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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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을 받은 이후 효종 7년(1656)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 당초 안산(安山)에 설치했다가, 현종 7년(1666)에 강화도로 옮겼으며 유수 서원필(徐遠必)이 아뢰어 병마만호(兵馬萬戶)를 설치하였다. 영조 39년(1763)에는 유수 정당이 아뢰어 첨사감목관으로 승격시켰다. 에는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1명, 군관 11명, 사병 98명, 돈군(墩軍) 18명, 목자(牧子) 210명 등이 진선 3척과 함께 배속되었다. 초지진은 강화도 동쪽 해안의 초지돈(草芝墩), 장자평돈(長子坪墩), 섬암돈(蟾巖墩) 등 3돈과 황남포대, 진남포대 등을 관할하였다. 각각의 돈대에는 포좌(砲座) 3개와 대완구(大碗口) 등의 화약병기와 각종 무구류가 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함대와 싸웠으며 고종 8년(1871) 신미양요(辛未洋擾) 때에는 미국의 아시아함대가 침입하여 필사의 방어전을 전개하다가 함락되었다. 당시 콜로라도호(Colorado號)의 함포사격 등 미군 공격에 의해 초지진은 진내에 있던 군기고·화약고·진사(鎭舍) 등의 군사시설이 모두 파괴되었으며 포대에 남아 있던 40여 문의 대포도 파괴되거나 강화해협에 버려졌다. 신미양요 이후 다시 복구 되었다. 고종 12년(1875)에는 조선을 개항시키기 위해 일본이 파견한 운요호[雲揚號]가 강화도 동남방 난지도(蘭芝島) 부근에 정박하고 담수(淡水)를 찾는다는 구실로 초지진에 접근하였다. 초지진의 수비군은 운요호를 향해 포격하였고 운요호는 보복포격을 가해 초지진을 파괴하였다.이후 초지진은 폐진되었고 돈대 등의 시설은 모두 허물어져 그 흔적만 남았다. 1973년에 성벽 높이 4m, 장축 100m의 타원형으로 초지진의 초지돈만 복원되었다. 현재 초지돈 내에는 3개의 포좌와 100여개의 총좌(銃座)가 시설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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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성곽봉수편, 초지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