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시장 용인 5일장

DH 교육용 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에서 5일 간격으로 열리는 정기 재래시장이다.

용인5일장

소개[1]

용인장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장으로, 옛날에는 김량장으로 불렸는데 고려시대김량이라는 사람이 맨 처음 장을 열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조선 영조 때의 읍지(邑誌)에도 김량장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성남 모란시장과 함께 전국에서 가장 큰 장으로 꼽혔다. 그후 대형마트 등이 들어서며 쇠퇴하기 시작했지만 만물상이라 일컬어지는 장인만큼 여전히 규모가 큰 편이다. 주민들뿐 아니라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다. 장날은 매달 5·10·15·20·25·30일로, 용인중앙시장 부근 금학천변에 장이 선다.

형성[2]

용인지역에서 언제부터 오일장이 열리기 시작했는지 명확하지는 알 수 없으나 18세기 중엽에 간행된 <용인현읍지>와 양지, 죽산의 '읍지'에 당시 용인현 소재지의 읍내장김량장, 남사지역의 도촌장, 양지 방면의 개천장백암장이 있었다고 나와있다. 그 중 김량장백암장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김량장용인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오일장으로 옛날에 김량이라는 장수가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용맹하고 지략이 뛰어나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은 김량이 사는 곳을 '김량'이라고 불렀고, 이 곳에 장이 서자 '김량장'이라고 불렀다. 용인시에 거주하는 후손들은 조상의 이름이 불리는 것을 꺼려서 김량장 대신 '금령역'에서 유래하여 금량장이라고도 부른다.


변천 [3]

용인 관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오일장은 물론 용인장이라고 할 수 있다. 용인장은 정확히 말하면 김량장(金良場)인데, 지금의 처인구 김량장동에 서던 재래시장을 중심으로 열리는 오일장이었다. 김량천은 과거에 용인 고을과 양지 고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하천으로, 현재의 자리에 오일장이 서기 시작하면서 교역의 중심이 되고 인구의 집중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후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1년 지금의 기흥구 마북동(옛 구성읍소재지)에 있던 용인군청이 옮겨 오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지명에서조차 김량장이라는 명칭이 들어가 있을 정도로 김량장의 발전과 성장은 오일장과 함께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일장의 풍경 [4]

예부터 장과 관련하여 전해 오는 속담 중에 “남이 장에 간다고 하니 씨오쟁이 짊어지고 따라간다”라고 하는 말이 있다. 남이 장에 가니 나도 내년 농사에 쓸 씨앗을 짊어지고 뒤따라간다는 말이니, 이보다 더 오일장과 관련하여 실감나는 말도 없을 것이다. 실제로 장날이 돌아오면 볼일이 없어도 장에 가는 이들이 많았기에 생긴 말일 듯싶다.

지금도 평소에는 조용하던 농촌 마을이 장날만 되면 아연 활기를 띠는데, 옛날에야 더 말할 게 있을까 싶다. 장터에 이르는 길은 곡식자루나 닭, 달걀, 채소 등등 평소에 애써 기르고 생산한 것들을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혹은 소나 마차를 끌고 나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을 것이다. 지금은 신문이나 라디오를 통해, 또는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등을 통해 어느 오일장이든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세상 돌아가는 뉴스도 시시각각 알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나 옛날의 오일장은 물건을 사고파는 것은 물론이요, 세상물정을 알고, 새로운 소식을 전해 들으며 알리는 역할도 중요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즉 정보를 교환하는 마당이요 여론을 형성하는 터전이기도 했던 것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이웃마을의 친구나 건넛마을의 사돈을 만나면 으레 주막에서 막걸리 한 잔으로 목을 축이며 안사돈의 안부에서 시작해서 기르는 송아지의 상태까지 꼬치꼬치 이야기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과년한 사돈처녀의 중매도 이루어지고 남편 잃은 과부의 재취자리가 성사되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오일장이란 게 없는 게 없고 이루어지지 않는 게 없는 곳이었던 셈이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이 싸움구경·불구경이라고 하는데, 장날이면 어김없이 어디선가 싸움판이 벌어져 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 주었다. 물건값을 흥정하다 싸움이 난 경우도 많았지만 역시 아침부터 들이붓는 막걸리가 주범인 경우가 많았다.

