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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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k Choi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6월 15일 (토) 22:5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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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한국어

강화도의 세번째 개신교 교회다. 홍의교회에 출석하던 주선일, 박성일, 허진일, 김봉일 등 몇몇 교인이 강화읍 천교하(현 강화읍 신문리. 신문리 144번지, 초가 6칸 반)에 초가집을 마련하고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오늘날 강화중앙교회의 모체(잠두교회)가 되었다.1900년 9월 1일의 일이었다. 강화지역 복음 전파 8년만에 수도 강화읍에 드디어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다음해 4월 존스 (G.H.Jones, 趙元時) 목사의 협조로 기와집 25칸, 초가집 16칸을 구입하여 교회를 현 위치로 옮겼다. 이 교회는 설립 8개월 만에 강화에서 가장 넓고 큰 예배당을 마련하게 되었으며, 강화 선교의 구심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04년 '월곶교회' 개척을 시작으로 26개 교회를 직접 개척하거나 설립에 도움을 주었고, 잠두의숙을 지어 교육운동에 앞장섰으며 강화지역의 항일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하와이 이민에도 김우제 전도사를 비롯한 강화교회 출신들이 참여하여 하와이 현지에 한인감리교회를 세우고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았다. 교회명은 1914년‘잠두교회’에서‘강화읍교회’로 변경. 1975년 11월 ‘강화읍교회’에서 ‘강화중앙교회’로 변경되었다.

영어

러시아어

Церковь Ганхва Чунганг - это третья протестантская церковь в провинции Ганхва. Некоторые члены Церкви, такие как Чо Сун, Сун Сын Ир, Су Ил Парк, Ким Бон Ил, которые посещали церковь в Хонге, предоставили дом для этой семьи в Ганхва Эупсон Гёхак (Ганхва-ып Щинмун-ри 144). Это было 1 сентября 1900 года. После 8 лет распространения Евангелия в районе Гангхва, церковь была окончательно построена в Гангхва-ойп. В апреле следующего года, в сотрудничестве с Дж. Х. Джонсом и Чжао Цзяньчжуном, он купил 25 плиток и 16 стульев и перенес церковь на свое нынешнее место. Через 8 месяцев после своего основания она стала самой большой церквью, самой большой часовней в Ганхва и центром миссионерства в Ганхва. В 1904 году способствовала основанию «Церкви Вольгот» и еще 26 церквей. Иммигрировавшие на Гаваи, такие как Ким Ю-Дже основали Корейскую методистскую церковь на Гавайях, заложив основы для движения за независимость в Северной и Южной Америке. В 1914 году название церкви изменилось с «Церковь Чжамду» на «Церковь Канхваып». В ноябре 1975 года название вновь изменено с «Церковь Канхваып» на «Церковь Ганхва Чунганг».

위치

해설

전도사역

1893년에 미감리회 존스 (G.H.Jones, 趙元時) 목사가 서사면 교항동(지금의 양사면 교산리)에 도착해 전도를 시작했다. 존스 (G.H.Jones, 趙元時) 목사는 1893년 가을, 제물포교인 이명숙(李明淑)을 전도인으로 삼아 강화도 담당자로 파송했다. 이명숙은 증산동 이승환의 자택에서 교인 4∼5명을 모아 예배를 시작했다. 오늘의 강화중앙교회는 홍의교회에 다니던 주선일과 그의 인척들이 1900년 9월 1일에 강화읍 신문리 144번지 천교하(川橋下)에 6칸 반짜리 초가집을 사 예배처로 사용해 첫 예배를 드렸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이 오늘의 강화중앙교회의 전신이다. 초기 개척인물로는 박능일을 비롯하여 김봉일과 권신일, 윤정일, 정천일 등이 있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이름자의 끝 자를 일자(一字)로 맺고 있다. 이는 ‘주 안에서 한 형제됨’을 다짐하는 뜻으로 본래 이름을 고쳐서 사용한 것으로, 소위 말하는 일자(一字) 돌림신앙의 장본인들이었다.

