사당 ·무당 ·창기 ·백정 등이 이에 속하였다. 특히 노비는 공공기관이나 개인에 소속되어 매매 ·증여 ·상속의 대상이 되었다.

문화

건축·서예·회화

조선의 건축은 크게 목조건축과 석조건축으로 나눌 수 있다. 목조건축은 초기에는 주심포(株心包) 양식이 우세하였으나 차차 다포(多包)집이 성행하였다. 석조건축은 석탑 ·부도(浮屠) 등이 있으나, 불교의 침체와 더불어 별다른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다.

공예

조선시대 공예의 특색으로는 인공적인 면의 배격과 공간(空間) ·백색(白色)의 존중을 들 수 있으며, 이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든 공예 부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도자기도 회화와 마찬가지로 임진왜란을 계기로 전 ·후기로 나뉘어지는데, 전기는 분청사기와 백자가, 후기는 청화백자가 성행하였다.

음악

조선은 의례의 일환으로 음악을 중요시하여 국초부터 음악을 담당하는 관청으로 아악서(雅樂署)와 전악서(典樂署)를 설치하였다. 특히, 세종 때 박연(朴堧)을 비롯한 음악가들은 수십 종의 악기를 새로 만들어내거나 개량하고, 악곡과 악보를 새로 정리하여 궁중음악의 기초를 확립, 마침내 아악(雅樂)을 대성시켰다. 이 무렵 동양음악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인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하였으며, 그 후 《악장가사(樂章歌詞)》도 간행되었다. 궁중음악과 별도로 민간에서는 당악(唐樂) ·향악(鄕樂) 등의 속악도 발달하였고, 농악무 ·무당춤 ·승무 등의 민속무용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한편, 산대놀이라는 가면극과, 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음이 민간사회에 보급되면서 조선 후기에 걸쳐 널리 유행하였다. 산대놀이는 양주 ·통영 ·안동 등의 것이 특히 유명하다.


지도

노드&관계

노드 관계 노드
조선 ~은 ~에 위치해 있다. 한반도
조선 ~의 수도는 ~이다. 서울
조선 ~의 초대 임금은 ~이다. 이성계

기여

각주

  1. <출처> 두산백과, 조선

문화콘텐츠로 본 동양의 도깨비들

Class

클래스 노드
도깨비 갓파, 구미호, 한국의 도깨비, 오니, 땅거미, 덴구, 여우, 여와, 저승사자, 삼신할매, 염라대왕(2), 걸귀, 놋페라보, 구로보즈, 로쿠로쿠비, 야차
공간 중국의 귀, 일본의 요괴, 도노, 일본(2017), 도쿄, 교토소탄이나리 신사, 교토 니조카와라, 오사카 코토나미 정, 도깨비 다리, 김공 선정지비, 김성수 생가, 교토, 안동하회마을, 삼매리, 곡성, 한국, 조선
작품 꼬비꼬비, 신과 함께(2017), 요괴, 별신마을각시, 센과치히로의행방불명, 천년여우여우비, 갓파쿠와여름방학, 곡성, 괴물, 이누야샤, 도깨비, 요괴인간벰, 전설의고향, 차우, 조롱박형제, 금방망이 은방망이
문헌 《서유기》, 도깨비 방망이 속의 도깨비,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인 영감속의 도깨비, 도깨비 감투속의 도깨비, 김서방 도깨비, 도노 모노가타리, 무지나, 신설백물어, 증여리물어, 유빈호치 신문, 쿠마노의 민화, 금석 이야기, 비형랑 설화, 하세오조시, 구미호 이야기, 삼국유사, 금강설화, 조선물어집(朝鮮の物語集附俚諺)
문콘 게임, 드라마, 영화, 웹툰, 애니영화, 애니시리즈
캐릭터 가오나시, 쿠, 여우비, 손오공, 퇴마사
시대 현대, 에도시대

Relation

관계어 노드
은 -의 등장인물이다 가오나시 → 센과치히로의행방불명, 쿠 → 갓파쿠와여름방학, 여우비 → 천년여우여우비
은 -의 캐릭터다 가오나시 → 오니, 가오나시 → 땅거미, 가오나시 -> 놋페라보, 쿠 → 갓파, 여우비 → 구미호, 손오공《서유기》
은 -지역의 요괴이다 갓파도노, 덴구일본(2017), 여우 → 교토소탄이나리 신사, 구로보즈 → 도쿄, 우마왕중국, 나찰녀중국,
는 -를 만들었다. 여와인간
는 - 관련 설화이다. 도깨비 방망이 속의 도깨비한국의 도깨비,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인 영감속의 도깨비한국의 도깨비, 도깨비 감투속의 도깨비한국의 도깨비, 구미호한국의 도깨비,도노 모노가타리덴구 , 도노 모노가타리여우, 도노 모노가타리갓파 , 금석 이야기오니 , 비형랑설화도깨비, 신과 함께(2017)한국의 도깨비,금방망이 은방망이도깨비 방망이 속의 도깨비, 금석 이야기 → 헤이안 시대, 도깨비 방망이 속의 도깨비꼬비꼬비
는 -와 관련된 공간이다. 도깨비 다리한국의 도깨비, 김공 선정지비한국의 도깨비, 김성수 생가한국의 도깨비,

교토금석 이야기 , 교토하세오조시, 안동하회마을 → 별신마을각시,곡성곡성, 한강둔치 → 괴물, 삼매리 → 차우, 한국도깨비,한국곡성, 한국괴물, 한국차우,금석 이야기교토, 금강설화일본, 덴구일본

는 -에 등장한다. 오니하세오조시. 일본의 요괴하세오조시, 저승사자신과 함께(2017),저승사자요괴. 구미호전설의고향, 삼신할매전설의고향 ,염라대왕(2)전설의고향 , 걸귀전설의고향,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인 영감속의 도깨비조선물어집(朝鮮の物語集附俚諺), 땅거미에도시대, 오니에도시대, 여우에도시대, 오니금강설화, 갓파현대, 입이찢어진여자현대, 도깨비꼬비꼬비
는 -에 속한다. 구미호여우, 여우일본의 요괴, 덴구일본의 요괴, 구미호 이야기삼국유사, 구미호일본의 요괴 ,도깨비 방망이 속의 도깨비방이설화, 도깨비드라마, 요괴인간벰드라마, 전설의고향드라마, 신의 이미지가 부여된 뱀, 인간에게 해를 주는 뱀, 인간의 배우자로서의 뱀, 덴구 다오시덴구, 덴구 와라이덴구,덴구 쓰부테덴구, 덴구 유스리덴구, 덴구 다이코덴구, 덴구 가쿠시덴구, 덴구 마쓰덴구, 덴구 노히덴구, 입이찢어진여자야마우바, 입이찢어진여자일본의 요괴, 유키 온나일본의 요괴
은 -를 소재로 했다 곡성오니, 곡성덴구, 괴물오니, 괴물갓파, 차우오니, 차우덴구, 천년여우여우비여우,천년여우여우비구미호,꼬비꼬비한국의 도깨비, 센과치히로의행방불명오니, 센과치히로의행방불명땅거미, 센과치히로의행방불명놋페라보, 센과치히로의행방불명구로보즈, 센과치히로의행방불명야마우바,금석 이야기일본의 요괴, 요괴인간벰오니, 도노 모노가타리일본의 요괴, 이누야샤일본의 요괴, 이누야샤야차, 조롱박형제요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