싸움판이 벌어지면 눈깜짝할 사이에 사람들이 빙 둘러싸고 구경을 하는데, 심지어는 어느 한쪽을 응원하는 풍경도 벌어졌다. 그러나 장마당에서 시작된 싸움은 장마당에서 끝나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언제 그랬느냐는 듯 툭툭 털고 일어나 함께 어깨동무하고 주막에 들어가 다시 한 잔 걸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해장술에 취하면 애비 에미도 몰라본다”는 다소 듣기 거북한 속담도 있듯이 장날이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곳이 해장국집이었다. 그 중에도 선지해장국이 인기였는데, 백암장의 경우는 순대국이 유명하여 이제는 전국적으로 이름난 대표 상품이 되어 있다. 지금은 자가용을 타고 오가기도 하지만 예전에는 버스도 없어 걸어가는 게 다반사였다.

그리하여 장터에 도착하면 벌써 허기가 지니 발길은 자연스레 선짓국집이나 순대국집으로 향하게 된다. 순대국에는 으레 막걸리를 곁들이게 되고, 더러는 어제 먹은 속풀이를 하다가 아예 또 한 판 벌이게 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장꾼들 또한 몫 좋은 자리를 차지하게 위해 이른 새벽부터 부지런을 떤 터라 해장국으로 요기부터 해야만 하루를 견딜 수 있었다.

더러 전장(前場)에서 허탕이라도 쳤다면 아침부터 막걸리에 취하기도 했다. 이러한 해장국집들은 대폿집으로 더 많이 불렸는데, 술이라야 막걸리가 전부였다. 커다란 대접에 막걸리 한 대접을 들이키면 저절로 배가 불러 왔고, 안주야 김치쪽이나 왕소금이 전부였으나, 어쩌다 돼지비계라도 얻어먹는 날이면 그날은 정말로 운수 좋은 날이 되곤 하였다.

장사꾼들의 대부분은 마수걸이라고 해서 첫 번째로 물건을 사는 손님에게는 값도 많이 깎아 주고 인심도 후하게 썼다. 첫 손님을 놓치면 하루 종일 장사가 안 된다고 하는 속설 때문이었다. 하루해가 서산으로 기울면 떨이의 폭이 점점 후해지는 것 또한 장날이 아니면 찾아보기 어려운 추억이다. 아예 저녁을 일찌감치 먹고 파장 무렵 장을 보러 나오는 경우도 있었으니, 많은 물건을 떨이에 싸게 살 수 있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선과 같은 신선도를 요하는 물건들은 잘 사야 본전인 경우도 많았다.

당시 농촌 지역에서 가장 큰 돈은 뭐니뭐니해도 황소를 판 돈이었다. 우골탑(牛骨塔)이라는 말까지 있었을 정도로 일 년 내내 기른 황소를 팔아 자식들의 대학교 등록금을 대던 시절이었다. 아들의 대학 등록금이나 딸의 혼수로 쓰기 위해 힘들게 기른 소를 장에 끌고 나와 판 뒤, 모처럼 마신 몇 잔의 막걸리 때문에 거리나 차 안에서 ‘쓰리꾼’이라고 불리는 소매치기들한테 ‘쓰리’를 당했다면 넋이 나가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일 터이다.


연계정보

관계 대상 공간 설명
is Located In 용인시 용인시에 위치하는 재래시장
is Part Of 용인시 용인시에 포함되는 재래시장


바깥 고리

주석

  1. <출처> 두산백과-용인5일장
  2. <출처> 용인시 용인중앙시장 관광명소화사업-용인중앙시장 역사
  3. <참고 문헌> 임영상 외, 『시장과 시장사람들: 용인의 전통시장』, 도서출판선인, 2013.
  4. <출처>디지털 용인문화대전-도심 속에 간직된 추억들, 용인의 재래시장