강화잠두교회

1901년 4월에 제물포지방 장로사인 존스 목사는 강화 선교가 보다 탄력을 받기 위해서는 강화 유수가 있는 중심으로 교회를 옮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교회의 위치를 부내면(府內面) 홍문동(弘問洞) 잠두(蠶頭, 누에머리) 부락의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기와집 25칸과 초가집 16칸을 206원에 사서 교회당으로 봉헌하고 교회 이름을 ‘강화읍잠두교회’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교육선교

1901년 5월 연회에서 박능일 전도사가 강화읍구역 담임자로 파송되어 1903년 3월 별세할 때까지 시무하며 강화 지역의 선교 거점교회로서의 기틀을 다졌다. 그는 부임 후 1901년 4월 1일 잠두교회 부설 잠두의숙(蠶頭義塾)을 설립하고, 숙장(塾長)으로 취임하여 강화에 신교육기관을 탄생시켰다. 잠두교회는 복음전도와 교육을 통한 민족운동에 진력했고, 잠두의숙은 1908년 12월 2일 에 정식 학교가 되면서 ‘사립제일합일학교’라 개칭되었다. 지금의 합일초등학교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9년 4월 9일 잠두교회 내 여자소학교인 ‘제일합일여학교’가 설립되었다. 신교육의 기회가 없었던 강화 지역의 열악한 교육환경에서 교회를 다닌다는 것은 당시 여성들에게 커다란 문화적, 교육적 혜택이었다. 1951년 한국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고 농촌을 살리기 위해 ‘복민의숙(현 강화실업고등기술학교)’을 개교했다.

항일독립운동

대표적인 항일독립운동은 두 가지다. (1)1907년 일본군의 강화기독교인 탄압에 저항하고, (2)1919년 3월 18일 잠두교회 청년교인 7명이 독립유인물을 인쇄·배포했다.

첫째로 1905년 3월 3일 강화진위대장을 사임한 강화잠두교회 권사 이동휘(李東輝)는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7월 24일 강화로 내려와 강화읍내 연무당에서 기독교도인 김동수 권사·김남수 형제, 허성경·김광천·김기약 등과 군중집회를 열고 격렬한 배일연설을 하였다. 7월 26일에는 연무당에서 대한자강회총회를 열고, 30일에는 전등사에서 김동수·허성경 등 기독교도와 해산된 군인 400명을 모아 합성친목회라는 대규모 반일집회를 열었다. 이후 8월 9일 강화군민의 봉기가 일어나자 수원의 일본군은 8월 11일 강화에 도착하여 진압을 시작하였다. 갑곶진 전투에서 50여 명이 사살되는 등 의병측 피해가 속출하는 한편, 강화잠두교회가 반일운동의 준동지로 지목되어 일본군이 포위를 하였다. 그리고 일진회 회원들은 주모자 이동휘 등을 체포한다는 명목으로 전 강화진위대 대원이었던 김동수 권사 3형제를 유인하여 압송하는 중 선원면 더리미에서 살해하였다. 이곳이 더리미 순교지다.

둘째로 1919년 3월 18일의 강화읍 만세운동이 있은 후 조구원을 비롯한 강화잠두교회에 출석하는 조봉암과 청년교인 6명이 강화읍교회에서 비밀조직을 결성한 후 독립운동 격문을 부착하고, 자유민보 등 10여 종류의 유인물을 배포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읍내 상인들에게 철시를 종용하고, 경찰로 근무하는 한국인의 각성을 촉구하다 4월 20일 체포되었다. 이것이 예수교도8인조사건이다.

하와이 디아스포라

강화, 인천 지역의 한인들이 하와이로 이주하게 되었다. 강화중앙교회 김우제(김이제) 목사는 하와이에서 한인감리교회를 세우는 데 앞장섰고 하와이 현지 한인들의 첫 예배를 이끌었다. 이들은 이후 미주 독립운동의 주축 세력이 된다.

시각자료

영상

가상현실

출처


『강화중앙교회100년사』이은용

기여

일자 역할 이름 전공
2019년 4월 편집 및 정리 최원재 교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